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1화 마지막 (44) >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이렇게 얄밉게 공사를 쳐?’
저 바람잡이들이 혹시 녀석이 고용한 놈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만약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을 기다렸을 것이 분명, 청춘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싸구려 설계에는 솔직히 헛웃음이 나온다.
‘이게 통할 거라고 생각해?’
근데 통할 것 같기는 하다. 본래 인간은 자기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이들에게 조금 더 신경을 써주게 마련이었으니까.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놈이 자신을 대신해 화를 내주거나 곤란한 상황에서 꺼내준 것처럼 비추어질 것이다.
뭐 대단한 걸 도와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점수를 땄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거다.
조용히 송 빌런을 바라보는 김현성의 시선에는 아니나 다를까 약간의 고마움이 들어서 있었다.
이제야 녀석을 제대로 인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수준이었지만 놈이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이 새끼 연기 잘하네.’
-빛의 아들께서 영면에 들어가신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그 슬픔을 잊지 못하는 분들이 많은데….
‘연기 잘해요. 아주.’
-그분을 기리는 이들에게는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말입니다. 노을빛의 검사님이야 굳이 말씀드릴 필요도 없고요. 제게는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그분의 명성에 해를 끼치는 게 아닐까 두려울 정도입니다.
‘그분이라네. 고 이기영 명예추기경에서 그분이 되어버렸죠.’
-대륙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성자이십니다. 빛의 성자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듣기 좋으라 말씀해 주신 칭찬에… 제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 같아 죄송스럽지만 그런 말씀은… 적어도 파란 길드마스터의 앞에서는 되도록… 지양해 주셨으면 합니다.
‘빛의 성자를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파란 길드마스터.
-네. 괜찮습니다. 네….
-저희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노을빛의 검사님.
-파란 길드마스터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럽게 엑스트라들에게만 불똥이 튄 상황이다. 잠깐 동안 흥분할 뻔했던 김현성도 이상하게 정리된 분위기에 짐짓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고 뭐라도 말해야겠다 싶은 타이밍에 송 빌런에게 순서를 빼앗겼으니 저럴 만도 하다. 어쩌면 차라리 잘 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김현성보다는 김미영 팀장이 다행이라는 표정을 보이는 중, 김현성의 가까이에서 계속해서 상황을 전달해 주고 있었던 그녀 역시 여기서 사건이 터지는 걸 바라지 않고 있을 것이다.
이 자리의 성격이 어찌 됐든, 이게 누구의 잘못이든 간에 구설수에 오르는 걸 원하지 않고 있을 테니 말이다.
‘바람잡이들이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니니까.’
이 시점에 김현성이 흥분해 일을 망쳤다가는 아마 뒤쪽으로 소문이 돌지 않을까.
노을빛의 검사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미쳐 버렸다느니, 명예추기경을 잃어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쏟아질 게 뻔했다.
이미 조금씩 나오고 있는 이야기 이기는 했지만 이 이상 소문을 부풀릴 필요는 없다.
-…….
김현성이 침묵하고 있는 사이에 바람잡이들은 슬그머니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떠나는 중, 송 빌런은 한숨을 쉬며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저들을 너무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파란 길드마스터.
-…….
-저들이 명예추기경님을 잊은 것이 아닙니다.
-잊은 게….
-네.
-잊은 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따위….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분노하신 그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고 아주 작은 것들 하나까지 헌신하신 그분을 정말로 대륙이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그냥 저들은… 두려웠을 뿐입니다.
-어떤 두려움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모든 두려움입니다. 이 대륙을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 말입니다.
-…….
-명예추기경 없이 이 대륙을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 말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들은 저들뿐만이 아닙니다. 권력자들이나 모험가, 사실 그들이 느낄 두려움보다는 이 대륙을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이 느낄 두려움이 더 크겠지요. 최근에 대륙에 많은 일이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들이 느낄 공포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커다란 전쟁이 끝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우리는 아직도 그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녀석은 손에 들린 잔을 넘기며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여러 가지 일들을 떠올리며,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자신들은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요. 빛의 성자께서 떠난 빈자리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채워 넣고 싶어 하는 거예요.
자조적으로 웃음을 흘려보내는 연기력이 나쁘지 않다.
-잠든 이후에도….
-네. 그분은 대륙의 정신적인 지주였으니까요. 저 역시 무섭습니다. 더 이상 빛의 성자님에게 의지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분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제 자신이 한심하더군요. 빛의 성자의 품 안에 서 벗어난다는 건, 저같이 평범한 이들에게는….
-잠드신 이후에도…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겁니까.
-…….
-…….
‘이걸 이렇게 해석해 버리네.’
아니나 다를까 잠깐 멈칫하는 송수경이 시야에 비친다.
뭐라고 말하는 게 정답인지 본인도 확신할 수 없는 모양, 빌드업 자체는 괜찮게 잡은 것 같았지만 예상하지 못한 희생 빌런의 등장에 동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논점 자체를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으니 저렇게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모두가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하… 하….
-믿, 믿… 믿고 싶지 않은 겁니다.
-…….
-네. 믿고 싶지 않았겠죠. 그분이 잠시나마 우리의 곁을 떠났다는 걸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파란 길드마스터께서는 인정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제야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호응하고 있는 김현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본인들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서 소문을 부풀리는 자들입니다. 빛의 성자의 현신이 나타났다느니, 명예추기경님이 다시 살아 돌아오신 것 같다는 헛소문들은 힘없는 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진 헛소문들입니다. 저 역시 제게 붙어 있는 수식어들이 합당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끄러운 말입니다. 누가 감히 그분을 대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파란 길드마스터.
‘이 새끼….’
-저는 힘없는 자들의 소문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대중들의 앞에서는 그들의 말을 부정하거나 흘리지 않습니다.
‘명분이 있네.’
명분은 확실하다.
-그들에게 안식처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대륙을 안전하다고 느낄 만한 장소로 만들고 싶습니다. 힘없는 자들이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는 대륙을 다시 한번 그들의 손에 쥐여주고 싶었습니다. 빛의 아들을 대신할 수 없다는 건 그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지만… 저는 힘없는 자들을 위하고 싶었습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거짓말에는 토악질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나쁘지 않기는 해.’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역린을 놈이 알고 이런 빌드업을 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리는 없지.’
김현성이 부담감을 가지거나 짐을 드는 것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나뿐이었으니까.
아마 빛의 아들의 후예로 불린다는 명분을 만들고 싶을 뿐이었겠지만 김현성의 눈에는 놈이 내 짐을 들어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쩌면 대륙을 위해 모든 걸 희생했던 그 녀석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강요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대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포지션을 취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나를 떠올릴 여지가 있지 않을까.
물론 김현성이 누군가의 모습에 나를 투영하는 게 상상이 가지는 않지만 적어도 놈에 대한 경계가 줄어들 계기가 되기에는 충분할 수 있다.
‘이거 잘되고 있는 거 맞아?’
녀석이 빛의 아들의 눈과 심장을 훔치기 위해서 이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지만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슬그머니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김현성 이 새끼. 또 갑자기 맛탱이 가서 뭐 당신은 희생하지 마세요. 막 이러는 거 아니야? 갑자기 송수경을 측은히 여겨서 가까워지다가 새로운 우정을 찾은 다음….’
기영 씨가 생각나는 사람이군. 이 사람도 똑같은 고통을 겪게 할 수는….
‘시바. 이따위 전개로 가는 거 아니냐구.’
계획이 시작되고 녀석이 눈과 심장을 훔친 시점에서 모든 게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들통 나기야 하겠지만 애지중지 키운 회귀자가 잠시나마 새로운 우정을 찾는다는 게 썩 내키지는 않는다.
‘그런 전개는 말이 안 되자너….’
이 새끼가 양심이 있으면 그런 생각하면 안 되지.
묵묵하게 놈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성의 얼굴에 쓸데없는 불안감이 장착된다.
김현성이 생각하는 걸 멈췄는지 모르겠다. 내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키지 않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제대로 읽을 수가 없어 답답할 지경, 심지어 송수경 역시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는 김현성을 확인한 이후에 불안한 표정을 보내오고 있었다.
본인이 정답을 누른 건지, 누르지 않은 건지 답이 나오지 않으니 답답해하고 있는 것만 같다.
잠깐 동안 고개를 끄덕인 이후 김현성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착석하기 시작, 송 빌런 역시 어정쩡한 포즈로 본인이 준비한 모임을 주도하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설계 결과에 따라 많은 옵션을 준비했지만 일단은 자신의 계획이 먹혀 들어갔다는 가정하에 일을 진행시킨 것 같다.
이기영의 시신 탈취 미수 사건과 블랙마켓, 현재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현상에 대한 조사 결과를 내놓았을 때는 김현성마저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
어차피 날조된 정보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에 실제 상황이 터졌을 때의 매뉴얼 설명이나 관리 위원회의 포함된 네임드 영웅들의 포지션 따위를 피티로 만들어 주도적으로 회의를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야전지휘관은 모두 하나의 컨트롤 타워로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그건….
본인의 능력을 어필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1인 전술을 할 수 있다는 걸 밝히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한 것 같았지만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장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전술적 자신감과 능력이 없다면, 주변 이들의 신뢰가 없다면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확실히 송수 경님이시라면….
-네. 분명히 가능하실 겁니다.
악마로 변해버린 송수경의 모습을 모르는 김현성이야 가능할까? 라는 얼굴로 의아해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모두가 수긍하니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자는 분위기. 아니, 심지어 조금은 기뻐 보이기까지 한다. 이 새끼가 왜 기뻐하는지 모르겠다.
‘뭐야. 네가 왜 거기서 기뻐해?’
이 새끼 혹시, 시바, 나 배신 때리는 거 아니야?
유능한 머리를 찾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회의가 끝난 이후에 따로 녀석을 찾아가는 김현성의 모습을 보니 괜스레 실망감이 차오른다.
-기대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 감사합니다. 파란 길드마스터. 영광입니다.
‘시바 새끼. 배신자 새끼. 나쁜 새끼.’
하지만 이윽고 김현성이 떠올린 생각에, 조금 다른 의미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기영 씨가 맡은 역할을 대신할 수 있도록… 힘써주십시오.
입꼬리가 조금은 이상하게 올라간 얼굴.
어색한 표정.
-믿고 있겠습니다.
잠깐 동안 김현성이 머릿속에 떠올린 비틀린 생각은 이미지처럼 내 머릿속에 전달된다.
-노력해 주세요.
당황스러워 말이 다 나오지 않을 지경.
“너 왜 그래. 현성아….”
그 착해빠진 김현성이… 송수경을 희생시키려 하고 있었다.
되돌아올 빛의 성자를 대신해 대륙의 짐을 떠맡길 희생양으로.
‘뭐야. 너 왜 그래… 인간 믿으라고 한 지 얼마나 지났다구….’
김현성은 놈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