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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26화 (817/1,590)

< 826화 마지막(59) >

간단한 속임수였다.

너무 간단해서 굳이 이것저것 설명해도 되지 않을 정도로 쉬운 속임수다.

생각해 보면 중간에 플레이어가 바뀌는 것뿐이다. 묘수도 아니었고 내가 독특한 아이디어를 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저 악마 소환사의 입장에서도 간단하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멀쩡히 게임을 치르던 플레이어가 순식간에 성향을 바꾼다는 걸, 아니 아예 사람이 뒤바뀐다는 걸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을까.

특히나 이런 경우에는 더욱더. 이런 식으로 빌드업을 쌓는다면 아무리 녀석이라고 한들 먹음직스러운 후두부를 내보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녀석이 멍청했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발버둥 쳐볼 여지는 없었겠지만 놈은 이미 조혜진에 대한 해석을 끝마쳤다.

물론 확인하는 과정은 있었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 블러핑을 일삼는 쓰레기에게 걸려 인생이 망가진 전적이 있다고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

그 소중한 교훈을 되새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혜진에 대해 조심스레 알아가는 과정을 계속해서 거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르지 않다. 녀석은 조혜진이 어떤 사람인지, 그녀가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그녀의 신념, 그녀가 병력을 운용하는 방식, 조혜진에 대한 해석의 확인 과정을 계속해서 끊임없이 되새김질하고 있다.

이제는 자신의 판단을 완전히 믿을 때도 됐건만 시도 때도 없이 정보를 쌓는 모습은 대견해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모든 판단이 한 가지 결론으로 도달하게 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왜냐.

‘얘는 그냥 눈에 보이거든.’

혜지니처럼 올곧으며 깨끗하고 앞만 보고 나아가는 멍청이가 세상 또 어디에 있을까.

거짓 없으며 진실 되고 명예와 신념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이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녀는 곧게 뻗은 대나무와 같고 흔들림이 없는 창과도 같다.

자기 자신을 절대로 숨기는 법이 없으며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불의와 거짓과 권력에 굴하지 않으며 가치로 하는 것에 있어서는 물러섬이 없다.

그녀의 전투 스타일과 병력을 운용하는 스타일에서도 이 성향은 그대로 우러나온다.

잘못되거나, 의심스러운 점을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가 없다. 애초에 그녀는 숨기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녀 본인이 했던 말처럼 그녀는 온갖 음모와 구역질 나는 짓거리가 행해지는 이런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진청 본인이 그걸 가장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인류 진영의 지휘관들이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때로는 병력을 버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지원부대를 보낸다고 한들,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버리지 않습니다.

[인류 진영의 지휘관들이 당신의 용기와 정의로움을 칭송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피해가 누적된다면 이 전쟁은 결국에 패배할 거라고 말합니다. 캐슬락을 버리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 모두가 입을 모아 외칩니다. 캐슬락으로 향하는 것을 지원할 병사도 없을 거라고 설득합니다.]

-지원할 이들을 보내겠습니다.

[플레이어가 네임드 개체 신창 조혜진에게 퀘스트를 내립니다. 신창 조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을 잡습니다. 함께할 이들을 모아 별동대를 조직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임무 후에 목숨을 잃을 거라는 걸 이해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창 조혜진은 가끔은 어리석은 선택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 좀 보세요. 얘가 이러는데 안 믿고 배기겠어?’

[대륙인들이 입을 모아 신창의 용기를 칭송합니다. 네임드 개체 조혜진은 고개를 젓습니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라고 외칩니다. 누구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개뿔, 절대로 안 하지.’

더미혜진도 조혜진과 성향이 비슷하다는 건 우리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다.

그 와중에 고개를 끄덕이는 조혜진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누구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는 더미 혜진의 말에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알고 계시는 겁니까? 당신도 목숨을….

-인간은 자신이 가치로 하는 것을 위해 응당 목숨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죽는다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목숨을 잃은 이후에는 그 가치는 종이쪼가리가 될 것이고, 결국에는 아무도 당신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를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당신은 진짜 악의를 만나보지 못해 그런 말을 지껄일 수 있는 겁니다. 진짜로 구역질 나고 비열한 악의가 무엇인지 느껴보지 못해 아직도 가치를 지킨다느니 희생할 수 있다느니 하는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거라 이 말입니다.

-당신이 그런 이유로 무너졌다고 해서 나 또한 그리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후회할 수도 있고, 내가 가치로 여기는 것들이 무가치하게 변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습니까.

---…….

-가치를 버리고 명예를 버린 지금의 당신은… 만족하고 계십니까? 당신이 저지른 모든 행동에 따른 결과와는 별개로 지금의 당신 모습에 만족하고 계시는 겁니까.

---…….

206개의 뼈 중에서도 가장 아픈 뼈를 제대로 맞은 진청의 표정이 와락 구겨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이 설전을 계속해서 이어 나가고 싶은지 입술을 조금씩 움직이기는 했지만 결국 할 말이 없는지 묵묵히 명령을 이어 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진청이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누구보다도 명예를 소중히 하던 녀석이 스스로 명예를 땅바닥에 밟아 발로 짓이겨 버렸다.

그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녀석이 지금의 조혜진에게 무슨 말을 지껄일 수 있을까.

오히려 분노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조혜진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진짜 악의에도 네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느냐고 그 어떤 비열하고 더러운 수에도 네가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말하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명예를 버린 악마 소환사의 군대가 인간을 향해 간악한 술수를 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우리 혜지니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다.

-우리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힘을 하나로 모은다면 가능합니다.

[인류 진영의 병사들이 플레이어의 말에 미약한 희망을 얻습니다. 네임드 개체 오스칼이 공감합니다. 특수스킬 연설을 발동합니다. 네임드 개체 박덕구가 특수스킬 선동을 발동합니다. 파란 길드의 안기모와 김예리가 함께 합니다. 합체 스킬 대륙 선동이 발동됩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인류 진영이 용기를 얻습니다. 승리와 희망의 노래가 끊임없이 울려 퍼집니다. 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쓸데없는 짓을….

“쓸데없는 짓을… 이라네. 삼류 악역 같은 대사 치는 게 꼭 자기 같자너. 용기와 희망의 힘을 보여주자! 혜지나!”

넌 좀 닥치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이기는 했지만 일단 계속 중얼거려 보자.

“조금 이따 바꿔야 돼. 준비해.”

[악마 진영의 네임드 개체 마검사 정진호가 인류 진영의 네임드 개체 신창 조혜진과 조우합니다.]

[전투가 시작됩니다.]

[마검사 정진호가 신창 조혜진을 비웃습니다. 시시한 상대가 나타났다며 무시합니다.]

전선이 맞물려 병력과 네임드 개체들을 뺄 수 없는 상태에서 시작된 전투, 내가 보기에도 지켜내는 것이 불가능한 전투처럼 보이기는 한다.

[인류 진영의 네임드 개체 조혜진이 캐슬락의 시민들을 대피시키려고 합니다. 마검사 정진호가 조혜진을 비웃습니다.]

사실 이 전투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캐슬락은 넘어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캐슬락에 고립된 시민과 전투에 지쳐 쓰러져가는 병사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작전.

전력 보존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희생자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작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아래쪽에서는 꽤나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중, 더미 혜진과 별동대가 목숨을 걸고 다른 이들을 탈출시키고 있는 장면은 내가 보기에도 조금 숭고해 보이는 장면이기는 했다.

[신창 조혜진이 병력들을 다독입니다. 자신이 길을 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신창이 유니콘에 탑승합니다. 시민과 병력들을 이끌고 적 병력을 뚫기 시작합니다. 캐슬락의 시민들이 두려움에 빠집니다. 네임드 개체 조혜진이 시민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병력들이 이동합니다.]

‘멋있기는 해.’

[조혜진이 길을 엽니다. 악마 진영의 군대가 캐슬락에서 탈출하려는 시민들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인류 진영의 네임드 개체 조혜진과 별동대들이 남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조혜진이 정진호와 부딪칩니다. 캐슬락의 시민들은 탈출합니다. 조혜진과 별동대들은 끝까지 남아 적들과 싸웁니다.]

‘진짜 멋있기는 하다구.’

[캐슬락은 그녀를 기억할 것입니다.]

[악마 진영의 네임드 개체 정진호의 손에 인류 진영의 네임드 개체 신창 조혜진이 숨을 거둡니다. 정진호 역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상처가 회복되려면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정진호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 분개합니다. 무시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고 중얼거립니다.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다고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깁니다.]

[대륙은 영웅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손해가 생기기는 했지만…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캐슬락의 시민과 지친 병사들이 탈출에 실패합니다. 악마 진영의 매복한 병사들이 시민들을 붙잡습니다. 인류 진영의 시민들은 악마 진영의 마력 공급원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결과가 그리 좋지 않군요.

[악마 진영의 병사들이 캐슬락의 병사들과 시민들을 이끌고 돌아갑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듣기 좋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신념, 정의, 용기. 자기 자신이 가치로 하는 것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느니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라보십시오. 이게 결과입니다.

-…….

---방금의 전투에서 당신은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신 겁니다. 자기만족 외에는 말입니다.

‘얘가 뼈를 너무 맞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혓바닥이 많이 길어졌네.’

내게는 녀석이 자기 자신을 변호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조혜진은 분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

진청의 말에 딱히 맞받아칠 말이 없는지 한참이나 뚫어지게 상황판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행동에 아무런 가치가 없을 리 없지 않은가.

[인류 진영이 네임드 개체 신창 조혜진과 캐슬락의 희생을 기억합니다.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녀의 희생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인류 진영의 네임드 개체가 우리는 이길 수 있다고 플레이어에게 전합니다.]

---재미없군요.

[온 대륙이 그녀의 희생에 대해 노래합니다. 시민들은 검을 들고 싸워 무서워 도망쳤던 이들도 방패를 들어 올립니다.]

---정말로 재미없습니다.

[인류 진영의 사기가 상승합니다. 인류 진영의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일부 네임드 개체가 특수 스킬을 개화합니다. 커다란 슬픔에 잠긴 파란 길드가 일어나 검을 들어 올립니다.]

‘조금 소년만화 틱 하기는 한데 나쁘지는 않자너.’

조혜진이 이걸 의도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뜻밖의 결과에 밝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니 내심 기쁜 모양. 자신의 믿음이 배신당하지 않았다는 얼굴이었다.

작은 게임판이었지만 그녀에게 이보다 기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게다가 그녀의 무모한 행동이 얻은 이점은 겨우 이것뿐만이 아니다.

[캐슬락 시민들에게 걸린 정체불명의 마법이 발동합니다.]

---어….

[악마 진영에게 붙잡힌 캐슬락 시민들이 폭발합니다.]

---뭐… 뭐?

[악마 진영의 마력 공급원들이 사망합니다.]

---뭐?

[악마 진영의 마력 공급원들이 사망합니다.]

[악마 진영의 마력 공급원들이 사망합니다.]

[악마 진영의 마력 공급원들이 사망합니다.]

[악마 진영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습니다. 다수의 마력 공급원들이 사망합니다. 병력들을 유지시킬 마력이 부족합니다. 악마 진영이 당황합니다. 몇몇 흑마법사들이 절규합니다. 악마 진영의 이설호 자신의 실수라 중얼거립니다. 예상하지 못했다고 비명을 내지릅니다.]

그들의 희생이 만든 숭고한 결과물.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파란색 머리끈을 풀었다. 딱히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쇼맨십이었으니까.

자연스럽게 머리를 넘기고 의자를 뒤로 젖힌 이후에는 다리를 꼬아보자. 그리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에게 입을 열었다.

“하얀아 잘 지냈지?”

---너… 너… 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던 정하얀은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

내 몸은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품에 돌진하듯 나를, 정확히는 조혜진을 꽉 껴안은 그녀가 느껴졌다.

한소라는 크게 당황한 얼굴로 나를 살피는 중.

정하얀 님? 정하얀 님? 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정확히 어떤 상황이 펼쳐진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덕구한테도 한마디 해줘야지.

“덕구야. 커피 한 잔 타와.”

“형님… 형님인 거요?”

“성스러운 창의 부름에 답해 빛의 아들이 그녀의 몸에 직접 강림하셨도다.”

“진짜로… 끄윽… 형님인 거요?”

---너어어어!!!!!

마지막으로 이 악마 소환사한테도.

한마디 해줘야겠지.

조혜진의 얼굴을 이렇게 쓰기는 미안했지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턱 끝을 치켜들었다.

최대한 비열하고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재미있어서 참을 수 없다는 듯 녀석에게 입을 열어야지.

기분 끝내주자너.

“아이고… 또 속으셨습니다. 군사님.”

---이기여어어어어엉!!!!

“푸히헤허하헤헤헤하하핫! 진청아! 시바, 또 속냐!”

이거 중독될 것 같자너.

내려온 보람이 있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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