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817화 (808/1,590)

< 817화 마지막 (50) >

‘편지를 쓰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시간을 잘못 찾아온 모양이군요… 오스칼 님.’

‘괜찮아요. 이기영 님. 마침 거의 다 끝나가는 도중이어서….’

‘이번에도….’

‘네. 어머니께서 걱정하실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항상 말씀드리지만 둘이 있을 때는 아리스라고 불러 주셔도 돼요. 너무 불편해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예전처럼 편하게 해주시는 게 더 마음이 놓이거든요.’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리스 님. 하지만 마땅히 올려야 할 예의를 표현한 것뿐입니다.’

‘제가 이기영 님께 그런 과분한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고 계시잖아요.’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이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 그렇죠. 네….’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미천한 삶이라는 건 없습니다. 구분 짓는 이들이 존재할 뿐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려야 할 자격이 있습니다. 아리스 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낮추실 필요 없습니다. 아리스 님께서 자라 온 환경이 어떻다고 한들, 베니고어 님의 밑에 있는 모든 인간은 평등합니다.’

‘제가… 잠깐 잊고 있었네요.’

‘불안하십니까?’

‘…….’

‘…….’

‘네, 불안한 것 같아요. 무섭고… 무거운 것 같아요. 가끔… 가끔 꿈을 꿔요.’

‘…….’

‘저를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제게 손가락질을 하는 꿈이에요. 오스칼로서 단상에 오르고 나선 이후에 저를 믿고 따르는 동지들이 제게 손가락질하는 꿈이요. 그럴 때면 단상 위의 오스칼은 사라져요. 잘랐던 긴 머리가 다시 생겨나고 제복이 아니라 시녀복을 입고 있는 아리스가 보여요. 멍청하고 두려워하고 억압되어 있는 아리스가 창백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봐요. 동지들은 돌을 던지죠. 속았다고… 네게 속았다고… 네가 우리를 이끌 자격이 있냐고… 네가 새로운 우리를 이끌 수 있는 재목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냐고… 말이에요.’

‘…….’

‘무슨 말이라도 내뱉고 싶지만 그럴 때면 목이 막혀 버린 듯 아무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요. 베니고어 님의 말씀이 옳다는 건 알고 있어요. 이기영 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맞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하지만… 제가 너무 오랜 시간을 이렇게 살아왔나 봐요.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저를 선택하신 걸 후회한 적이 있으신가요. 실수라고 생각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리스 님….’

‘아니요. 제가 괜한 말을 드렸네요. 이기영 님이 실수할 리가 없는데… 죄송합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내, 내일 연설 준비… 해야겠죠.’

‘아리스 님은 멍청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억압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불안하시다면 언제나 제가 아리스 님의 옆에 있다는 것만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네. 언제나 잊지 않고 있습니다. 빛의 아들이시여. 하지만….”

“…….”

“하지만 빛의 아들께서 계시지 않는 지금은 너무나도 두렵습니다. 행여나 제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까. 이 모든 게 저의 책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 참을 수가 없습니다.”

---반역자들을….

“…….”

---반역자들은 마땅히 죄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찬란했던 제국의 영광을 구정물 속으로 처박은 놈들에게 신벌을 내리고 말리라.

“시민들을 대피시켜라! 교국의 병사들아! 우리가 싸워 쟁취했던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자!”

정신없이 달려왔던 과정 속에서도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었다.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교국, 커다란 뜻을 향해 함께 싸워 온 동지들, 우뚝 솟은 시계탑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찬란했던 우리의 나라.

그 안에서 나를 지탱해 주던 빛의 아들의 모습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영겁의 시간이 지나가도 그 기억은 교국의 역사에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교국의 빛이 바래지는 날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괜스레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돈다. 조용히 바깥을 바라봤지만 내가 뭔가 할 수 없을 거라는 무력감이 전신을 뒤덮는다.

어쩌면 이런 결말을 맞이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분의 선택이 틀렸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마 내가 그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까.

“혁명. 찬란했던 승리.”

제국은 무너지고 교국이 일어났다.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았다.

배고픈 자는 여전히 배고팠으며 가난한 자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목소리를 높일 수 없었던 이들은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동지들의 뜻은 퇴색되고 변질되었고 신성한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했다.

혁명을 승리했지만 실패이기도 했다. 그걸 부정하고 있었을 뿐이다.

신의 뜻의 반하는 자들이 틀렸고 우리가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했다.

나라는 부패하고 새로운 계급이 만들어졌다. 위에 있는 자들이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쩌면 빛의 아들께서 실망하시는 것 역시 당연하리라.

새하얀, 천사 같았던 그분의 숭고한 뜻을 오염시킨 것에 대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후회하고 계실까.”

---반역자들을 죽여라!

“제기랄! 버텨라! 교국의 병사들아! 조금만 버티면 지원군이 도착한다!”

“정말로 여기가 끝인 겁니까. 신이시여!”

“빛의 아들이시여. 정말로 우리들을 버리나이까. 베니고어시여. 정말로 인류를 심판 하려 하시나이까.”

창문에 비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긴 머리에 시녀복을 입고 있는 아리스 시녀가 보인다.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오스칼 님.”

“…….”

“…….”

붉은 머리를 하고 있는 여자 한 명. 그래. 이 여자가 있었지.

“샤를롯트 의원.”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 거냐고 묻지 않습니까.”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정신이 아니군요. 손을 놓으신 겁니까?”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저…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을 뿐입니다. 빛의 아들의 뜻이….”

“…….”

“빛의 아들의 뜻에 고민해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

“…….”

“이 멍청하고 아둔한 년.”

“…….”

“너는 정말로 멍청하고 아둔하구나. 이 미천한 시녀야.”

“…….”

“조금이나마 네가 지도자에 그릇에 어울린다고 믿었던 내가 바보였다. 이 벌레 같은 것아. 네가 아버님과 언니를 대신해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 내가 멍청했구나. 미천한 년.”

“네. 황녀님의 말씀이 옳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앞에 선 자의 모습이야말로 지도자에 걸맞다.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눈과 고고한 기품,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어떠한 역경에도 다시 일어날 것 같은 모습이야말로 지도자의 모습이라 할 만하다.

그 모습은 자신이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그렸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는 황녀가 아니다.”

“저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샤를롯트 님. 아무것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빛의 아들의 뜻 없이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멍청하고 미천하고 아둔한 시녀입니다.”

“…….”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말했지요. 저는 그 말을 부정했지만 이제는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이름을 받고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았다고 한들, 제 본질이 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시녀였지요. 네. 샤를리아 님의 시녀였습니다. 지금에서야 저는 오스칼이 되었지만 지금 떠올려 보면 모시는 분이 바뀌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샤를리아 님에서 그분의 시녀로 말입니다.”

“…….”

“저는 그분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샤를롯트 님. 그분이 바라시는 일을 거부할 수가 없어요. 교국의 지도자로서 어울리는 것은 샤를롯트 님입니다. 지금의 교국을 구하실 수 있는 분은 샤를롯트 님뿐입니다.”

“정말….”

“바깥을 바라보세요. 샤를롯트 님. 저들은 제국을 원하고 있습니다. 저 망령들이 원하는 것은 찬란했던 제국의 영광이 아닙니까. 샤를롯트 님이야말로 제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적통의 후계자이며. 이 장소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손이 떨린다. 가슴에 붙어 있는 인장을 떼어내 천천히 그녀에게 내밀자 일그러지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익숙한 얼굴이다. 혐오하는 듯한 얼굴이고 더러운 것을 보았다는 듯한 얼굴이다.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저 익숙한 표정은 오히려 마음을 놓이게 했다.

하지만 금방 눈물이 차오르는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그 모습은 정말로 무어라 표현하지 못한 표정이었기 때문에 잠깐이나마 심장을 멈추게 만들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러니 살려야 합니다! 샤를롯트 님께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샤를롯트 님이라면 모든 걸 본래대로 되돌릴 수 있으실 겁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이 말이다. 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새로운 교국을 세우기 위해. 많은 이들이 죽었다. 이 나라는 숭고한 이들의 피와 희생으로 일구어낸 나라다. 그 안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다고 한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

“내 아비와 언니 역시 눈을 감았고, 뜻을 함께하지 못한 수많은 백성이 뼈를 묻었다. 교국은 희생으로 세워진 나라이며 나는… 구역질 나게도 나는 이 모든 것에 자랑스러워했다.”

“…….”

“새로운 시민들에 자랑스러워했으며, 뜻을 하나로 모을 수 있게 된 이들에게 자랑스러워했으며 새로운 교국을 이끌어 갈 그대의 모습에 자랑스러워했다. 잘못된 방법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피를 흘리는 방법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변화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에 행복해했다. 이 땅을 위해 희생된 이들의 피가 결국 옳음이었음을! 나는 그대로 하여금 그것을 느끼게 되었다!”

“샤를롯트 님.”

“하지만…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이 허상이었구나. 신성한 민주주의 역시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었구나. 하… 하하… 하하하하! 빛의 아들이 결국에 틀린 것이다. 그가 틀린 것이야!”

“그분께서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샤를롯트!”

“닥쳐라! 이 미천한 것아!”

“…….”

“어딜 감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냐! 주제도 모르는 더러운 것이!”

얼굴이 화끈거린다.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돌아간다.

“네 자리를 지켜라. 역겨운 것. 네가 선택한 것이다. 네 운명을 다시 바꾼 것은 네 미천한 근본이다.”

눈물을 머금고 손을 올리고 있는 샤를롯트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나는 너와 다르다. 나는 버리지 않을 것이다.”

“…….”

“나는 절대로 교국을 버리지 않을 것이야. 피로 얼룩진 이 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절대로 말이다.”

“…….”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니 취하지 않겠다.”

“그분은 틀리지 않았….”

“그렇다면 그것을 증명해 보라. 역겨운 것.”

떨어지고 있는 교국의 인장이 눈에 보였다.

등을 돌린 샤를롯트의 뒷모습도,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도 모두 꿈만 같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어엉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내뱉게 된다.

더럽혀진 인장을 꽉 껴안는다. 오스칼은 없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오스칼이 아닐 것이다. 찬란한 교국을 이끈, 혁명을 이끈 혁명가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망쳐 버렸다. 가면이 벗겨진 만신창이가 된 아리스 시녀로 보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몸을 일으킨다. 붉은 뺨으로, 정리되지 않는 머리카락으로. 더럽혀진 제복으로….

몸을 일으킨다.

아마.

아마도.

아리스의 모습으로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