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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33화 (824/1,590)

< 833화 마지막 (66) >

‘그래도 눈치는 빨라서 좋아.’

연기력에 조금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확실히 이쪽이 뭘 원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굳이 이런저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본인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알고 있다는 건….

‘좋자너.’

이쪽의 호흡에 따라와 주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보내야 함이 옳다.

물론 얼굴이 많이 일그러져 있기는 하다. 후회하는 듯한 표정이기도 했고 꼭 이래야 하는 건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수치스러워하는 얼굴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놈이 쥐구멍에 들어갈 리는 없겠지.

애초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에는 녀석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뒤통수가 언제 터질지 걱정했으니 또 나름대로 안전하게 느껴지기도 하겠지.

생각해 봐, 대중에게 직접 밝히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에 있겠어. 나도 신성 좀 벌고. 그렇지 않나.

슬쩍 박덕구를 바라보니 녀석에게 미안해하는 얼굴을 보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기는 해.’

그동안 악마 소환사라고 녀석을 눈앞에서 매도하며 본인이 할 수 있는 온갖 나쁜 말을 쏟아내지 않았던가.

현재 상황이 뭔지 정확히 이해하기는 힘든 것 같았지만 그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대륙인들 역시 마찬가지.

오히려 배경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라고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박덕구의 얼굴이 보인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럼….”

“…….”

“모든 게 오해였다는 거요?”

‘단순히 오해뿐이겠어? 내가 진짜 설정 기깔 나는 거로 하나 잡아 줄게.’

아껴 쓸라고 안 쓰고 있었던 설정이고 배역이었는데… 솔직히 진청한테는 아깝기는 해. 그래도 어쩔 수 없자너.

“단순한 오해가 아닙니다. 박덕구 님.”

“형….”

‘형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지. 시바.’

“아, 아니… 혜… 혜진 누님….”

그래. 나는 지금 조혜진이야. 그 누구보다 정의를 사랑하고 파란색을 좋아하고 가끔 베니고어넷에 고민 상담 글을 올리는 혜지니.

“군사님은 싸워오고 계셨던 겁니다.”

“그게… 무슨….”

“군사님께서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싸움을 하고 계셨습니다. 세간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빛의 그림자로서 악마와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싸우고 계셨습니다. 자신의 몸이 바스러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군사님은 싸워오셨습니다. 어쩌면 이런 결과를 알고 계셨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자신의 몸이… 언젠가는….”

“아… 아니… 그게….”

개연성은 나중에 불어 넣어주면 그만이니까. 일단은 이렇게 해주는 게 옳지.

“언젠가는 악마에게 먹혀 버릴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눈물 한번 흩뿌려 주자.

눈물 몇 방울이 공중으로 흩날려 줘야 또 맛이지.

‘혜지니 얼굴이 이래서 좋아.’

신뢰감 가득한 얼굴, 딱 어울리자너.

대사가 오글거리기는 했지만 원래 이런 건 오글거리는 게 또 맛이다.

무리수 같은 설정은 연기력과 진심을 담은 목소리와 눈빛으로 호소해 보도록 하자.

모든 걸 깨달아버린 것 같았던 박덕구 얼굴도 한번 비춰줘야지.

어째서 이전에 내가 그렇게 혼란스러워했는지에 대한 개연성을 스스로한테 부여하고 있는 거 봐.

이기영이 느낀 혼란과 흘린 눈물은 어디까지나 진청의 삶에 대해 공감해 주기 위함이었어.

그래. 덕구야. 네가 정답을 고른 것 같아.

“그… 그게 정말이라는 거요? 그럼 어째서… 어째서….”

“군사님께서는 상징이 되고자 했던 겁니다.”

“상징….”

“스스로 공포의 상징이 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저는 아직도 부길드마스터와 진청 군사님, 아니, 빛의 아들과 빛의 그림자가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륙에는 알려지지 않을, 영원히 묻어야만 했던 이야기였습니다. 당신도 기억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그….

‘아, 이 병신 새끼 이걸 못 받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 호흡 못 따라오자너. 템포 못 따라오는 거 봐. 빛의 딸 발언은 우연이었어? 아니면 수치심이라는 게 폭발하기 시작했어?’

“그… 그 대화가 뭐요?”

‘덕구야, 시바, 사랑한다.’

“그것은 계약이었습니다. 악마에게 몸이 먹혀 버린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키지 말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군사님께서는 악마 소환사로 남으시길 원하셨습니다. 한평생을 악마와 싸워온 그림자는 죽어서까지 그림자로 남길 원하신 겁니다. 그게 군사님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걸 짊어지고 스스로 악의 상징으로… 웃음거리로… 인류의 배신자로… 대륙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남으시길 원하셨던 겁니다.”

---…….

‘아, 이 새끼 왜 이렇게 표정이… 정신 안 차려?’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실이…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실이 있단 말이요… 이래서는 안 된다니까.”

“현실입니다. 우리가 부정해서는 안 될 현실입니다. 진청 군사의 영혼이 다시 한번 악마에게 강탈당한 것은 어쩌면 과거의 대륙의 잘못일 수도 있습니다. 그의 명예와 끝을 무시한 우리의 잘못입니다. 군사님. 저는 군사님이 제게 남긴 말씀을 아직도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셨습니다.”

“…….”

“빛의 아들의 대륙에 기여한 것에 비하면 이 정도 희생은 별것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악마에게 패배한 것은 나의 죄이니 담담히 악마 소환사로서의 끝을 받아들인다고 하셨습니다. 평생을 그림자로 살아가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런 끝은 너무 비참합니다. 부길드마스터께서도 이런 군사님의 모습을 원치 않으실 겁니다.”

“…….”

“빛의 아들께서도 군사님께서 밝은 곳을 향해 발을 옮기시길 바라고 계실 겁니다.”

‘시작해, 덕구야.’

“형… 형님이라면 분명히 원하고 있을 거요! 이,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니까….”

“…….”

“거, 군사 양반! 할 수 있다니까. 평생을 악마와 싸워왔다고 하지 않았나! 평생을… 평생을 말이요. 벗어나지 못할 리가 없다니까. 거… 거 미안합디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악마 소환사라고 군사님을 모욕해서 정말로 미안합디다.”

확실하게 울먹거리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그야말로 감정을 담은 대사를 치는 박덕구의 모습은 내가 봐도 박수를 보내게 만들 정도였다.

이전에 자신이 했던 발언들을 후회하고 있는 우직한 얼굴, 진심으로 참회하는 것만 같은 숭고한 모습.

어느덧 녀석의 눈가에는 촉촉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믿고 있습니다. 군사님.”

슬쩍 한소라를 바라보자 그녀 역시 입을 열기 시작한다.

“군… 군사님. 이제는 괜찮아요. 더 이상… 더 이상 그림자 속에 숨지 않으셔도 돼요.”

‘대사 좋고.’

정하얀은 일단 가만히 있어줬으면 좋겠다.

“대륙은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네. 부길드마스터도 그런 이야기를 하시고는 했습니다. 아무리 군사님의 뜻이라고 한들, 아무리 군사님의 마지막 부탁이었다고 한들, 군사님의 진실된 모습을 대륙에 알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그만큼 군사님의 뜻이 강직하시기도 하셨지만 부길드마스터께서는 알고 계셨던 겁니다.”

---…….

“군사님을 정말로 명예롭게 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보세요. 군사님.”

한쪽 눈에서 눈물 또르륵.

“대륙은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슬쩍 카메라 쪽으로 시선 돌리기. 우리 혜진이 데뷔는 완벽해야지.

“우리들은 커다란 위협으로부터, 종말의 예언으로부터, 천사의 탈을 쓴 악마로부터 대륙을 지켜냈습니다. 군… 군사님의 덕분이었습니다.”

대놓고 엉엉 우는 건 감정 과잉이자너. 그냥 눈물 몇 방울 뚝뚝 떨어뜨리면서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대사 쳐주는 게 제일 좋다니까.

목이 메는 것 정도는 괜찮아. 공화국 애들이 원래 국뽕 맞으면 정신 못 차리니까.

다른 애들이야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도 공화국 애들은….

“공화국의 비밀 결사단들과 함께 그림자 속에서 대륙을 지켜낸 당신 덕분이었습니다!”

미쳐 날뛴다니까.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국뽕을 한 사발 들이켜고 있는 공화국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은 이미 눈가가 촉촉해진 지 오래. 여기저기에서는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군사님은 악마 소환사가 아니었어.

-그림자의 영웅… 알려지지 않은 대륙의 영웅….

‘공화국 중심으로 여론 조작하면서 베니고어넷 좀 관리하면 그래도 1년 안에는 세탁되겠네….’

-군사님은 악마 소환사가 아니야. 진청 군사님은….

-믿고 있었다니까. 내, 내가 뭐라고 했어. 군사님은 악마 소환사가 아닐 거라고… 분명히….

-지지 마세요! 진청 군사님! 악마 따위에게 지지 마세요!

-공화국의 오호대장군. 공화국의 희망이자 등불! 당신이 지켜낸 공화국입니다.

‘이야. 공화국 새끼들은 국뽕 들이켜는 솜씨가 진짜 보통이 아니야.’

교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국뽕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놈들의 눈에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솔직히 이 새끼들은 이제 아니라고 해도 억지로 믿을 것 같아.

아니면 그냥 무조건적으로 믿고 싶을지도 몰라.

왜냐고? 이 새끼들이 조금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 같거든.

교국과 공화국은 원래 태생부터가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교국이 대륙을 지킨 영웅을 둘이나 탄생시킬 동안 공화국은 뭐 제대로 한 게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대륙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일념과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생각 하나로 많은 자원과 인력을 투자했지만 실상은 빛의 아들의 희생과 노을빛 검사의 하늘 가르기 엔딩에 묻히기 바빴다.

교국의 네임드가 빛을 위해 힘을 냈을 때 공화국의 네임드라는 것들을 악마소환이나 하며 악마들과 결탁하기 바빴으니.

윗대가리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 국민들의 자존심도 상했을 거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는 이야기.

그런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시킬 수단이 등장했다.

악마 소환사가 아니었단다.

‘이게 세탁기지. 그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마의 세력과 싸웠던 그림자 영웅이었단다.

비밀결사단과 악마와 전투 중에 몸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자신의 최후의 최후까지 싸우고 종국에는 대륙을 위해 스스로 명예를 저버린 위인이었단다.

‘솔직히 욘나 멋있자너. 그림자 영웅.’

공화국 놈들이 국뽕에 차올라 정신을 놓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는 베니고어넷 역시 호황.

공화국 중심으로는 진청을 응원하는 게시글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스크린 데뷔에 성공한 조혜진 역시 반응이 좋다.

-군사님!

‘진짜 장관이다. 장관.’

-저희들은 군사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 새끼들도 태세전환 진짜 장난 아니야.’

-군사님이 악마 소환사가 아니라는 걸 믿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신나게 갈구더니….’

-군사님! 힘내십시오! 공화국민들이 응원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아이고야….’

-믿고 있었다고! 젠장!

모두의 힘을 하나로.

아무리 수치스럽다고 한들.

아무리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들.

아무리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고 한들.

이쯤 되면 선택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나도 눈물 몇 방울 더 떨어뜨리고 책상 탁 치면서 부끄러운 뻔한 대사 갈겨 줘야지.

“그림자는 빛이 없으면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당신의 안에는 아직도 빛이 남아 있어요.”

결국 궁지에 몰린 녀석이 머리를 붙잡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크… 크윽… 크으윽….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크아아아악….

내가 다 숨고 싶어지는 모습.

녀석의 동공은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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