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1화 마지막 (54) >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라이오스 사태, 그리고 이후에 이어질 연계 이벤트인 공화국 전쟁은 녀석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으니까.
이를테면 핵심 네임드 보스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혹은….
‘NPC 같은 느낌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있고….’
지혜 누나가 기획한 이 이벤트들이 단순히 나를 뒤따라 가라고 제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기영이 대륙을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이번 라이오스의 네임드 몬스터로 등장할 인물은 녀석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여기에 빛의 아들의 환영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메인 이벤트 교국 혁명의 네임드 몬스터는 혁명 버전 이기영, 희라 누나가 있는 연방에 등장할 네임드 몬스터는 둠기영과 짭리알, 북부에 등장할 네임드 몬스터는 그 누더기.
‘여기에만 없는 것도 이상하지.’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고, 다른 조건이 해금돼야 열리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 라이오스 위에 마력이 계속해서 떠 있다는 건 녀석의 존재가 어딘가에 자리해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지혜 누나 역시 녀석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의문점은 그 악마 소환사가 어떤 방식으로 이곳에 자리 잡았냐는 것.
아무리 누나가 시스템의 허락을 받고 루시퍼의 지원 아래에서 활동한다고 한들….
‘불가능할 텐데.’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지에 따라 조금 달라지기야 하겠지만… 완전한 모습으로 부활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다면 네임드 몬스터화시켜 인격을 부여할 수 있겠지만 그게 진짜 악마 소환사인지, 아니면 꼭두각시인지도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건 나중에 보이면 생각하지, 뭐.’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악마 소환사… 진청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니까. 거, 내 입으로 차마 담기에도 무섭다는 거 아니요. 물론 여러 가지 전투를 치르며 경험도 쌓고, 여러 악당을 만나면서 성장하기는 했지만… 그자만큼 무서웠던 악당은 없었다니까…. 모든 게 끝난 이후에도 악에 받친 목소리로 나는 악마 소환사가 아니라고 소리치는데… 눈에서 막 피눈물까지 흘려가면서… 내가 그 눈빛에서 광기를 읽었다는 거 아니요.
-아… 네.
-인간이 정말로 악마로 화하면 이런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으니 뭐 말 다했지. 거, 소라 후배도 기억하지 않나. 형님도 누님도… 위험할 뻔했으니까. 그때 당시에 내가 부족했던 것도 맞지만…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라니까. 공화국과의 자신을 믿고 따르는 병력을 언데드로 만들어버리는 무자비함이라든지. 그자는 형님과 대척점에 있던 인물이었지.
-그, 그렇죠….
-뭐,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제는 그자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더 잘 알 것 같소. 한때는 악마에게 조종당해 일을 저질렀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결사단이라든지, 의문의 흑마법 집단이라든지… 평화로운 지금에도 그자의 영향력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 그래도… 이번에는 정하얀 님이 계시니까요.
-암. 누님이라면 믿을 만하지. 누님뿐만이 아니요. 나도, 그리고 소라 후배도 성장했으니까. 틀림없이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거요.
아무래도 박덕구의 기억 속에서는 녀석이 더 확실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대륙의 대부분의 인간들이 박덕구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다.
녀석은 대륙 위험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었으니까.
평소보다 더 진지한 얼굴은 아마 그래서였던 것 같았다.
-근데… 누님.
-…….
-저건 왜 안 떨어지는 거요?
-잘, 잘 모르겠는데… 사실 떨어지든 안, 안 떨어지든 상, 상관없어요. 어차피 분해할 거니까.
-…….
-떨, 떨어지기 전에 분해하니까. 지금… 분, 분해할 거니까.
-그게… 가능한 거요?
‘진짜 대단하기는 대단해.’
박덕구 역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정하얀을 바라보는 중, 나 역시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기 전에 분해해?’
-어, 어, 어차피 마력 덩어리구….
지혜 누나가 이걸 예상했을까. 가능한 게 무엇인지보다 불가능한 게 무엇인지 묻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정하얀의 마법에는 한계가 없어 보인다.
‘이러니까 마법의 신이 먹히는 거자너.’
내가 마법사였어도 정하얀을 신앙의 대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한소라는 이미 이야기를 들었는지 커다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 혹시나 라이오스가 분해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지 않도록 여러 가지 마법을 중첩하기 위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지금 이게 위기 상황이 맞는 건지 싶을 정도로 여유로워 보이는 정하얀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심지어 한소라는 마법진을 그리는 와중에 잠깐 바깥으로 나와 돗자리를 펴주고 있는 모습까지 보인다.
피크닉 박스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기까지 하는 걸 보니 여기서 정하얀의 식사라도 챙겨줄 모양.
예전이었다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정하얀도 이제는 조금 눈치가 보이는 모양인지 은근슬쩍 그녀를 도와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계셔도 돼요. 정하얀 님 지금….
-괜, 괜찮아. 나도 도와줄게.
사실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잘 펴지지 않은 돗자리의 끝자락을 피거나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것뿐이었지만 은근슬쩍 감동한 한소라의 얼굴을 보니 효과가 있기는 있는 것 같았다.
분위기에 잘 동화되는 박덕구 역시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에 당황하지 않고 잘 적응하는 중.
정하얀이 식사를 마치고 차까지 마신 이후에야 한소라의 마법진 그리기가 마무리된다.
마력을 집어넣고 시험 가동을 마친 정하얀이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곧바로 시야에 비쳤다. 그 와중에….
‘얘 주문 외우는 중이었자너.’
언제부터 주문을 외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이곳에 온 직후이지 않을까.
예상했던 대로 정하얀을 중심으로 거대한 바람이 몰아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박덕구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방패를 들고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아마 예전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정하얀과 내가 위에서 떨어지는 마력을 막고 있는 사이에 녀석과 한소라는 덮쳐오는 진청의 악마들을 막아내야 했으니까.
물론 이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정하얀과 한소라, 그리고 박덕구를 중심으로 호위를 서고 있는 라이오스의 병사들도 병사들이거니와 지원팀들의 모습도 눈에 보였으니까.
마탑에서 온 마법사들과 이쪽으로 착출된 길드와 클랜들이 모두 의외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자리한 것이다.
편안한 표정의 정하얀과 한소라 와는 다르게 딸려온 이들의 표정에는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물론 마법 할아버지들은 우리 손녀를 믿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정하얀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의 얼굴에는 언뜻언뜻 공포가 보인다.
하늘 위에 떠 있는 저게 터진다면 자신들의 몸이 형체도 없이 날아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핵탄두가 머리 위에 떠 있다고 상상해 보면 저들이 느낄 공포도 이해가 간다.
조용히 눈을 감고 제발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병사들이 보였고 정하얀 님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중얼거리는 놈들도 있다.
정하얀의 주문이 터져 나온 것은 녀석들의 불안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여러 갈래의 빛줄기가 정하얀의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는지 휘황찬란한 모습이다. 한소라도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야아아압!
작위적인 기합 소리는 다분히 대중들에게 들려주기 위함. 한소라는 그 모습을 보고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다.
며칠 전에 만들어 놓은 마법의 신 홍보 팸플릿이라도 준비하는 것 같아 더욱더 긴장감이 옅어졌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표정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
하는 소리와 함께 자기 자신에게 의문을 표시하는 정하얀의 얼굴, 한소라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챘는지 그녀를 향해 입을 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하얀 님?
-마, 마법이 안 통하는 것 같은데.
-네?
-마법이 안 통하는 것 같아….
-그건….
-이, 이거 마법이 아닌가 봐.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봐.
-…….
-어….
-잠시만요. 정하얀 님. 제가 조금 알아볼게요. 네. 아, 리안… 아니, 박리안 씨. 지금 그쪽에… 네, 아… 네. 알겠습니다. 네, 네. 아… 네. 확인했습니다.
‘이거 그거네.’
한소라도 얘도 눈치챘자너.
저게 평범한 마력이나 마법의 잔재가 맞다면 정하얀이 분해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여러 군데 연락을 주고받는 것을 보니 그녀 역시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예상하는 것 같았다. 금방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 아마도….
-시스템인 것 같아요. 정하얀 님. 던전의 강제 이벤트나 강제 퀘스트 같은 종류라 일단은 절차가 있나 봐요. 아직까지는 보호받고 있는 것 같은데… 일단 마탑 분들이 이곳을 수습해 주실 테니 다른 방법을….
-아….
-실망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하얀 님. 기회는 또 있을 테니까요. 교국에는 이벤트 퀘스트가 떴는데 라이오스는 아직 안 뜬 걸 보니까 뭔가 트리거가 있는 게 확실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자식이 틀림없다니까! 분명히 악마 소환사 그놈이 이곳에 있는 거요! 그놈을 찾는 게 먼저인 게 확실할 거요. 누님.
-그, 그, 그렇지.
정하얀의 주위로 빽빽한 눈들이 들어서고, 순식간에 흩어진 눈들은 라이오스를 완전히 덮기 시작했다.
악마 소환사를 찾는다는 목적보다는 다른 힌트를 찾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아네모네의 눈이 스멀스멀 날아다니며 목표를 찾아 헤매는 게 조금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효과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거기 찾아보쇼. 동굴 말이요! 그 악마의 굴에 있을지도 모른다니까!
-악마 소환사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정하얀 님. 프리스티나 님과 다시 한번 대화를 하는 게 좋을까요?
-분명히 동굴이요. 그 동굴에 가야 하는 거요. 녀석이 악마를 불러낸 그 동굴 말이요. 처음에 만났던 그….
-아, 아, 아니에요. 처, 처음 만났을 때는… 분명….
정하얀이 곧바로 한소라와 박덕구의 손을 이끌고 주문을 외우자 세 명의 몸이 이동되기 시작했다.
박덕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한소라의 얼굴에도 궁금증이 들어선다.
-여, 여기예요.
-그랬지… 나도 기억이 난다니까. 여기서부터였다는 게….
-여, 여기는 안 보여. 소라야.
-네? 그럼 정말로….
-응. 여기는 눈으로도 안 보여. 들, 들어가야 하는 게 맞나 봐.
-그냥 아무런 준비 없이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죽, 죽이면 되니까. 머리통을 터뜨리면 돼.
거침없이 문을 들고 들어가는 박덕구, 주문을 외우며 그 뒤를 따르는 정하얀의 뒷모습이 보였지만….
‘불안한데… 이거 뭔가 불안하자너….’
아니나 다를까.
[신화 등급의 던전 빛의 아들이 희생된 대륙의 메인 이벤트, 악마 소환사가 시작됩니다.]
---…….
‘최악인데… 이거….’
---…….
‘진짜… 최악인데….’
떠올리고 있었던 가설 중에서도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
---잠깐… 간단한 게임이라도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테이블에 앉은 채로 전방을 바라보는 악마 소환사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