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9화 마지막 (62) >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녀석은 조용히 나를 한 번 바라본 뒤 아래를 내려다볼 뿐이었지만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처럼 느껴졌다.
속으로는 아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믿어서는 안 된다고, 개소리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바로잡고 있으면서도 정확한 계약이나 조건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많겠지.
단순한 개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얻을 수 있는 게 없거든.’
녀석을 현재 여기에 있게 만든 존재 의의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됐다.
원래 이런 종류의 인간이 항상 그렇다.
이성적이고 자기 잘난 줄 아는 부류, 이득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고, 감성보다는 숫자를 보고 움직이는 놈들.
본인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위해 개인적인 감정을 포기할 수 있는 부류.
본능이라 이야기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이런 놈들은 이성적일 때 이성적이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되새기며 계산기를 쉴 새 없이 두드린다.
쓸모없어진 복수 대신에 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형, 형님. 혹시 아까 저 악마 소환사가 뭐라고 한 거요?”
아까 전에 내가 보인 반응이 걱정됐는지 입을 열어오는 박덕구를 향해
“신경 쓰지 마.”
라고 말한 이후에는 곧바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아니면 3회 차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
지금이 2회 차라는 사실이 충격적인 거야? 아니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거에 충격받은 거야?
힌트를 너무 많이 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느껴지기는 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녀석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없는데.
지금 굳이 말을 해오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놈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느 쪽이 더 이득을 봤는지는 아직까지 정확히 정산할 수 없었지만 본질을 흐렸다는 것에 성공했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은 점수를 줘도 될 것 같았다.
‘처음 목적이 그거였으니까.’
물타기 자체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거다.
[악마 진영의 본대가 함성과 함께 진격합니다.]
[인류 진영은 전의를 불태웁니다. 조혜진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가 되면 적들을 몰아낼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검은백조의 레인저들이 악마 진영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조사하고 싶어 합니다. 전력분석관들은 악마 진영의 군대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고 보고서를 보냅니다.]
[인류 진영의 네임드 개체 김현성이 기도를 올립니다.]
[악마 진영의 네임드 개체 이토소우타가 군대를 이끌고 진격합니다.]
[수성전이 시작됩니다. 악마 진영의 흑마법사들이 시체의 탑을 쌓아 성벽으로 이동합니다. 아군 마법사들이 마법을 퍼붓습니다. 전 지역에서 크고 작은 전투들이 일어납니다.]
‘귀찮아 죽겠네.’
확실히 귀찮다.
어떻게든 물고 늘어지며 이득을 챙기려고 하는 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니 대처하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다.
적당히 병력을 던져주고 종국에는 서로 원하는 것을 가져가기는 하지만 크고 작은 전투에서 녀석은 이득을 보고 나는 손해를 보는 구조가 계속해서 누적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놈은 이전과 같은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중.
마력 공급원들을 계속해서 충당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 여유가 있는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그 와중에 정하얀은 점점 몸을 붙여오는 중,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계속해서 몸을 밀착시키고 있었고 나는 또 나름대로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입장을 취해야 했기 때문에 그녀와 적당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름 즐거운 시간이기는 했지만 솔직히 대화에 집중이 되지는 않는다.
“마, 마법의 신이 돼서 올라갈 거예요.”
“나도 전부 보고 있었어. 하얀아.”
“소, 소, 소라는 마법의 천사가 될 거구….”
“그래?”
‘노리는 게 뭔지 모르겠네.’
먼저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고, 먼저 재촉할 수도 없다. 다시 한번 입을 여는 순간 내가 놈이 거래하는 걸 원한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내가 녀석에게 기회를 준 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더욱더 편하다는 거다.
아니, 실제로도 그 말이 맞다. 뭐가 어찌 됐든 간에 내가 놈에게 기회를 줬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군사님답군요.”
---너 역시 비슷하군. 철학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그대로다.
“이런 전쟁놀이에 꼭 철학이 있어야 한답니까.”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은 결과이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들을 존중하지. 대화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말이다. 본래 이런 종류의 일이 그렇다. 이런 전쟁은 서로에게 서로를 이해시키는 과정이지.
“대화를 좋아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네놈과는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 주관이 없고 이득과 이익에만 반응해 움직이는 것을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 어떻게 생각해 보면 색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히려 담백하기도 하지.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해시킬 필요도 없지. 남는 것은 결과뿐이니까.
[악마 진영의 이토 소우타와 인류 진영의 차희라가 조우합니다. 차희라는 광소를 내뱉습니다. 이토 소우타는 겁을 집어먹었지만 싸워야 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플레이어의 명령에 따라 본대의 진영이 바뀝니다. 악마 진영 역시 인류 진영의 발에 맞춰 전술을 변경합니다. 계속해서 전투가 일어납니다. 인류 진영의 시민과 사제들은 이 전투는 이 대륙의 역사에 남을 전투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없을 거대하고 숭고한 전쟁이며 모두가 오늘의 전투를 기억할 것이라고 중얼거립니다.]
---3회 차라는 건….
“궁금하시기는 한가 봅니다.”
[인류 진영의 전술 지휘관들이 말도 안 되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감탄합니다. 오늘 이후로 대륙의 전술 교범이 달라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전쟁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블러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신 것도 신기하네.”
---단순한 궁금증일 뿐이다. 그러니까… 너는 이런 상황을 한 번 더 경험했다는 거로군. 굳이 3회 차라고 꼬집어 이야기한 것은 네가 다시 한번 할 수 있다는 걸 내게 각인시키기 위함인가.
[인류 진영의 병사들이 깃발을 들어 올립니다. 사제들의 신성력과 마법사들의 마법이 끊임없이 대륙에 흩뿌려집니다. 지원군이 도착합니다. 악마 진영에서도 지원군이 도착합니다. 다시 한번 커다란 전투가 벌어집니다.]
[인류 진영의 네임드 개체 ‘노을빛의 검사’ 김현성이 움직일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나갈 준비가 되었다고 기도합니다.]
“생각하시고 싶으신 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플레이어는 인류 진영의 네임드 개체 ‘노을빛의 검사’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노을빛의 검사는 플레이어의 명령에 동의합니다. 커다란 노을빛에 악마 진영 병력들의 진영이 무너집니다. 네임드 개체 김현성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군사님이 이해하기에는 일이 조금 많습니다. 굳이 이야기를 풀어드리기도 우습고.”
---이것 하나만큼은 알겠군. 네 말대로 일이 어떻게 흘러가도 아무 상관 없을지도 모르겠다만 네가 내가 협조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겠어. 선택권은 네게 있는 것이 아니다.
[악마 진영은 정진호를 파견합니다. 네임드 개체 정진호가 전쟁터에 합류합니다. 커다란 비명이 울려 퍼지고 아군 병력의 피해가 누적됩니다.]
“선택권은 내게 있지 당신한테 있는 게 아닌데. 우습네요.”
[인류 진영은 진영을 구축합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면 잡아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창을 높이 들고 전진합니다. 사제들이 플레이어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승리의 찬가가 울려 퍼지며 아군 병력이 힘을 얻습니다.]
“그냥 일이 귀찮아지고 복잡해지는 걸 원하지 않을 뿐입니다. 머릿속에서 생각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짜증 나잖아.”
---…….
슬쩍 전쟁터를 바라보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쉴 새 없이 흘러가는 판을 보고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하고 있겠지.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대륙은 누가 유리하다고 말하기 쉽지 않다.
어떤 지역은 완전히 개싸움이 펼쳐지고 있었고 어떤 지역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네임드 들을 분석해 효율을 끌어낼 수 있는 전쟁터를 배정하고 그 개체를 카운터 칠 수 있는 전략이나 수단을 마련한다.
끊임없이 맞물리고 맞물린 전장은 유기적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부족하다.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조금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전장을 한눈에 파악하기 힘들다.
어처구니없는 수를 던진다. 녀석은 코웃음을 치지만 결국에는 반응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우습다. 머리로는 블러핑이라고 판단하고 있겠지만….
‘몸은 솔직하자너.’
녀석은 저 형편없고 이해할 수 없는 수에 반응할 수밖에 없다.
왜.
지난날에 교훈에서 얻은 게 있을 테니까. 저게 블러핑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했으니까.
[인류 진영과 악마 진영이 검과 창을 부딪칩니다. 지휘관들은 전쟁의 신이 자신들을 돌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전투와 명령이 최선의 결과로 직결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술 분석관들은 더 이상 보고서를 올리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말합니다. 플레이어의 명령에만 따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네임드 개체 실리아의 바람 이토 소우타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도망칩니다.]
[네임드 개체 전신 차희라가 이토 소우타를 쫓다 함정에 빠집니다. 준비하고 있던 지원 부대가 합류합니다.]
[인류 진영의 네임드 개체 박연주가 사망합니다. 대륙은 그녀를 기억할 것입니다.]
[악마 진영의 네임드 개체 미하일이 사망합니다. 악마 진영은 그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전장을 위해 눈과 손을 계속해서 움직인다.
악마 소환사도 조용히 입을 닫고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조혜진의 머리를 땋고 있었던 정하얀도 조용히 말을 살펴본다.
자세를 고쳐 잡자 한소라가 조용히 정하얀을 이끄는 것이 느껴졌다. 집중해야 할 상황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지 정하얀 역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한 모금 커피를 마신 이후에도 판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녀석 역시 다르지 않다.
[인류 진영이 성벽을 버리고 후퇴합니다.]
[악마 진영은 쫓지 않습니다. 제5 전선으로 곧바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5 전선의 균형이 무너집니다. 인류 진영이 승리의 함성을 내지릅니다.]
‘여기는 이득. 저기는 손해.’
[인류 진영이 커다란 승리를 쟁취합니다.]
‘이 새끼 방심했어?’
[인류 진영이 다시 한번 커다란 승리를 손에 넣습니다. 제1 전선의 악마 진영이 전멸합니다.]
‘비융신. 비융신 새끼!’
[악마 진영이 인류 진영의 네임드 개체 신념의 방패 박덕구를 생포합니다.]
---…….
“뭐.”
---나는….
“뭐 어쩔 건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
“뭐, 이 씨발 새끼야.”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뭐 어쩔 거냐고! 이 씨발 새끼야!!!”
---…….
“죽여 봐.”
---…….
“이 새끼야. 어디 한번 죽여보라고.”
---…….
“어떻게 되나 한번 보게. 죽여 봐. 내가 이번에도….”
어.
“내가….”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