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5화 마지막 (68) >
“아….”
‘원래대로 돌아왔구나.’
“…….”
떠들썩해진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니 적응이 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아버….”
하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세라핌이 시야에 들어왔다.
슬그머니 커피를 들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얼굴. 곧바로 한 모금을 마신 이후에는….
‘맛 없자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땅바닥에 쏟아져 내린 커피를 닦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별로 시선을 두지는 않았다.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조혜진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하게 붉어진 얼굴을 보니 내가 몸에 강림해 있을 때도 이쪽의 상황을 볼 수 있었던 모양.
자신이 올린 게시글을 내가 봤기 때문인지, 첫 카메라 데뷔에 감격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혜지나?”
-닥쳐라. 이 새끼야.
혼자 소곤거리는 목소리였지만 오늘따라 크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혜지니가 욕 했자너.
“왜 그래요? 좋은 일이라니까.”
-제발 닥쳐….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지 않은가.
“이걸로 스타 덤에 오르는 게 확실해질 거라니까요. 사실 혜지니 업적에 비해서 사람들에게 조금 덜 알려진 경향이 있기도 한데. 그게 다 홍보를 안 해서 그래요. 홍보를….”
-…….
“이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아마 혜진 씨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도 오늘 있었던 일들 전부 올라갈 거고…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혜진 씨 손거울 본 건 실수였지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뭐, 본 내용도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으니까…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다만 앞으로 그런 궁금한 일이 생기면 이상한 커뮤니티보다는 친구한테… 상담을….”
-제발… 제발 닥치라고. 조금만….
“정신 차려야죠. 얘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잖아. 혜진아.”
사실 그리 이상하게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도대체 왜 저러고 있는 걸까 하는 느낌은 있었지만 언 듯 보면 빛의 승리에 감격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분위기를 보니 아직까지 내가 위로 올라갔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귀신같이 냄새를 잘 맡았던 정하얀도 혼란스러운 장내 때문인지 아직까지 같은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었고 원래 눈치가 없었던 박덕구야 여전히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아마 녀석이 분위기를 혼란스럽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으리라.
“작별인사는 해줍시다. 얘들 실망하겠네.”
그제야 조혜진 역시 정신을 차린 느낌.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면 하얀이나 덕구가 실망할 거라는 걸 그녀가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조용히 심신의 안정을 가다듬고 있는 것을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소소한 효과는 이쪽에서 내줄 테니까. 대신 인사 좀 해줘요. 뭐 간단히 해도 괜찮고 모르겠으면… 아니, 그냥 혜진 씨가 적당히 해주시면 됩니다. 최대한 빨리요. 하얀이가 눈치채기 전에.”
조금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은 기본. 기운이 없다는 듯 목소리에 힘을 빼자 조혜진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결국에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일일이 코치해 주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것이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동작은 발군.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정말로 내 입장을 대변해야겠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처럼 보인다.
표정에서부터 잠깐 동안 떨어지는 게 아쉽다는 얼굴이 드러난다.
아마 모두가 깨닫고 있을 것이다. 이다음에 조혜진이, 아니, 조혜진이 연기하고 있는 이기영이 무엇에 관해 이야기할지 모를 수가 없다.
씁쓸한 웃음이 머금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괜찮다. 조금 진지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요?
-말 그대로 이제 가 봐야 한다는 거야.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전부 한 것 같고. 시간이 그리 많지 않거든… 계획하고 있는 게 있어. 자세하게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거니까 너무 호들갑 떨 필요 없다.
-정, 정, 정말이요?
-물론….
“너무 확신을 담아서 말하면 얘들 엄청 기대하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런 형태로나마 만날 수 있어 너무 즐거웠어. 하얀이도 덕구도 소라 씨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 좋고… 그리고….
-안, 안, 안 돼… 안, 안, 안 돼….
-금방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하얀아.
-어, 어… 어….
당연하지만 정하얀이 문제. 돼지 새끼는 예상대로 눈물을 일발 장전하고 있었지만, 정하얀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은 기본, 허겁지겁 달려들어 와 조혜진을 놔주지 않겠다는 듯 꽉 껴안고 있는 모양새가 조금 슬퍼 보이기야 한다.
엉엉 소리 놓아 우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니 조혜진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일단은 그녀를 진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이제 슬슬 떼어내려고 하는지 손에 힘을 줬지만 이미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그녀가 떨어질 리 만무.
쟤는 어떻게 조혜진의 근력을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마력으로 근력을 보조하고 있다지만 기본 근력이 없어서는 저렇게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어어어어엉… 끄윽… 흐어어어엉….
-빨, 빨리 돌아올 수 있을 거야.
-히끅… 끄으으윽… 가지 마요. 가지 마… 히끅….
-정, 정하얀 님. 그러시면 안 돼요. 부… 부길드마스터가 곧 돌아오신다고 하셨잖아요.
-최대한 빠르게 돌아올 게.
-가지 마! 가, 가, 가지… 흐어어어엉… 가지 말라구….
어떻게 해야 하냐는 듯 창 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하지만 딱히 코멘트를 해줄 수가 없다.
정하얀의 억제기가 그녀를 진정시켜 주기를 기다리는 게 최선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한소라가 정하얀을 달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사실 전혀 진정되는 것 같지 않기는 했지만….
-금방 돌아오신다고 하셨으니까 금방 돌아오실 거예요. 부길드마스터도 힘드실 거예요. 그러니까… 이만 놔… 주세요. 정하얀 님….
-흐어어엉….
-거, 형님도 힘드실 거요. 누님 마음도 이해되지만 일단은… 보, 보내 줘야 한다니까. 형님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나. 금방 돌아올 거라고. 계속 혜진이 누님 몸에 살 수도 없으니까. 형님 몸으로 돌아온다는 거 아니요. 일단은… 보내줍시다.
-그래. 하얀아. 곧 돌아올 거야. 기다릴 수 있지?
일단은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지만.
-기다릴 수 있지?
한 번 더 물어보니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은근슬쩍 자신이 기다려야 하는 것에 대한 보상을 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원래 항상 해줬으니 말이다.
하지만 조혜진이 그런 그녀의 의사 표현을 알아챌 수 있을 리 만무. 다시 한번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손으로 직접 눈물을 닦아주고 눈을 마주치며.
-다 괜찮을 거야.
라거나.
-하얀이를 믿으니까.
라고 말해 주거나.
-하얀이도 믿을 수 있지?
이 정도로.
조혜진이라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말들을 계속해서 해주고 있으니 정하얀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은근히 얘 다루는 솜씨가 괜찮은 것 같아 보여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내가 하면.”
-내가 하면.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거, 귀에 딱지 앉겠소. 거, 자꾸 눈물 나오게 하지 말고 후딱 가라니까. 어차피 돌아올 거 아니요.
-그래. 나중에 보자. 돼… 지 새끼. 소라 씨도 고생하셨습니다.
-아… 네. 부길드마스터. 안녕히 들어가세요.
괜히 이제 간다. 나 진짜로 간다. 안녕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잠깐 동안 조혜진이 눈을 감고 약간의 빛이 번쩍이는 것이 전부.
조용히 눈을 뜬 조혜진이 다시 한번 머리를 묶는 것으로 다시 그녀의 몸으로 되돌아 왔다는 것을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
조혜진 역시 내 생각과 같은지 풀어져 있는 머리를 묶으며 입을 열었다.
-잠깐 동안….
-정말로 간 모양이요.
-네. 이미 전해 들으셨겠지만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내려오겠다고 말입니다. 부길드마스터도 많이 아쉬워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거, 우리도 들었다니까. 뭔가 씁쓸하기는 합디다. 아, 오해할까 봐 하는 소리이기는 한데 혜진 누님이 돌아온 게 아쉽다는 게 아니요. 그냥 형님이랑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게 씁쓸한 거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혜진 누님도 수고 많았다니까.
-정하얀 님. 이제….
-아… 으응….
-괜찮으십니까? 하얀 씨?
-…….
-정하얀 님은 괜찮으실 거예요. 그렇죠?
-응….
별로 괜찮아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내려오지 않았다면 상실감이 덜 하지 않았을까. 본래 줬다 뺏는 게 가장 짜증 나자너.
정하얀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상황이 그렇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본래 감정이 들쭉날쭉 변하는 만큼 순간적으로 우울한 감정이 몸을 덮친 것이다.
천천히 조혜진의 몸에서 그녀를 떼어낸 한소라가 어깨를 두드려 주기가 무섭게 부르르 어깨를 떨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으그윽 하는 억지로 눈물을 참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와 한소라도 많이 당황한 것 같다.
한쪽 손으로 눈물을 연신 닦고 있었고 사실 빠른 시일 내에 멘탈이 회복될 것 같지도 않았다.
-정하얀 님….
-…….
-힘… 힘내세요. 곧 돌아오신다고 하셨으니까요. 만약에 안 내려오셔도 마법의 신이 되시면 되죠. 저, 저도 마법의 천사로서 최선을 다할게요.
-그… 그래?
-네. 마법의 천사 한소라….
‘부끄럽지도 않나 봐.’
확실히 부끄러워하고 있기는 하다. 물론 조혜진보다 더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한 차례 미션을 끝낸 이후에도 부끄러움이 사라지지 않는 얼굴, 잠깐 동안 옆을 바라본 이후에는 다시 한번 입을 여는 것이 보인다.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게 있기 때문이겠지.
-덕구 씨.
-…….
-잠깐 하얀 씨와 함께 바깥에 이상이 있는지 확인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믿어주쇼.
박덕구가 정하얀과 한소라를 챙기며 밖으로 나간 이후에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는 인물에게 입을 열었다.
---끝났군. 제기랄….
-…….
---이 미친… 제기랄… 이건… 이런 건… 그 개자식은 지금 보고 있나? 여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건가? 제기랄… 제길! 이기영 개자식… 이… 사기꾼 자식.
-죄… 죄송합니다.
---네게 사과를 받고 싶지는 않다. 너 역시 나와 같은 상황일 테니. 제길… 제기랄… 그림… 그림자의 영웅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단 말이다. 나는 단지….
-…….
고개 들어. 혜지나. 왜 죄인처럼 그러고 있어. 우리는 잘 못 한 거 없어. 내가 부끄러워? 진짜로 부끄러워? 그림자의 영웅이 부끄러웠냐구….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게 이런 말을 토로하는 것도 우습군. 제길… 아무튼 간에 나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도 연관되고 싶지도 않다… 내 생각대로 된 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제길… 그래. 게임… 아니, 전쟁은 너희들의 승리다. 나는 이제….
-저….
---너와는 꽤 즐거웠다고 말하고 싶군. 이름이 조혜진이라고 했던가… 괜찮다면 마지막이니만큼 차 한 잔은 더 즐기고 싶군. 조금만 기다려 주겠나.
-저… 정말로 죄송합니다.
---뭐?
-부길드마스터가… 이걸… 아직은 끝낼 수 없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전해드리자면… 기왕 이렇게 된 거….
“일 좀 하고 가라고 빨리 말 좀 해요. 연방 건 좀 같이 해결하자고 합시다.”
---뭐?
고개를 살짝 돌리자.
가면을 쓴 은발의 남자가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주제도 모르는 벌레들이 기어오르고 있구나.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 있는 붉은 전신의 모습도 말이다.
-그거 나한테 한 소리야?
[신화 등급의 던전 빛의 아들이 희생된 대륙의 메인 이벤트, 역병 군주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