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1화 마지막 (64) >
화아아아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린델의 김현성?’
“린델의 김현성.”
‘이거 1회 차인 건가. 나 방금 1회 차 본 거야?’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지는 느낌. 혼란스러운 감정을 재빠르게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이래.’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뒤죽박죽 감정이 요동친다.
애써 입술을 꽉 깨물거나 허벅지를 툭툭 두드려 봐도 변화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가 정상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한쪽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애써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을 손으로 가려봤지만 녀석이 이쪽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
‘시바, 왜 이렇게 자주 울어.’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생각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초조해할 필요도, 당황할 필요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반응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본래 알고 있었다.
애초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김현성이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에 관여했을 거라는 것도, 녀석도 녀석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다는 것도,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었다는 것도, 모두 이해하기로 결정을 내리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어마어마한 배신감이 치솟는다. 내가 막으려고 해서 막아지는 감정이 아니라 저 안에서부터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오는 감정이었다.
‘2회 차와 1회 차는 구분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시바, 솔직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었냐구.
굳이 김현성을 대신해 변론해 보자면 할 수 있는 말은 많다.
당시 샤를롯트의 라인을 타고 귀족의 지위를 받고 있었던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대세에 가까웠던 의견을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청소가 정확히 어떤 청소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결단을 내려야 했을 수도 있다는 거지.
단순히 정치적으로 샤를롯트에게 힘을 실어줘야 했을 수도 있고 제국이나 대륙의 존망이 걸려 있는 청소였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김현성이 샤를롯트를 제국의 황제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은 이유와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아마 내가 김현성의 입장에 있었더라도 그 계획에 찬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게 정말로 합리적이었다면.’
이라는 꼬리표가 붙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가면의 영웅과 박덕구가 겪게 된 사건 자체를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본래 이 시대의, 아니, 국가라는 건 개개인의 사정을 전부 알아줄 수는 없다는 것으로 퉁 칠 수도 있고.
녀석의 정치 감각을 생각해 보면 그냥 함정에 빠졌을 가능성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인간 혹은 도시를 통째로 날린다는 발상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김현성이 회피할 수 없는 상황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는 거라는 게 내 결론이다.
그러니까 그 새끼가….
아니,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참 이상해.
애초에 이딴 걸 왜 보여준 거야? 이미 전부 다 끝난 마당에 왜 이런 걸 보게 되는 거냐고.
악마 소환사와 함께 있다는 이 상황이 트리거가 됐다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뜬금없지 않았나.
도대체 어째서 내가 이딴 걸 보고 이런 혼란을 느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령 1기영이 내가 이걸 봐주길 원하고, 이런 상황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면….
‘왜야?’
내가 이걸 왜 알아야 하는 거야.
만약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해도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김현성을 적대시하게 되는 걸 원해?’
아니면 너 대신 복수해 줬으면 좋겠냐구. 김현성이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행복한 것처럼 보이니 그게 배가 아파서 이런 무리수를 던진 거냐고. 이 더러운 악귀 새끼야.
물론 최근에 조금 일이 있어 일부 슬퍼지기는 했지만 김현성은 나름 행복하지 않았던가.
비록 자신의 친우의 배때기를 직접 검으로 쑤셔 죽이기도 했고….
여러 가지 죄책감을 떠안으며 살아가고 있는 중에다 정신병 비슷한 걸 걸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못하는 상태에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2회 차의 김현성은….
‘행복했자너.’
조금 양심이 찔리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보자면…. 그래, 행복한 게 맞다. 행복하겠지? 괴롭지는 않을 거야. 음. 행복한 거로 하자.
이제 와서 행복한 김현성이 아니꼬우니 과거의 악귀가 등장한 것일까. 아니면 내 무의식이 뭔가를 전해주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그대로야.’
이성을 잃지도 않았고 뭔가가 달라지지도 않았고 그다지 많은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계획에는 변함이 없고 이후의 이야기에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이 악귀 새끼 시바. 네가 그럼 그렇지. 무슨 가면의 영웅은 개뿔.’
가면의 악귀가 나를 좌지우지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는 짜증 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는 한다.
녀석이 원하는 것이 복수의 완성이라면, 정말로 녀석이 내 무의식에 남아 이런 걸 보여줘야 할 이유가 있는 거라면, 그것만으로도 이쪽은 지금의 스탠드를 유지할 수 있다.
육체와 정신의 소유는 온전히 지금의 나에게 있고 녀석은 지금 나를 자극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녀석이 이런 떡밥을 던지고 있는 거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배후가 가면의 악귀가 아니라 루시퍼라고 해도 이 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빛기영은 진실의 문을 열고 정의의 빛을 따라가고 있는 거고….
가면의 악귀와 그 무리들이 불안감에 내 앞길은 가로막고 있는 거지.
천천히 숨을 가다듬은 것은 당연지사, 호흡이 꽤나 거칠어지고 있고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테이블을 두 손으로 붙잡고 약간의 시간을 할애하자 곧 모든 게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것 같이 느껴졌다.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온 게 바로 그때였다.
---사정이 많아 보이는군. 쉴 시간이 필요하나? 만약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면….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렇게 배려해 주시다니 이거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표현해야 할지… 신사적이십니다. 아주 신사적이세요.”
---네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기분 좋은 마무리를 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어떻던가.
“뭐가 어때요?”
---1회 차의 내 모습은.
“뭐? 너 이 개새!”
---정말이었나.
“…….”
---반신반의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상황이 이러니 믿지 않기도 힘들군.
“…….”
---네가 전부를 기억하는 것 같지 않은데. 회귀의 주체는 네가 아닌 건가. 단편적으로 볼 수 있는 것뿐인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신호탄이 있는 것인가. 재미있군. 흥미로운 이야기다.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또 네가 그걸 어떻게 알게 된 건지는 내 알 바 아니다만…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이 미친 새끼 진짜. 짜증 나네.’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당연한 것이니 말이야. 네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나. 지금이 2회 차라는 것도, 3회 차가 가능하다는 것도, 멍한 얼굴로 무언가를 되새기는 것 같은 행동이나 진실을 깨달은 것 같은 표정도, 한번 찔러 봤을 뿐이야. 이렇게 쉽게 걸려들 거라고는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지만. 뭐, 그만큼 네게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겠지.
정말로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잠깐 동안이나마 이 새끼가 함정을 판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녀석의 얼굴 에는 정말로 흥미 외에 다른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최소한 녀석은 방금 내가 겪은 현상과 관계가 없다.
“뭐 마음대로 생각하셔도 됩니다.”
---어떤 모습이었지?
‘이 새끼 이미 확신하고 있네.’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시 한번 묻겠다. 나는 어떤 모습이었지?
“…….”
---…….
풀어도 별로 상관없으려나.
어차피 놈이 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까.
“1회 차의 군사님은 제 노예로 생을… 마감….”
---이기영 이 개자식. 난 지금 진심으로 묻고 있는 거다.
“아니, 저도 진심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 눈에 보이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건데….”
---…….
“어떻게 된 건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군사님이 제게 커피를 타다 바치고 있더군요. 인간 의자가 되어주기도 하고 가끔 스트레스가 쌓이는 날이면 맞아 주기도 하셨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말입니다. 물론 식사시간이 되면 테이블 밑에서 개처럼 엎드려 사료를… 허겁지겁… 가끔은 제가 던진 빵을….”
---이기영.
“아니… 제가 거짓말하는 거로 보여요?”
---이기영!!
“아니, 시바, 진짜라니까!! 진짜라고!!”
---뭐?
“나도 황당해서 말이 안 나… 하, 진짜… 지금 생각해도….”
---뭐… 이런….
“인간 이하였습니다.”
---그럴 리가….
“농담이니까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마세요.”
육성으로 외치지는 않았지만 표정은 이 개자식 이라고 외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
“군사님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죽어가기 전에 처음 만났을 때 했던 게임을 하고 있었고 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군사님은 몰라도 굳이 상관없는 이야기 말입니다. 어째서 죽었는지는 모르니 묻지 마세요. 아마 븅신처럼 또 함정에 걸려서 뒈졌겠죠. 뭐. 뻔하잖아요. 잘난 척하다가 골로 가는 거.”
---…….
녀석이 천천히 병력을 움직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기서는 악마 소환사가 아니었던 것 같았습니다. 최소한 뒈질 때는 공화국의 군사로 뒈졌다는 이야기겠죠. 나름 명예로운 죽음이기는 했을 것 같습니다. 곁을 지킨 사람이 저 라는 게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아! 혹시 1회 차에서도 이기영 개자식에게 뒤통수 맞았구나, 이런 생각 하지는 마세요. 1회 차는 누나랑 같이 움직였거든. 아마 누나랑 나한테 번갈아 가면서 맞았을 거야.”
나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부딪칠 일이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군사님은 우리의 존재를 깨닫고 있었으니까요. 우리들을 이용하기도 했고, 우리가 당해준 것 같기도 하고… 뭐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겠지만 군사님이 그렇게 좋아해 마다치 않는 두뇌 싸움은 질리도록 했을 겁니다.”
---…….
“별로 변한 게 없어 보이더군요.”
---그런가.
“왜 궁금하기는 궁금하신가 봅니다.”
---단순한 호기심이다. 커다란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그게 왜 궁금합니까.”
---말해줘야 하나.
“그것도 정신병입니다. 군사님. 제게 뭐라 충고할 입장이 아니십니다요.”
---너와 나는 다르다. 머저리.
입을 열면서도 본능적으로 말을 옮기게 된다. 정진호와 김현성은 여전히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전장은 어느덧 막바지로 접어든다.
진청 역시 나와 다르지 않다. 대충 중얼거리면서도 시선을 떼지 않는다.
‘이 새끼 진짜….’
솔직히 흥이 식기는 했다. 녀석에게 맞춰주기도 하고 또 녀석이 바라는 대로 나 역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야 있었지만 이 게임의 결과를 깨달아 버렸으니 어떻게 흥이 식지 않을까.
녀석 역시 내 상태를 깨닫고 있는 것 같았지만 굳이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승리하는 게 목적이라는 듯 계속해서 병력들을 이끌고 내게 진격해 올 뿐이었다.
2회 차의 마지막, 또 1회 차의 마지막과 마찬가지로 녀석이 택할 건 뻔했거든.
열심히 반항하기는 했지만 결국 수세에 몰린 아군의 병력. 그리고 마지막 결전을 앞둔 자신의 병력 앞에서 녀석은 그제야 만족스러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명예.
“네.”
---내가 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닌 명예다.
“…….”
조금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기도 했다.
---약속은… 지켜라.
“당연히 지켜드려야지요. 아주 잘 선택하신 겁니다. 군사님.”
---지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