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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36화 (827/1,590)

< 836화 마지막 (69) >

‘보낼 땐 보내더라도 이건 좀 해결해 주고 가야지.’

희라 누나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누나라면 어둠의 역병 군주고 나발이고 뚝배기를 산산조각 내줄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전쟁이라는 게 둘을 케이지 안에 가둬두는 게 아니지 않은가. 아마….

‘생각보다 까다로울 거고….’

난이도로 따지자면 꽤 높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대충 보기에도 역병 군주 쪽은 어느 정도 스펙업이 끝나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정확히 빛의 아들이 희생된 대륙의 던전 시스템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교국혁명과 악마 소환사로 경우를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상향 조정을 거친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저게 어떤 타입인지에 따라 공략 난이도나 방법이 달라질 가능성도 있겠지.

교국혁명에 등장했던 혁명 추기경의 경우에는 제대로 된 의사를 전달할 수 없었던 NPC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대륙 던전의 디자인에 어마어마한 신성을 들였을 테니 비용 절감 측면에서 그런 방식으로 디자인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교국 혁명의 이벤트는 오스칼과 병사들이 메인. 이벤트의 큰 축을 담당하는 이벤트 보스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말 그대로 혁명추기경은 단순히 정해진 행동 패턴에 따라 밟고 움직이는 NPC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거다.

진청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지혜 누나가 어떻게 녀석을 데리고 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녀석은 분명히 과거를 기억하며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고 독특한 공략 방식 역시 탑재되어 있었다.

당연히 본래의 진청에게 저 게임으로 현실의 목숨 줄을 쥘 수 있는 기능 따위는 없다.

종류는 조금 다르지만 녀석도, 판 속의 정진호나 이토 소우타처럼 상향 판정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이건 이야기니까.”

이미 과거로 묻힌,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야기였지만 본래 이야기라는 건 과장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종류의 보정을 받기도 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둠기영이 상향 판정을 받으면 받았지 결코 하향 판정을 받지는 않았을 거라는 게 이쪽의 생각이었다.

“중요한 건 저 안에 들어 있는 게 어떤 거냐는 거겠죠. 군사님이야 영혼을 데려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한 사념체 있을 수도 있어요. 군사님 본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원본이라는 인식이 있기는 합니까?”

---원본이라는 인식이야 있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정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 저 역병 군주의 안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고민하고 있는 건가.

“사실 별로 상관은 없지만 궁금하기는 합니다. 역사 속에 기록된 역병 군주는 아주 냉혹하고 카리스마 있고 무자비하기도 했거든요. 좀 멋있기도 했고… 뭐 그런 설정이었습니다.”

-설정?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전달해 주세요, 혜진 씨. 잠깐 말실수 나온 거니까.”

---그러니까 지금 저게 만들어진 인격이라는 건가.

“아마 확률이 크다고 느껴집니다.”

---구태여 걱정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만들어진 인격은 만들어진 인격일 뿐이다. 대륙을 관장하고 있는 시스템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에 대해 알 수 없지만 저게 조잡한 데이터 덩어리라면 걱정할 필요도 이유도 없을 터.

“원본과 비슷할 수도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지금 당신이 운영하고 있는 게임판,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그거 단순한 게임이라기에는 너무 원본같이….”

---미친놈.

“지혜 누나가 만들었어요.”

---미친 연놈들.

“저희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스템을 이용해서 만들어냈지만 신성을 이용하니 제법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오더란 말입니다. 원본과 흡사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거예요. 사실 예상한 게 아니기는 합니다. 근데 이걸 보세요. 정말로 원본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기가 차는… 미친 연놈들이로군.

“왜 그래요? 자기도 흥미롭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노을빛의 검사 같은 오류도 간혹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 오류를 제외하고는 이 데이터 덩어리는 완벽에 가깝습니다. 스스로 사고할 수도 있고 진화하기도 합니다. 아주 잘 만들어진 인공지능이라고 봐도 무방해요. 우연의 결과물이라고 하지만 단순한 데이터 찌끄래기로 판단하는 건 이 시스템을 만든 누나에 대한 모욕이라고요.”

내 말을 전달하던 조혜진이 잠깐 멈칫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일단은 말을 전달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그럼….

“네. 어쩌면 지금 역병 군주 안에 들어가 있는 게 그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인격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여러 가지가 거세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 봐야 시스템 덩어리이기는 하지만 덤기영은 여러모로 위험했으니까.

실제로 세라핌에게 한 방 먹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말이 필요 없는 거고.’

일개 데이터 덩어리가 외신에게 한 방 먹였다는 것은 위업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아무튼….’

모든 인격과 기억을 날려 버리고 베이스가 되는 정신에 둠기영을 집어넣었다든가. 혹은 지혜 누나와 따로 계약을 맺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지. 녀석을 꼬드기는 과정에서 계약을 맺고, 잔가지를 쳐내 완전한 역병 군주를 연기할 장기 말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거다.

누나는 제법 둠기영을 좋아했으니까.

‘효율적으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였을 테니까.’

나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진짜 네임드 개체를 만들려고 생각했을 테니 조금 더 정성을 쏟는 게 맞다고 생각했겠지.

어떤 거로 놈을 꼬드겼든 간에 아마 철저한 장기 말을 연기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연기가 아니라 놈은 자기 자신을 정말 역병 군주로 여기고 있을 거야. 잔가지는 전부 다 쳐냈으니까.

더미월드의 기억 따위는 스스로 쳐냈을 거다.

‘계약 내용은 뭐였을까.’

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뭐, 더미월드나 그곳에 사는 주민들의 처우 문제겠지.

누나가 약속을 지킬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고, 솔직히 저게 진짜 덤기영을 베이스로 다른 인격을 때려 박은 무언가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단순 가정일 뿐이고… 하지만….

‘위험하기는 해.’

던전의 네임드 몬스터 판정을 받았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루시퍼와 누나가 과장된 역사를 기반으로 설계한 육체에 제법 쓸 만한 데이터 덩어리가 들어간다면….

‘악몽이자너.’

교국과 라이오스의 소식을 전해 들은 연방 전쟁의 수뇌부들의 눈에 긴장감이 감돈다.

오만한 눈빛으로 더러운 벌레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둠기영의 모습은 확실히 클래스가 느껴지기는 한다.

녀석의 뒤에 도열해 있는 거대한 악마 군단과 바로 옆을 지키고 있는 역병 드래곤. 리무르아나 로노베, 다른 악마 사천왕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도노반을 비롯한 짜가 악마들이 시야에 비친다.

꽤나 먼 거리에서 저들을 바라보고 있는 병사들이 붙잡은 창이 떨리고 있었다.

이전의 전투를 기억하고 있었던 연방의 모험가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병 군주라는 이름에 걸맞게….

-차희라 님.

-보고.

-전투가 불가능한 지역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역병에 오염된 지역으로 어떤 방법으로도 정화가 불가능합니다. 고위급 모험가들로 역시 한 시간 정도 버티는 것이 전부이니….

-사실상 못 쓰는 전장이라 이거네. 다음.

-역병 군주가 소환한 유령들이….

-따로 대응팀 만들어서 처리해. 연방 시민들의 대피는?

-일단 말씀하신 대로 연방 시민의 대피를 최우선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위급 사제와 쓸 만한 연금술사들 전부 차출해 감염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별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숫자가 숫자인 만큼 인력이 부족합니다.

-네 생각.

-본대에서 인력을 충원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전선 유지가 힘들어질 수는 있지만….

-그럼 그렇게 해.

-진심이십니까?

-전쟁터는 빠르게 비워둬야지. 거추장스러운 것보다는 이게 나아. 다른 곳에서 온 연락은 있나?

-없습니다.

-사흘 안에 진입할 준비를 끝낸다.

-…….

-사흘 안이야.

-최선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맵 자체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확실히 상향 판정을 받기는 한 모양인지, 약간의 유령들만 움직일 수 있었던 이쪽과는 다르게 척 보기에도 많은 규모를 움직일 수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역병에 오염된 지역까지 생성할 수 있단다. 저 정도면… 사실상 리디자인됐다는 말이 잘 어울린다.

희라 누나야 뭐 본인 스타일 그대로 병력들을 운용할 거라는 게 그대로 느껴진다.

사실 효율적이기도 하다. 저게 가장 누나답기도 하고….

사람을 너무 잘 믿는 게 흠이기는 하지만 믿을 사람과 믿지 못할 사람을 구분하는 능력이 탁월하기도 하니….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우리 회귀자보다 더 이상적인 군주상에 가깝다.

구태여 단점을 찾아보자면 차희라 본인이 집단에 억압되어 있다는 것.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모이는 종류의 지도자가 있다.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 최영기 녀석이 말한 것처럼 은혜를 입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차희라의 이름과 행보에 끌려서 찾아온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축복받은 재능이지만 그녀에게는 집단이 쇠사슬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녀는 자기 사람들을 버릴 수 없다. 김현성이 차희라를 재본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그녀는 대륙의 온전한 멸망을 받아들일 수 없거든.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한 거지.”

---말하지 않았나. 나는 더 이상….

“이건 부탁이 아니에요. 군사님. 반협박입니다. 그림자의 영웅이 되셨으면 그림자의 영웅 같은 행보를 걸으셔야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리고 왜 이러실까. 군사님도 솔직히 재미있을 것 같잖아요. 찐막으로 게임 한 판 더 해본다고 생각하세요.”

---…….

“이번에는 진짜 재미있을걸.”

---…….

“진짜로 재미있을 텐데. 기왕 하는 거 즐겁게 합시다. 어차피 군사님은 그림자 영웅이니까. 다시 한번 스크린 무대 밟지 않게 배려해 드릴게. 여기는 희라 누나가 주인공인 것 같거든.”

---제길….

이 새끼 고민하네.

더 이상 연관되는 건 최대한 지양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원래 게임이라는 게 그런 법이 아니겠는가.

막판 하고 싶어지면 찐막 하고 싶어지고 찐막이 끝나면 찐찐막이 하고 싶어지고.

겸허히 본인의 마지막을 받아들이고 싶어 했으니 가기 전에 한 판쯤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게다가 상대가 역병 군주래자나. 게이머로서의 혼이 불타오르지 않는 게 이상하지.

---뭘 도와주면 되지?

“전반적인 병력의 운용과 보급이랑… 아니,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군사님이 한다고 생각하세요. 물론 결재는 제가 첫 번째로 하고 마지막에는 희라 누나한테까지 결재받아야 할 겁니다. 말만 잘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군사님이 원하는 대로 할 수도 있구.”

---28시간이다.

“네?”

---28시간 안에 출정 준비를 끝내놓는 것으로 하지. 조혜진. 지금 당장 저 전초기지에….

-네. 연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아한 얼굴로 여신의 거울로 얼굴을 비치는 차희라가 눈에 보인다.

---나다. 28시간 안에 출정 준비를 끝내겠다.

-…….

---지금 당장 내가 알아야 할 데이터들과 잡다한 일을 처리해 줄 부관들을 연결해라.

‘이 새끼 계속 존댓말 하더니 바로 반말 박아버리네. 완전히 자기를 놨자너.’

차희라의 입장에서는 조금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모르는 회선으로 연결이 들어왔더니 그림자의 영웅 진청이 정보를 요구하니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하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는 모양. 이윽고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차희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맡기지. 통신 채널 연결해.

---어떻게 하고 싶나. 원하는 게 있나?

-둥지로 갈 거야.

행선지가 결정된 모양이다.

‘리무르아 없는 리무르아의 둥지네.’

당시 총지휘관으로 있었던 차희라가 병력을 퇴각시킬 수밖에 없었던 장소였다.

-그런데 부길드마스터.

“네?”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뭐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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