< 808화 마지막 (41) >
“모든 인간은 마음 한편에 작은 선함을 가꾸고, 아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끔 잘못된 선택지에 발을 들이기도 하지만 그 잘못이 그들의 삶과 영혼을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기영 씨?
내 목소리가 들려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기영 씨….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내 시신을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마주 보고 대화라도 하려는 심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저게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혹시라도 연결이 끊기지는 않을까 급해 보이는 표정, 이쪽의 말에 반박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용보다는 목소리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 녀석이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째서 내가 이렇게 나타나 자신에게 말을 걸었는지,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김현성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불만과 의문을 토로하고 있었으니 오죽할까.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녀석의 첫 마디는 역시나….
-죄송합니다. 기영 씨. 죄송합니다.
미안함과 죄송함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현성이를 보니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다.
‘뭐 그렇게 미안한 게 많아.’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만 같은 대사. 내 기대에 부응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까지 나를 살려내지 못하고 있는 것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번에 터진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죄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전자는 아니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내 말 끊고 들어가는 건 아니지?’
“노을빛의 검사가 사과할 만한 행동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언제나, 항상, 노을빛의 검사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저야말로… 저야말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기영 씨가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노을빛의 검사. 하지만….”
김현성의 표정이 조금 변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야. 얘 왜 이래.’
무척이나 슬퍼 보이는 것 같은 표정, 일그러진 얼굴.
왜 갑자기 녀석이 이런 얼굴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방금 전과는 확연하게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대화가 꽤 오래 지속될 거라는 걸 알게 된 모양인지, 슬슬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번진 것만 같다.
그것은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고, 내가 처음 내뱉은 말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허탈해 보이는 눈. 김현성답지 않게 분노하고 있기까지 하다. 둠하지 않은 김현성이 나한테 분노를 보내는 건 또 색다르다.
-알고 계셨군요.
“…….”
-알고 계셨어요.
“…….”
-분명히 알고 계셨을 겁니다. 분명히!
‘너 지금 나한테 소리친 거야?’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기영 씨의 몸이 위험에 처하게 될 거라는 걸 알고 계셨잖습니까! 어째서! 어째서! 알리지 않으신 겁니까! 어째서 이걸 두고만 보고 계신 겁니까! 어째서 제게 전하지 않은 겁니까! 어째서 혜진 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너 이 새끼 정신 나갔어? 이 새끼. 이렇게 막 성질 내고 그래도 돼?’
-어째서 가만히 두고 보신 겁니까! 어째서 이런 일을 겪고도 그렇게… 그렇게… 태연하실 수가 있냔 말입니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너 이 새끼….’
“저 역시 노을빛의 검사가 느끼는 좌절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요! 기영 씨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영 씨는 이해할 수 없어요.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제가 어떤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저는 영웅이 아니에요. 기영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쉽게 용서하고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하다느니 그들의 마음속에 빛을 소중히 해야 한다느니 같은 말은 관심도 없단 말입니다.
“노을빛….”
-어째서! 보고만… 있었냐고요. 어째서!! 언제까지 자신을 버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습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자신을 희생해야 만족하실 수 있겠습니까! 기영 씨의 몸이란 말입니다! 제길! 제기랄! 이제는 지긋지긋하단 말입니다. 매번! 매번! 잠드신 이후에도… 인간을, 대륙을 위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되잖습니까. 제길!
‘너 정신 나갔어? 진짜?’
어느 정도는 반발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흥분한 모습은 무척이나 오랜만에 본다. 특히 다혈질 둠 버전이 아니라 일반 버전임에도 불구하고 이러고 있으니 기가 차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와, 진짜 내려가고 싶다.’
내가 배때기 상처 까고 있어도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나 보자고. 시바. 단언하건대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픈 척도 못 하고 겁먹은 척도 못 하니 무기를 빼앗긴 것 같은 느낌.
예상했던 것보다 김현성이 느끼는 충격이 더 커다란 것 같았다.
-대답하세요! 대답해 주세요!
‘말 안 해.’
-왜 보고만 계셨습니까!
‘말 안 한다. 나.’
-기영 씨? 기영 씨!
조금 졸렬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일단 흥분이 가라앉기 전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당황하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기영 씨… 기영 씨?
‘네가 자초한 거자너. 대화할 환경을 마련해 줘야 대화를 할 수 있는 거지.’
-죄송합니다. 기영 씨….
이번에는 죄송할 짓 한 거 맞다. 진짜. 솔로몬이 판결을 내려도 내 손을 들어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너무 흥분한 것 같습니다. 진심이…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관심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인간의 안에 있는 빛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도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
-기영 씨? 정말로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네. 기영 씨가 뭘 말하려고 하시는 건지 알고 있습니다. 다만 너무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제가 실언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실망하셨다면 정말로 죄송합니다.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정말로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얘 아무래도 다른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본인이 순간적으로 품고 있었던 악의와 인간에 대한 환멸감 때문에 연결이 끊긴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럴듯하긴 하네.’
빛의 성자와 연결될 수 있는 통로가 선한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저렇게 느낄 만도 하다.
필사적으로 스스로 품었던 생각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김현성에게 자기세뇌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선한 마음을 존중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만 같다.
뭔가 잘 돌아가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김현성에게 억지 도덕성까지 강요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조금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얼마나 힘들면 얘가 이래.
그간 많은 일이 있었으니 여러 가지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언론에서도 자꾸 지 찾는 것도 거슬릴 테고… 갑자기 들이닥친 대륙의 위기도 반갑지 않을 것이다.
혼자서 짐을 드는 걸 병적으로 두려워했으니 유일하게 짐을 들어줄 수 있는 형제와의 연결이 끊기는 걸 무서워할 만도 하지.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조금 부끄럽기는 하지만 사실 외신과의 결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가장 밝게 빛나는, 언제나 묵묵히 회귀자의 어둠을 밝혀준 그 녀석의 존재 때문이 아니었던가.
언제나 바보같이 자신을 희생했던 그 녀석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니 시신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에 화를 낸 것도 약간은 용인해 줄 만도 하다.
“노을빛의 검사.”
-네! 네… 기영 씨! 네! 다행이다. 하… 하하… 다행이야…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아까 한 말은 전부 다 잊어주세요.
“노을빛의 검사의 탓이 아닙니다.”
-네. 네.
정말로 네 탓 아니야.
“어째서 노을빛의 검사가 분노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환멸감을 느끼는 이유도, 인간에 대한 믿음의 빛을 저버리고 싶은 심정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오롯이 노을빛의 검사의 선택이며 의지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네.
“저는 노을빛의 검사가 인간성을 상실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제 자그마한 욕심이며 바람입니다. 노을빛의 검사가 행복해졌으면 합니다. 모든 굴레와 고통을 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죄책감을 벗어던지고 건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아가셨으면 합니다.”
-…….
“짐을 들어달라고 강요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노을빛의 검사가 인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노을빛의 검사를 응원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노을빛의 검사를 위하고 믿음을 보내는 이들이 많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으셨으면 합니다. 잘못된 길에 발을 들인 인간들보다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인간이 아름답고 따뜻하고 숭고하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네….
“힘든 일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노을빛의 검사가 빛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하신다면….”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웅장한 소리와 함께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 진짜 내가 생각해도 현성이 너무 고통스러웠어. 한 번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으니까. 잠깐 포션 정도는 먹여 줘야 돼.’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잔잔해진 빛 사이로 보이는 것은 찬란하게 비치고 있는 성검.
붉은 노을을 연상케 하는 검신을 가지고 있는 성검이었다. 조혜진 때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커스터마이징을 거친 모습, 내가 봐도 멋진 검이다.
기능 자체는 듀렌달보다 많이 부족할지는 모르겠지만 서브로 들고 다니기에는 충분히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검이었다. 문제는 가격이 비싸다는 것 하나.
‘이건 어디서 메우냐. 진짜….’
사실상 노을빛의 신이 벌어다 준 신성으로 구입하기는 했지만 굳이 그런 사실을 김현성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지상으로 검을 내리는 행위 자체에도 신성이 들어가니 조금은 생색내도 되지 않을까.
-기영 씨? 이건….
‘알기 쉽자너.’
그리폰뿐만이 아니라 장비 자체에도 관심이 많았으니까. 좋은 검이라는 것 정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지.
긴장한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띈다. 하지만 이걸 받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망설이는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사라질까 검을 곧바로 잡는 모습은 가관, 어차피 회귀자 사용설명서로 이상 가는 연결 시스템이 없으니 강한 영적 연결을 느끼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기분은 좋은 것 같았다.
‘오랜만에 신난 것 같네….’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네.
“인간을, 그들 안에 남아 있는 빛을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함께 할 수 있는 이들을 찾고 모두가 힘을 모아 앞으로 나아가셨으면 합니다. 괴로운 일이 있으면 함께 고민하셨으면 합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어려운 일이 있으면 모두가 머리를 맞댔으면 합니다. 노을빛의 검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 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제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세요.”
-…….
“믿음을….”
-네… 반드시… 반드시…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내가 한 말을 지키겠다는 표정이 괜스레 시야에 비친다.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을 이겨낸 모습.
나름대로 굳은 다짐을 한 것 같았지만….
대륙의 어둠이.
타락한 암흑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는 걸.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