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7화 마지막 (60) >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혼란스러워진 장내가 눈에 들어온다.
나도 조금 당황스럽고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일단….
‘공기가 다르자너.’
윗공기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신성으로 꽉 차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면을 취할 필요도 없는 육체도 편리했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이곳이 행복하다는 느낌이 든다.
“흐어어어어엉… 끄으윽… 끄어어어엉… 히끅… 히끄윽….”
하얀이는 자기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할 정도로 이쪽에 안긴 채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어차피 올라갈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지내기는 했지만 매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막상 얼굴을 보니 떨어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흐어엉… 흐어어어엉….”
이쪽의 몸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계속해서 엉엉 소리를 내고 있으니 뭔가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민망해진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등을 쓰다듬어 주는 것이 전부.
“끄윽… 흐어으으어엉… 오빠아… 끄으윽… 끄으윽….”
목 놓아 울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에 한소라는 당황한 듯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게 제대로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정하얀 님? 정하얀… 님? 정하얀… 니임?”
“괜찮습니다. 소라 씨.”
“아… 부길드마스터? 정말로 부길드마스터가 맞으신가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얼굴을 보여주는 중.
계속해서 혼자 중얼거리며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말을 이어나가는 정하얀을 보고서 크게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모르긴 몰라도 정하얀이 돌발 행동을 하는 줄 알고 있었겠지. 한참 게임하는 중이었으니까.
‘하얀이 쉽게 진정할 것 같지 않자너.’
“그러니까… 흐어어엉… 끄으억… 끄윽… 히끄억….”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을 정도로 감정이 격해져 있는 상태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어?”
최대한 다정하게 말을 잇자 다시 한번 얼굴을 옆구리 쪽으로 파묻으며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해서 등을 쓰다듬어 주자 그제야 조금 진정된 듯 최대한 몸을 붙여 의자에 비집고 들어온다.
퍼뜩 정신을 차렸는지 몸을 다시 일으켜 내 얼굴을 살펴보는 모습은 가관.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지 조혜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아까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무슨 행동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혜진의 몸속으로 들어온 이기영을 자신의 이기영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한 것 같은 느낌.
약간의 아쉬움이 보이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 뭔가 합의가 있었고 이건 이기영이 맞다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계속해서 우는 와중에도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띈다. 확실히 나도 기분이 덩달아 좋아진다.
한소라와 내 모습을 확인한 이후에는 세상 행복한 표정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조금은 다른 형태였지만 정하얀이 머릿속으로 그리던 그림이 일시적으로 완성이 됐으니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을 받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박덕구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당장에라도 몸을 꽉 껴안아 주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정말로 형님이냐 이 말이요… 끄윽….”
“…….”
“정말로 형님이 맞는 거요? 정말로….”
덩치 큰 돼지가 커다란 팔로 자신의 얼굴을 쓱쓱 문지르며 오열하는 모습이 보기 편하지가 않다.
“커피나 타와.”
그 와중에도 부탁한 건 충실히 이행하는 중,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커다란 손으로 커피를 붙들고 자리에 오고 있다.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지 손에 들린 커피의 반이 쟁반에 엎질러진 것 같았지만 맛은 나쁘지 않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듯 커다란 몸으로 기웃거리고 있어 손을 뻗자 냉큼 허리를 굽히는 모습.
머리를 격하게 한 번 헝클어 주자 몸 전체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바닥에는 녀석의 커다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끄으윽….”
조혜진 때와 마찬가지인 것만 같다. 비록 모습은 다르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선을 긋는 것처럼 행동했던 전과는 다르게 예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니 크게 안심하고 있는 것 같다.
이대로 계속해서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나, 우리가 아는 이기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서 해방된 만큼 기뻐 보인다.
달라지지 않았고 변하지 않았다는 감정이 바깥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다.
“거, 거… 잘 지내고 있다고 이야기라도 좀… 해주면….”
“지금 확인했으면 됐지, 뭐. 밀린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 덕구야 커피 한 잔만 더. 오랜만에 먹으니까 맛있네.”
“거! 연습했다는 거 아니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애써 큰소리를 치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온다. 그 와중에 이쪽이 정리할 시간을 준 진청을 바라보니 한 번 더 웃음이 나온다.
‘매너도 좋아.’
주인공 일행이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 시간을 기다려 주는 상냥한 빌런.
지금에 와서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본인의 턴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건지, 아니면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온갖 감정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진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으득으득 이가 갈리는지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보인다. 당장에라도 이쪽으로 달려와 내 목을 조르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방금까지 소리를 지르던 주제에 애써 침착하자고 마음을 다잡는 것 같았지만 다시 한번 띠꺼운 표정을 보내니 몸이 들썩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 개자식… 이 개자식!!! 이 개자시익!!!
‘얘 감정 조절 안 되자너. 원래는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았는데… 이건 진짜 분노 조절 장애 얻은 거 확실하자너.’
보통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택적 분노조절 장애가 아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까지 치달은 모습에는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상냥한 내 성격이 조금 꼬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저렇게 기본적으로 침착하고 항상 이성을 유지하던 놈들이 이쪽의 얼굴만 보면 흥분해서 미쳐 날뛰는 꼴을 보니 마음속 깊은 곳이 찌릿찌릿하고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저 표정은 확실하게 이쪽의 활력소가 되어주고 있는 것만 같다.
---비열한 개자식!! 이 쓰레기 같은 놈!!! 이 더럽고 추악한 사기꾼 자식!!
애초에 자신을 숨기려고 했던 녀석이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려고 했던 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만들어진 NPC 흉내를 냈던 녀석이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꼴이 우습다.
반신반의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정확히 놈이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진청은 이전의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다.
어쩌면 녀석 본인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러십니까. 군사님. 지성인답게 차분히 대화로 풀어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기영… 이기여어어엉!!
“우리 좋게 끝나지 않았습니까. 누가 보면 안 좋게 끝난 줄 알겠네. 푸, 푸흡….”
---뭐? 뭐라고? 네가 감히 그딴 개 같은 소리를 지껄여!! 네놈이 그딴 소리를 지껄일 수 있다고!! 어떻게 네놈이 감히!!! 감히이!!
“군사님 너무 지나치게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밀린 이야기도 나누고 못다 한 이야기도 차분히 나누고 싶은데. 아! 커피라도 한잔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덕구야. 군사님 것도 내어 드려라. 푸… 흐흡….”
---너… 너….
“아, 사과는 드려야겠네요. 솔직히 저도 실수한 게 있습니다. 근데 변명거리가 없는 게 아니라니까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그쪽에서 분탕질을 친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도 군사님의 뜻을 최대한 받들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푸… 흐핫… 여의치 않았다니까요? 그 악마 결사단 개자식들이 말입니다. 군사님의… 푸하헤헤헤헷!”
---이기여어어어어엉!!!!
“푸흐헤하헤헤헤헷하헤헤헷! 콜록! 푸흐하헤허핫! 콜록! 콜록! 푸하헤허헤헤헤헤핫!”
---이기영 이 개자시익!!!!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뻗어오지만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는다. 허공에 막힌 듯 씩씩거리고 있는 놈의 표정에 도드라진다.
장담하건대 녀석이 지금 온전한 육체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혈압이 터져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성을 잃은 것만 같다.
혜진이 얼굴로는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얼굴에 내 표정을 담을 수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이런 절경을 또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군사님. 아무리 만들어진 몸, 아니면 원혼입니까? 뭐가 됐든 간에 너무 흥분하시는 건 군사님 건강에 좋지 않으십니다. 처음에 봤던 그 악마 소환사의 모습은 어디에 있습니까. 언제나 이성을 유지하며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공화국을 이끌었던 모습을 보여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지금의 군사님은 너무 추하단 말입니다. 푸흐핫! 너무 추해요. 너무 추한 모습이라 웃음이 다 나옵니다. 한때의 숙적에게 보이는 모습치고는 너무 추하지 않습니까.”
---…….
‘아, 시바… 너무 갔나 본데.’
1절만 할 걸 그랬네.
기왕이면 조금 더 흥분해 줬으면 싶어서 비웃음을 담은 표정을 계속 보냈지만 1절을 넘어 3절 4절까지 해대니 오히려 이성을 되찾은 것 같았다.
놈이 미쳐 날뛰는 꼴을 보고 싶어 계속해서 도발했던 게 오히려 화근이 된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최대한 내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만 같다. 시선을 피하고 있는 게 보인다.
비웃음을 담은 표정을 다시 한번 직시한다면 아까와 같은 모습을 보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쓰레기 같은 자식.
‘본래대로 돌아왔자너.’
녀석도 다리를 꼬고 턱 끝을 치켜들고 있다.
가운뎃손가락으로 상황판을 만지작거리기도 했고 지나치게 과장된 손짓으로 놈에게 커피를 전하기도 했지만 놈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커피를 받아 들고 평소와 같이 품위 있는 모습으로 커피를 들이켰다.
방금 전의 흥분 한 모습을 없는 거로 하려는 것 같아 짜증 나기는 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네 싸구려 심리전에 걸려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더러운 사기꾼아.
“방금도 꽤나 휩쓸린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이성을 찾으셨나 봅니다.”
‘아, 시바 이거 내 얼굴이었으면 효과 더 좋았을 것 같기는 해.’
---그래. 오히려 잘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나와 줘야지.
“뭐 군사님 생각이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때의 빚을 갚을 수 있겠다거나 직접 뭉개주겠다거나. 쌍팔년도 악당들이 했던 생각이 뻔히 보인다는 것 아닙니까. 모두가 윈윈 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도모해야지요.”
---나야말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 것 같군. 너는 지금 불안해하고 있다.
“제가 불안해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야 네가 내게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쓸데없는 도발이나 과장된 몸짓 연극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이 우습더군.
“군사님은 어떻고요.”
---네 겉치장은 그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거다. 쥐새끼 같은 놈. 네가 무대 위에 올라간 배우마냥 연극을 하고 있는 모습은 겁먹은 동물이 덩치를 부풀리는 모습이나 다름이 없다. 가련하고 불쌍한 놈.
“누가 누구에게 불쌍하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짜로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 것 같아요? 명예를 잃은 당신입니까. 아니면 대륙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접니까.”
---누가 어디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지. 지금 네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우습구나. 네 말대로 네가 대륙의 신이 되어 있는 와중에도 내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선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네….
“정신 나간 악마 소환사 새끼.”
---이제야 볼 만한 얼굴이 되지 않았나.
“군사님이야말로 혓바닥이 많이 길어지셨습니다. 누가 불안해해?”
---잃을 게 많은 자는 작은 것에도 불안함을 느끼는 법이지.
“기억 안 나? 공화국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 이 멍청한 원숭이 새끼. 심지어 지금이야 두말할 것도 없는데. 뭐?”
---실수였다. 그래. 그때는 내가 패배했다는 걸 인정하마.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 같은데….
“다르기는 개뿔… 새끼야. 방금 크게 당한 건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내 눈에는 너야말로 덩치를 부풀리고 있는 겁먹은 짐승으로 보여. 시바. 누가 봐도 내가 유리한 상황인데. 블러핑도 정도껏 해.”
---누구나 다 네놈처럼 덩치를 키울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아이고. 그래요. 잘 알아들었습니다. 군사님. 우리 대단한 군사님의 넘치는 지혜와 전술이 어디까지 들어 먹히는지 봅시다.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
“군사님 입으로 말해보세요. 응? 이 새끼야. 그 잘난 입으로 말해보라고요. 제가요… 네에? 뭘 할 것 같습니까?”
입술을 으득 깨무는 놈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사실 나도 내가 뭘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 녀석이 모르고 있는 것도 당연했다.
---개자식….
하지만 녀석도 나도. 이것 하나는 알고 있을 것이다.
‘페이스가 중요하지.’
누구 페이스로 끌고 오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하긴 명예도 모르는 악마 소환사가 뭘 알겠어? 그렇지, 하얀아?”
“네… 네! 명예도 모르는 악마 소환사가 뭘 알, 알, 알겠어요? 헤, 헤헤….”
“그렇지 않아요? 소라 씨?”
“아… 네… 악마 소환사는 모… 르죠….”
필사적으로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하고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거, 악마 소환사 놈이 뭘 알겠냐니깐!”
원래 혼자서 때리는 것보다 여럿이 때리는 게 더 아프다.
‘어디서….’
---…….
‘동료랑 가족도 없는 게 까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