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3화 마지막 (56) >
-후우….
“너무 걱정하지 마. 혜진아.”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 단순한 게임이 아닙니다. 이건….
“뭐… 어차피 전쟁도 마찬가지잖아요. 병력 한 번도 안 돌려본 사람처럼 왜 이래요? 책임은 항상 뒤따라오는 거고… 이번에도 다를 게 없다니까요.”
-그것과 이건 다릅니다.
“나 참….”
-애초에 전쟁에서도 현장 지휘하는 걸 선호하지는 않지만 이번 경우에는 특히나 더 위화감이 없단 말입니다. 말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생명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니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짓이 아닙니다. 기왕 이야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생깁니다. 인간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을….
‘얘 또 명대사 장전하는 거 봐.’
“그런데 어쩌겠어요?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혜진 씨밖에 없는데.”
‘뭐… 나름 이해가 되기는 해.’
-후우….
여전히 탐탁지 않아 하는 얼굴이 눈에 보인다.
그녀의 말처럼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듯한 모습.
사실 부담감보다는 사람의 목숨을 배팅해 게임을 한다는 행위 자체를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실제로 전쟁이 일어난 상황이었다면 이 정도까지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얘도 참….’
진청이나 지혜 누나 같이 전형적인 사이코패스 지휘관들은 아마 평생이 가도 조혜진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나 정도는 되니까 이해하자너. 솔직히 그래. 어떻게 사람을 장기 말로 쓰면서 게임을 할 수 있겠어? 어떤 미친놈들이 이런 발상을 해?’
저쪽보다는 이쪽에 가까운 인간이라는 사실이 괜스레 뿌듯함이 느껴진 것은 당연했다.
괜히 조혜진과 내가 잘 맞는 게 아니지.
기왕이면 이 고통스러운 현장에 조혜진을 투입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정말로 적당한 사람이 그녀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송수경을 보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놈은 정하얀이 여기 묶여 있는 사이에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아웃, 김현성도 북부의 누더기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야 하니 아웃. 무엇보다….
‘조혜진이 성향에 맞아.’
수틀리면 패배를 염두에 두고 싸워야 하는 싸움이다.
처음부터 지자고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는 싸움으로 들어서는 것이 맞다.
물론 그녀가 가지고 있는 능력 자체를 높이 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마 조혜진이라면 그 누구보다 이번 게임에 신중히 임할 수 있지 않을까.
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그녀가 문을 열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박덕구와 한소라의 얼굴이 활짝 펴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거… 드디어 도착했구만!
---…….
“당연하지만 저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건 숨기셔야 합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었지만 아마 듣고 있을 것이다.
---준비되시면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여유로운 척하는 거 극혐이자너.’
-거, 누님 하얀이 누님한테 대충 설명 들은 거 맞는 거요?
-조혜진 님.
-네. 네.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소라 씨가 정리해 주신 자료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잠깐 동안 조혜진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이 눈에 보인다.
---당신이로군요.
-최종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다수가 함께해도 상관없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몇 가지 요구 사항이 있습니다.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벤트를 시작하기에 앞서 병력이나 룰에 대해 파악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어진 정보가 부족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병력들이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 능력치나 보급 상태, 사기나 다른 부분의 영향을 받는지 상세하게 알아야 합니다. 모든 걸 알고 있는 당신과 이 퀘스트를 진행하기에는….
---허가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라이오스 위에서 팽창하고 있는 마력을 멈춰달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
-…….
---네.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또한 당신이 운용할 병력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 역시 요구하도록 하겠습니다.
합당하지. 최소한의 정보라면 전해줄 여지가 있다. 녀석이 이쪽 병력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만큼의 정보는 알아둬야 한다.
물론 놈이 이쪽 병력의 구성에 대해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녀석의 입으로 모르고 있다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놈이 공화국의 군사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놈의 말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최소한 당신이 우리 측 병력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만큼은 요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저의 병력들과 함께 싸워야 할 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실제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양측의 레인저들이 정보를 물어왔다고 가정하는 게 좋겠군요.
[플레이어에게 검은백조 길드 정보부서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악마 소환사의 자세한 군사력을 비롯한 전반적인 주요 정보가 표시됩니다.]
-당신이 전해준 편지에 잘못된 정보가 적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녀석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보내오기 시작한 것은 딱 이때 즈음이었을 것이다.
---잘못된 정보는 없습니다. 그저 여흥을 돋우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하기면 편하실 겁니다. 그보다… 차라도 한잔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은근슬쩍 호의를 보내는 모습은 가관, 단순한 프로그램 덩어리일지도 모르는 녀석이 저런 행동을 하는 게 우습기는 했지만 잘 만들어졌다면 저런 행동을 할 만하기야 하다.
기본적으로 놈은 유능한 사람에게 호의를 보내는 것을 즐겼으니까. 특히나 머리 좀 돌아간다는 놈들을 유난히 좋아하지 않았을까.
내가 천재라는 소문을 듣고 곧바로 이쪽을 시험해 보려고 한 행동을 보면 엘리트라고 생각한 이들에게 동질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모양.
물론 동질감이라는 단어로 놈의 심리를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놈이 생각하는 동질감에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니까.
‘그냥 단순한 흥미라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네,’
그래. 흥미. 그냥 딱 그 정도다.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는 얼굴이었고 나쁘지 않은 시간이 될 것 같다는 즐거움이다.
-거절하겠습니다.
---아쉽군요.
천천히 레인저가 전해준 정보들을 읽고 있는 조혜진의 모습이 보인다.
물론 그녀가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전부 머릿속에 처박는 것으로 모자라 상황실에도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파란 길드가 갖추고 있는 지휘 인프라가 결코 부족하지 않다.
초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황정연도 그렇고 전투 외의 부분에서 도움을 주는 김미영 팀장도 그렇다.
실제로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지휘부 직원들의 몇몇은 파란 길드로 이적을 하기도 했으니까.
녀석이 단신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가능성이 그리 낮지는 않다는 판단이 선다는 거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악마 소환사는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좋아 보인다.
-네. 팀장님. 전력분석팀은 양측의 전력을 비교해 주셨으면 합니다.
---의심이 많으시군요.
-마땅히 해야 할 절차일 뿐입니다.
---네. 그 말씀이 맞습니다. 필요한 절차이지요.
게임은 공평하게 시작해야 했으니까. 녀석이 갖추고 있는 병력의 질이 높을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절차에 불과하다.
진청도 굳이 다른 말을 해오지는 않았지만 한마디 거들고 싶은 모양인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전력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말들이 더 우세할 겁니다. 특수병과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이 다르기야 하겠지만 서로가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 충분히 카운터 치거나 상쇄시킬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가지고 있는 언데드 병사들 같은 경우는 교국의 사제단이나 성기사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겁니다. 언데드는 보급이 필요하지 않지만 장비가 열악합니다.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효율이 줄어들고, 흑마법사에 대한 의존도가 높습니다.
-…….
---흑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높은 화력을 지니고 있지만 암살자들에게 쉽게 노출되며 기본적인 공략 방법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병력의 숫자는 제가 더 많지만 병력의 질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말들이 미세하게 높을 겁니다.
[플레이어에게 공화국 전력분석팀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악마 소환사의 군대와 플레이어의 군대의 전력을 분석해 표시합니다.]
-오차가 있는지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연 씨. 네. 네. 확인했습니다.
당연하지만 오차는 없다.
애초 진청이 이런 것 가지고 장난칠 인물은 아니거니와 오히려 스스로에게 핸디캡을 부과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으니까.
-시민의 존재 여부는 어떻습니까? 저와 제 병력들이 지켜야 할 시민들이 있는 반면….
---흑마법사나 악마들에게 마력을 공급하는 마력공급원들이 있습니다. 물론 제 말들은 이들을 우선적으로 지키지 않겠지만 큰 관점에서 본다면 당신의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네임드 말 같은 경우에는….
-잠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요. 혜진 씨.”
-이들을 말이라고 표현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이걸 게임이라거나 이들을 말이라고 표현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왜 그걸 또 딴지를 걸고 그래요? 왜 그래. 진짜?”
---하하하….
슬그머니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은 가관. 조혜진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대충 파악했다는 느낌의 웃음이다.
“왜 시작부터 지고 들어가고 그래? 그런 거 흘려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그렇군요.
-사람의 목숨은 장기 말이 아닙니다. 제가 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에 응한 이유는 당신과 어울려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당신의 쓰레기 같은 가치관에 대해서는 알 바 아니지만 그 더러운 생각을 제게 내뱉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악마 소환사.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탁. 드리고. 있는 겁니다.
---중요한 팁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이 퀘스트를 원활히 진행하는 것을 방해할 겁니다. 당신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버려야 할 병력과 살려야 할 병력을 구분해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덕목이며 희생을 요구하는 것 또한 지휘관으로서 필요한 일입니다. 이 게임의 경우에는 오히려 더 쉽지 않겠습니까.
-…….
---당신이 승리한다면 실제로 목숨을 잃는 이들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게임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명예도 모르는 놈이라고 한마디 박아줘요.”
-닥쳐라. 명예도 모르는 자식.
---…….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목숨을 걸고 있는 자들이다. 네게 아주 조금이나마 명예가 남아 있다면, 네가 한때 공화국의 군사였다면, 말이라고 한들 존중하는 것이 옳다.
---…….
우리 청이 형아 뼈 맞았자너.
---이거… 네. 제가 한 방 먹었군요.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
---어떻습니까. 슬슬 지루해질 참인데… 이벤트 퀘스트를 진행해 보는 것이.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드린 것 같습니다만….
-…….
---아! 그리고 아까 미처 못 전해 드린 것입니다만… 네임드 인물에 대한 정보입니다.
명예도 모르는 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조혜진의 모습이 보인다.
---네. 설명보다는… 직접 보시는 편이 더 빠르겠군요.
녀석의 진영에 천천히 자리 잡고 있는 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
어처구니없게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인물들.
미하일을 비롯한 악마 결사단의 단원.
악마의 끄나풀 이설호.
악마 숭배자 이토 소우타.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
“다 아는 얼굴들이구만.”
조혜진을 향해 입을 여는 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 전쟁을 시작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