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834화 (825/1,590)

< 834화 마지막 (67) >

지진이라도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무자비하게 흔들리는 동공이 보인다.

‘갑자기 왜 이렇게 불쌍해 보이냐.’

심지어 이렇게 하면 되냐는 듯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스토리텔링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본인이 뭘 해야 하는지, 어떤 스탠드를 취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그 결과에서 우러나온 것이 바로 저 행동이었을 것이다.

---크으윽… 크윽….

“힘을 내쇼! 모두가 믿고 있다는 거 아니요! 모두가 응원하도 있다니까! 군사님이 본래대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소! 내가… 내가 뭔가 도울 게… 도울 게 있나.”

---크아아아윽… 제길… 내 머, 머, 머릿속에서 나가라… 이… 악… 악….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을 보면 본인의 행동에 자신감이 없는 모양, 마치 이렇게 하는 게 맞냐는 듯 무언의 물음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할 정도로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니 진짜 근데 미치겠네. 이 새끼 연기 왜 이렇게 못해?’

디아루기아보다 최악처럼 느껴진다. 아니, 최소한 그녀는 역병드래곤으로 자신의 하이커리어를 찍어보기라도 했으니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평소에 표정 숨기는 건 잘하는 양반이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뭐라고 코멘트를 남기기 힘들 정도로 최악이다.

배역과 스토리가 아깝게 느껴질 정도의 구더기 감정선. 그림자의 영웅이라는 타이틀도 만들어줬건만….

‘집중 안 해? 수치스러워하지 말고 집중해야지. 시바. 장난이야? 이게 장난처럼 보여? 여기에 걸린 게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

조금 더 아껴두는 게 좋을 뻔했다. 그림자의 영웅을 꺼내는 게 아니었다.

다급한 표정으로 한소라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그동안의 경험으로 촬영 기법들을 쌓아 올린 한소라 카메라 감독의 눈에도 지금 이 순간이 위기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결국에는 입술을 꽉 깨문 그녀가 이리저리 손거울을 움직이는 게 눈에 보였다.

현장의 긴박함을 그대로 전하는 것은 물론 진청의 어색한 표정을 숨겨주기 위함이겠지.

이거 사운드에도 노이즈 들어가야 되는 거 알지?

치지직 소리랑 같이 악마 목소리 좀 같이 넣어 줘야 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처리하는 모습은 이미 프로의 그것.

여러 가지 특수효과로 인해 그나마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 어색함은 커버칠 수가 없다.

차라리 조금 단촐한 설정이었다면 어땠을까.

연기력과 감정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스토리텔링이었다면 어땠을까.

---크으윽… 나는 지지 않는다.

‘뭘 지지 않아? 도대체 뭘. 뭔데? 그렇게 꿋꿋하게 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해?’

내 각본이 쓰레기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게 되는 상황, 어떻게든 진청에게 도움을 주려는 박덕구가 아니었다면 이미 망했어도 진작에 망할 뻔했다.

“형, 형님! 이거….”

“군사님! 긍지를 지키세요!”

---크윽… 크하… 하하하….

“악마가 튀어나오려고 하고 있다는 거 아니요. 이거 어떻게… 진청 군사의 모든 걸 앗아간 더러운 악마가 나오고 있다니까! 형님! 구해야 하는 거 아니요? 남몰래 대륙을 지켜온 그림자의 영웅이 이대로 악마에게 먹히게 내버려 둘 수는 없소.”

---제길… 제길… 제기랄… 이기영….

‘방금 감정선은 좋았는데.’

---크윽…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대사가 왜 이렇게 일차원적인지 모르겠다.

“아니요. 군사님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부 길드 마스터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림자를 만드는 빛은 아주 작지만 그 어떤 것보다 더욱더 빛나고 있다고 말입니다.”

원래 이런 대사 외칠 때는 자신한테 확신이 있어야 되는 거라고.

싸구려 소설책에서나 나올 것 같은 대사에 힘이 실리는 이유가 바로 감정선 때문이라니까.

우리는, 시바, 진짜로 목숨을 걸고 있으니까. 여기에 힘이 실리는 거야.

이게 실제 상황이고 정말로 죽을 수도 있으니까 사람들이 지켜봐 주는 거라고.

물론 혜진이 외관이 연기의 완성이기는 해.

그래도 스스로한테 부끄러워하면 안 되지. 하는 사람이 부끄러워하면 보는 사람도 부끄러워지는 거야. 조금 더 당당해져 봐.

약간은 간질간질해지는 대사들을 계속해서 공급하며 조언하려고 해봤지만 이건 이미 심폐소생술이 불가능하다.

결국에는 이대로 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입안이 쓰다.

한 감독이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워.’

렌즈를 아예 아래로 내려 더미월드를 비추기 시작한 것.

거대한 악마의 군세들이 얼마 남지 않은 인류를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빛의 군대는 하나로 똘똘 뭉쳐 악마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전진하라. 악… 악마의 군세여.

초근접으로 촬영을 하기 시작하니 어린애들 장난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만 같다.

다른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적당히 효과음과 버무려진 전장은 대륙인들의 공포심을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승리해야 합니다. 빛의 군대여!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군사님을 어둠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네… 네놈들의 뜻대로 될 것 같으냐… 이만 포기….

“절대로 군사님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저희들뿐만이 아닙니다. 공화국의 국민들도, 현재 싸우고 있는 교국의 영웅들도, 대륙을 지켜낸 모든 이들이 모두 군사님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제길… 내가 왜… 제길….

“나아가자 빛의 군대여!”

거대한 빛무리가 쏟아져 내린다.

[인류 진영의 네임드 개체 ‘노을빛의 검사’ 김현성이 환하게 웃습니다. 지켜보고 있으실 줄 알고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싸움을 함께하자고 이야기합니다. 이번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불안하지만 플레이어가 원하는 것이라면 따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새끼, 이거 버그 어떻게 해야 돼. 누나. 만들 때 수정 좀 하지. 근데 더미월드 이렇게 쓰니까 또 괜찮기는 해.’

몇 가지 실험 정도는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인류 진영의 네임드 개체 김현성이 함성을 내지릅니다.]

[인류 진영의 병력들이 놀라움을 표현합니다. 환한 빛무리에 모두가 용기를 얻습니다. 인류 진영의 병력들은 플레이어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전투라고 이야기합니다. 순수한 빛과 어둠의 전투가 시작될 거라고 합니다. 함성을 내지릅니다. 그들은 방패를 두들기고 발을 굴리며 마지막 전투를 위한 승리의 노래를 내부릅니다.]

“나아가자!”

“나아가자니까! 군사님을 구하는 거요!”

[악마 진영이 발걸음을 옮깁니다. 마치 대지가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인류 진영은 공포에 떨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따뜻한 빛이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이끌어줄 거라고 소리 지릅니다.]

---저들을 죽여라. 전부… 전부 죽여!

‘그거 진심 아니지?’

[마지막 전투가 시작됩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이 대륙의 역사의 영원히 남을, 마지막 전투가 시작됩니다!]

어둠에 휩싸인 악마들과 빛의 휩싸인 군대가 부딪치는 광경은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경이롭다.

성기사들은 고함을 내지르며 악마에게 저항하고 언데드들은 끝까지 아군 보병을 물고 늘어진다.

전술과 전략의 싸움과는 거리가 멀다. 순수한 어둠과 빛의 격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필사적이고 처절하다.

더미 월드인지 모르고 봤다면 꽤나 손에 땀을 쥘 만한 전투가 됐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대륙인들의 반응이야 두말할 것도 없다.

대륙 곳곳에서 전투와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싸우고 있는 이들도 있고 싸우고 있지 않은 이들도 있지만 이들의 마음은 모두 같다.

빛이 승리할 거라는 믿음. 어둠은 결국 빛의 앞에 무릎을 꿇을 거라는 믿음. 이 위기를 다시 한번 해쳐 나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지지 마라! 제기랄! 악마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

-빛의 아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시민들이 눈에 띈다.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이들 역시 위 전투에서 승전고가 울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지지마라! 교국이여! 빛의 군대가 악마의 군세를 밀어 붙이고 있는 것을 보라! 우리들도 저들과 같이 승리할 것이다! 빛의 아들이 우리들을 지켜보고 계신다.

-힘을 내자. 모두 두려워 말고 하늘 위를 보라! 함께 대륙을 지켜냈던 우리의 전우들 역시 다른 전장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우리의 승전보는 그들에게 커다란 힘이 될 것이다.

당연하지만 굳이 이게 가짜라는 사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다.

효과는 대단했으니까.

모두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전투다. 다시 한번 자극을 줄 수 있는 숭고한 전투다.

처절하지만 빛의 둘러싸인 더미들의 눈빛에 두려움이란 없다.

신이 자신들을 지켜봐 줄 거라고 생각하는 신앙은 그들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주게 만들 정도로 헌신적이다.

“군사님.”

---…….

“정신 차리세요. 군사님.”

---크윽….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것은 군사님뿐입니다. 부길드마스터 역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직도 몰입을 못 한 건 조금 그렇기는 해.

하지만 상황이 워낙 좋아 녀석의 연기력을 무마시켜주는 것만 같다.

기도를 올리고 있는 공화국 국민들과 자신에게 힘을 보내고 있는 이들을 힐끗 바라보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빛을 내보이자 반사적으로 머리를 부여잡는 모습이 보인다.

빛의 반응하는 몸이라는 세세한 설정을 잡은 건 좋았지만 표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았다.

다른 건 못해도 빛 쏘기 하나는 잘하는 만큼 천천히 녀석에게서 환한 빛이 피어오르는 효과를 주입하기 시작.

슬슬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지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여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나는 지지 않는다. 더러운 악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

날 보면서 이야기 하는 게 조금 그렇기는 한데, 감정선은 좋아.

---나는 공화국의 진청이다. 이런 것 따위에 굴복할 성싶으냐.

근데 대사가 너무 구려. 너무 옛날 느낌이야. 물론 클래식이 나쁘다는 건 아닌데….

아니, 오히려 클래식 한 건 좋은 건데 네 입에서 나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조금… 그래.

구태여 공화국의 진청이다라고 자기소개하는 것도 너무 좀….

그래도 받아줘야지.

“네. 당신은 진청입니다. 평생을 악마와 싸워온, 죽어서까지 대륙을 지키고 싶어 한 진청입니다.”

---나는 공화국의 진청이다. 제길… 제길!

거대한 빛이 악마의 군세를 덮친다.

빛에 의해 모든 어둠이 허물어지는 그 찬란한 광경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다.

[인류 진영이 기적을 목격합니다. 대부분의 병력들이 빛이 곁에 있었다고 눈물을 쏟아냅니다. 악마 진영의 악마들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악마들의 힘이 약화됩니다. 악마 진영의 네임드 개체 정진호가 아쉽다는 듯 웃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음 기회가 있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인류 진영의 네임드 개체 김현성이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쏟아지는 빛을 바라보며 손을 뻗으며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군사님….”

---그… 그 누구도 내 긍지를 더럽힐 수는 없… 다… 나는 더러운 악에 굴복하지 않는다.

[인류 진영의 병력들이 악마의 군세를 몰아냅니다. 아니, 악마 진영이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찬란한 빛은 그들의 가슴속에 영원토록 남을 것입니다.]

“…….”

[모두가 환호성을 내지르며, 전투가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그럼… 어?”

몸이 위쪽으로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어….”

감았던 눈을 뜨자 적막함이 감도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