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820화 (811/1,590)

< 820화 마지막 (53) >

“성스러운 창을 이어받은 전사가 빛의 아들의 뜻을 부정해 그를….”

-그만해라. 진짜.

“…….”

-…….

“그리하여 산 자와 죽은 자를….”

-그만하라고. 나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그만해. 진짜.

“…….”

-…….

“알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꼭 그렇게….

“뭐, 기분 좋으니 나오는 소리죠. 지금 이걸 보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짜증 나는데 어떻게 합니까?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린데 진짜 그런 말투 좀 자제해 주세요. 열 받는 거 이전에 불안하단 말입니다.

“뭐가 불안해요?”

-달라지는 것 같아서 그래요.

“네?”

-달라지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이런 말 하는 것도 부끄럽고 또 스스로한테 수치스럽지만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제가 그쪽 사정을 잘 모르니 하는 생각이지만 부길드마스터가 정말로 신이 되면 어떻게 하지…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거기에 오래 있다 보면 인격을 상실하거나 하는 일도 있는 겁니까?

“그럴 일 없어요.”

-혹시 몰라서 하는 이야기예요. 이 사람들이 정말로 부길드마스터를 신으로 받아들이게 돼서 내려오는 일에 차질이 생긴다는 가정은 안 해본 겁니까? 그 대륙의 의지라는 게 허락하지 않을 가능성은 어떻습니까. 위에 있는 이가 아래로 내려온다는 게 일반적으로 허락되지 않은 일이라면 대륙인들 모두가 부길드마스터를 신앙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게 계획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는 걸 말씀드린 겁니다. 제가 뭘 몰라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결코 쉬운 일처럼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물론, 제가 짜증 난다는 게 가장 커다란 이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그만해 주세요.

정말로 불안하다는 얼굴로 교국을 바라보는 조혜진이 눈에 들어왔다.

‘얘가 쓸데없는 걱정만 늘었자너….’

하지만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런 걱정을 할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제국의 병사들과 교국의 투사들이 신화의 한 장면을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은 뭔가 할 말을 잊게 만들었으니까.

애초에 빛의 아들이 희생된 대륙이라는 던전의 이름과, 빛의 아들의 뒤를 밟는 이벤트의 내용 자체가 그 불안감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대륙이 이기영을 신으로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닐까. 초월적인 힘이 이기영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종류의 불안감이다.

그러고 보니 맨 처음 신창을 내리고 평소처럼 대해줬을 때 조혜진이 크게 안심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이거 현성이도 이렇게 느끼고 있으려나.’

딱히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인격이 깎여 나갔다고, 인간을 벗어나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다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여겨진다.

어쩌면 대륙이 내가 아래로 향하는 걸 막고 있다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지.

‘요건 몰랐네.’

초조하고 불안했을 테니 이상한 생각들을 해보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

조혜진처럼 언제 한번 터놓고 이야기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했지만… 이건 조금 더 고민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 얘 놀리는 게 먼저였으니까.

“아구… 우리 혜지니 걱정해쪄?”

-닥쳐요.

“아구구구… 걱정해쪄요? 너무 기쁘네. 기영이 기분 좋자너.”

-닥쳐라! 진짜. 내가 이래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진짜 걱정도 많다. 우리 혜지니….”

-…….

“우리 혜지….”

-닥치라고! 이 새끼야! 닥치라고! 닥쳐! 진짜 그만해라! 그만해라! 그만해!

“아… 알았어요.”

-성질 건드리지 마. 제발 그만해….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지간히 부끄러운 모양, 쟤 저런 표정은 또 처음 보는 것 같다.

엄청 후회하는 것 같은 얼굴,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급하게 말을 돌리려 시도하는 모습이 보인다.

-부길드마스터… 근데 부길드마스터는….

“네?”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계셨습니까?

아까 날렸던 질문의 연장선, 어지간히 말을 돌리고 싶었던 것 같다.

“네.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

“우리 혜지니가 나를 걱정해 줄 거라는 거 예상하고 있었….”

-이 시발! 개새끼야! 작작하라고!

“아. 알겠어요. 진짜 그만할 테니까. 창 버리지 마세요. 이제 안 할 테니까.”

-가만 안 둘 겁니다. 한 번 만 더 하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예요.

“알겠다니까요. 뭐… 장난기 빼고 말씀드리면 솔직히 예상 못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벤트가 어떻게 흘러갈지 뭐가 정답인지, 그걸 어떻게 때려 맞힐 수 있겠어요?”

-…….

“불안해하지 마세요. 진짜로 안 할 테니까.”

-…….

“아마 갈래가 여러 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네임드 몬스터를 사냥하는 방법도 있었을 거고 제국의 망령들을 설득하는 방법도 있었을 겁니다. 제가 아예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 있었을 수도 있고요. 선택은 제가 한 게 아니라 오스칼, 아니, 아리스가 한 거예요. 아직 결과가 완전히 나온 게 아니니 벌써 김칫국 마시는 것 같기는 한데… 저는 그녀가 옳은 판단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국의 혼을 깨운 게 아리스 님의 능력이라는 겁니까.

“글쎄요. 그것도 잘 모르겠네요. 근데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지혜 누나가 그리고 있는 그림과는 거리가 먼 것 같기도 하고….”

-아리스 님은….

“설명하기 조금 어렵습니다. 저도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잘 모르겠으니까.”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 좀 그렇기는 하지만 솔직히 기적이라고밖에는 표현하지 못하겠다.

상태창에 보이는 아리스가 특수능력을 깨달은 것도 아니었고 모험가로서 성장해 교국의 혼을 소환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굳이 설명하자면 조혜진의 창을 잡았을 때 신성이 흘러 들어갔고 그녀의 외침에 힘이 깃들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봐도 이게 가장 그럴듯한 가설로 느껴진다.

---혁명하라! 동지들이여! 혁명하라!

“우리들의 투쟁의 깃발을 이곳에 다시 한번 세우자!”

그게 아니라면 저 혼들이 아리스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싶을 뿐일 수도 있고….

대륙에서는 상식 밖의 일이 많이 일어나기도 하니까.

저곳에서 싸우고 있는 교국의 시민들처럼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가장 마음 편할지도 모르겠다.

-신기하군요. 이 광경이 정말로 기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 벅차오르는 듯한 기분입니다.

“…….”

-정말로 부길드마스터가 이곳으로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다른 건 몰라도 부길드마스터가 여기에 돌아오기를 바라는 건 진심입니다. 그걸 위해서 싸우고 있는 거예요.

“…….”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라이오스? 아니면… 연방으로….

“글쎄요.”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각자의 자리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김현성은 결국 북부로 몸을 옮기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 조금 머뭇거리는 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날개를 펼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얘가 이걸 감당할 수 있을까.’

본인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몸이 떨리고 있는 것만 같다.

-연방에서는 전투가 벌어질 것 같습니다. 차희라 님이 도움을 필요로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손을 보태는 것도….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아니면 라이오스는 어떻습니까.

“라이오스….”

다시 한번 고개를 돌리자 정하얀, 한소라, 박덕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라이오스의 전경 역시 눈에 들어온다.

그때와 같다. 기도를 드리고 있는 사제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고 계속해서 피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중립국의 지도자인 프리스티나가 불안한 얼굴로 정하얀을 맞이하고 있는 중, 면목이 없다는 얼굴로 정하얀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이렇게… 이렇게 다시 한번 라이오스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하얀 님… 박덕구 님… 한소라 님.

-네. 오랜만입니다. 프리스티나 님.

-좋은 일로 다시 한번 여러분들을 만나고 싶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돼 제대로 환대해 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이렇게 다시 한번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어….

-거, 너무 마음 쓰지 마쇼. 저게 떨어지면 라이오스만 위험한 게 아니니까. 대륙 전체에 명운이 걸린 일이고… 형님의 발자취를 다시 한번 밟을 수 있다는 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거 아니요.

-하지만….

-거,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 없다니까! 사실 라이오스를 지킨다는 뜻보다는 던전의 열쇠를 찾았다는 게 더 의의가 크다는 거요. 조금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우리한테 이번 퀘스트는 중요하니… 오히려 프리스티나 님이 우리에게 협조해 주기를 부탁드리고 싶은 마음이라니까.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덕구 님. 정말로 감사하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라이오스의 영웅들께 제 이름을 걸고 다시 한번 약조하겠습니다. 저희 왕국에서는….

-그렇다면 저, 저… 부, 부탁….

-네, 정하얀 님! 어떤 것이든 편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마, 마법의 신의 신전….

-네?

-정하얀 님 제가 대신 말씀드려도 될까요?

-아… 응. 소라가 해.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프리스티나 님. 그러니까… 정하얀 님께서는 이곳에 마탑을 세우고 싶어 하십니다. 마치 신전과도 같은 거대한 크기의 마탑, 정하얀 님을 믿고 따르는 마법사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종류의 연구기관입니다. 린델에 이미 시험 모델을 만들어 성공적인 결과에 만족하시고 두 번째 탑을 라이오스에 세우고 싶어 하십니다.

-아….

-자금적인 지원은 필요하지 않으니 부디 부지를 마련해 주셨으면 하는 차원으로 말씀을….

-당연히. 당연히 해드리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정하얀 님.

-그, 그렇다면 그렇게 알고 있, 있겠….

-모든 비용의 지원 역시 아끼지 않을 것이라 약속드리겠습니다. 라이오스는 여러분들을 위한 그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인사는 이쯤 하고… 슬슬 나가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미소 짓고 있는 정하얀보다는 걱정하고 있는 박덕구의 얼굴이 도드라진다.

뭔가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도 녀석의 그런 표정은 변함이 없다.

오랜만에 보는 장난기가 빠진 얼굴, 이윽고 프리스티나가 시야에 보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거, 불안하기는 불안합니다.

-…….

-그때는 형님이 함께 있었으니까. 물론 누님이 그만큼 성장한 것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형님 없이 이곳에 와 있다고 하니… 저걸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찜찜해지고 불안하고… 막 그렇다는 거 아니요. 소라 후배도 그렇지 않나?

-네? 저… 저도 조금 그렇죠.

-교국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요. 우리가 예상했던 것처럼 이 던전은 형님의 발자취를 밟고 있는 거라니까. 옛날 제국의 망령들… 던전 공략 같은 데는 젬병이기는 하지만 이 장소도 뭔가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니까. 아마 내 예상이 맞다면 여기에 있을 거요.

-뭐, 뭐가요?

-지금 이 위에 있는 마력을 움직이고 있는 장본인.

-아… 네….

-대악마를 소환한 악당 말이요. 공화국의… 악마 소환사. 어쩌면 라이오스의 공략은 그자가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클 거요. 아마… 아마 확실하다니까.

‘그럴듯하네.’

평소라면 무시하고 넘길 추론이었지만….

나 역시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나름 들어맞는 면이 있기는 했으니까.

당시 라이오스와 교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희대의 인간쓰레기.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윤리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악마.

오직 자신의 목적을 위해 라이오스를 송두리째 불태우려고 한 그 녀석.

“악마 소환사. 진청.”

이미 대륙에서는 금기시되는 그 이름을 다시 한번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