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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37화 (828/1,590)

< 837화 마지막 (70) >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요?”

-아니… 그저 괜찮으신 건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너무 담담하게 이야기했나.’

“트라우마가 다시 일어날까 봐 그래요?”

-네… 여러 가지로.

“물론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겨내야죠. 당시에 제가 일으킨 일들을 보는 건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막아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조금 쉬는 게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전부 알고 있어요. 마주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얘는 갑자기 왜 이래.’

무척 걱정스러운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18시간이라는 커트라인에 맞추기 위해 붉은용병과 연방의 부관들과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진청을 한 번 바라본 이후에는 다시 한번 창을 꽉 쥐는 모습.

내가 생각해도 너무 별것 아닌 것처럼 얘기했다는 판단이 선다.

역병 군주가 끝난 뒤 길드원들에게 보호조치의 이름을 빙자한 감금을 당했다는 걸 떠올려보면….

‘이해가 가기도 해.’

아무래도 조혜진이 너무 편해졌기 때문이리라.

대충 말을 해대기는 했지만 조금 더 꿋꿋한 포지션을 이어나가는 것이 조금 더 설득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슬프지만 빛기영은 자신이 저지른 일들과 과거의 죄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거야.

이미 로렌과 베니고어가 이쪽의 죄를 사해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가 짊어져야 할 죄책감은 사라지는 것은 아니거든. 지금 와서 그거 주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까.

-정말로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저 부길드마스터가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

-그냥 기우에 불과했으면 좋겠습니다만… 부길드마스터가 제 몸으로 들어왔을 때….

“아, 그러고 보니 궁금하네요. 강림했을 때 대상자의 혼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었는데.”

-많이 느끼지는 못했습니다만 어째서 강림이 신의 축복이라고 불리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았습니다. 조금이나마 부길드마스터에 대해 알 수 있었으니까요. 부길드마스터가 계신 곳이나 상태가 어떤지 따위를 대략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길드마스터가 정말로 신이 되신 것이 맞다면 아마… 저는 신의 대리자니…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부길드마스터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뭐… 그건 아마….”

-저는 거기가 어떤 곳인지, 정확히 부길드마스터가 어떤 곳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혜진 씨의 영혼? 영혼이라고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 뭐 혜진 씨의 영혼이 격리되어서 그렇게 느낀 모양입니다. 여기 디아루기아도 있고, 베니고어랑도 잘 지내요. 로렌도 가끔 놀러 오기도 하고. 제 상태에 대해서도 제가 제일 잘 알아요. 항상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겁니다. 솔직히 아까 전에는 조금 혼란스럽기는 했습니다만….”

-조금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제 생각에는 부길드마스터가 감정들을 억누르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정확히 설명을 못 하겠지만… 좁은 상자 안에 꾹꾹 눌러 담는 것처럼….

“확신할 수 있어요?”

-아뇨. 하지만 저는 지금 이 상황이 좁은 상자를 터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저 일이 있고 나서 부길드마스터가 힘들어한 걸 생각해 보면….

‘사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

힘들어하는 연기를 하기는 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시바, 사람을 2주 동안 감금을 했는데 어떻게 안 힘들었겠어.

바깥이랑 통하는 정보도 완전 차단해 버리고 방문도 바깥에서 걸어 잠가 버리는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니까요.”

-굳이 부길드마스터가 아니어도 됩니다. 진청 군사님께서 힘을 빌려준다고 하시니 조금은 쉬는 편이 나을 거예요.

“아니….”

-솔직히 보여드리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뭐가요.”

-악마의 힘에 휘둘리고 정신이 세뇌당한 채로 인류의 적이 변해버린 저걸… 네가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뭐.”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다릅니다. 저건 부길드마스터가 아니었어요.

‘둠기영이 진짜 충격적이기는 했나 보다.’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니 내가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해낸 모양이다.

‘얄궂은 재능이야. 진짜.’

마치 악의 화신과도 같은 모습, 감정이 없는 것 같은 눈,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내려다보는 듯한 표정.

가면을 쓴 채로 악마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것의 모습은 내가 봐도 소름이 돋는 모습이었다.

얘가 이 정도니까 다른 애들이 공포에 떨지. 그것은 상징성이기도 했을 것이다.

인류의 빛이 어둠에 완전히 물들어버렸다는 공포는 다른 무엇보다도 더 상징적이다.

조혜진뿐만이 아니라 이미 많은 이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제발… 제발 죽여줘. 제발… 제발 죽여… 달라고….

-으어… 아… 아파… 아파요. 사제님… 괴롭습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사제님… 너무 괴롭습니다. 너무….

잘못된 곳에 발을 들여 역병에 감염된 이들의 모습은 참혹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플레나… 이제 괜찮으니… 이만 돌아가.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는 거 알고 있잖아.

세포가 썩어들어가고 있다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몸을 구성하는 것들에 끊임없이 대미지를 넣어주고 있는 종류였고 고위급 사제들이 회복 주문으로 육체를 안정시키는 것보다 무너지는 것이 더 빠를 정도였다.

심지어….

‘스스로 죽을 수도 없겠네.’

아주 오랫동안 끊임없는 고통을 주도록 설계되어 있는 종류의 역병.

아마 계속해서 역병이 몸을 좀먹는다면 마치 방사능에 피폭된 사람처럼 변해버릴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들의 상태가 그나마 온전해 보이는 이유는 고위급 사제들이 이들의 몸을 억지로 돌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몸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대미지를 입고 회복되고, 대미지를 입고 회복되고, 대미지를 입고 회복된다.

유혈이 낭자한 장소는 아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거대한 신성력이 쏟아져 언뜻 보면 신성해 보이기까지 한 장소.

자리한 이들이 계속해서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게 아이러니해 보일 정도로 환한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이런 걸 보면 충격받지 않을까 걱정해 주는 것도 이해가 가자너.’

교대로 신성력을 공급하고 있는 사제들의 몸 역시 감염된다.

불안한 얼굴로 본인의 팔뚝에 생긴 반점들을 바라보는 한 사제가 눈에 들어온다.

고위급 사제의 면역체계까지 뚫어버린 것이리라.

내색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본인이 모시는 신의 이름을 조용히 읊조린 이후에는 다시 한번 신성력을 공급하고 있었다.

격리된 쪽 바깥에 있는 감염자들의 가족과 친구들은 자신들을 들여보내 달라고 울부짖고 있는 것은 덤.

일반 병사들이 최대한 통제하고 있었지만 저들이 굳어 있는 얼굴을 보니 쟤네들 역시 마음이 편치 않은 것 같다.

‘지옥도가 따로 없어. 솔직히 결단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감염된 이들은 한둘이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감염자들을 끌고 간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는 않다. 이미 전투요원으로 쓸 수 있는 이들도 아니었고….

사실 악마군단과 전쟁을 벌이는 데 소위 사제 하나하나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떠올려보면 여기에 투입되어 있는 사제들은….

‘아깝다는 거지.’

장담하건대 현재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 이 선택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 한 트럭은 될 것이다.

명령이 내려왔으니 따르겠지만 충언 한 발 장전하고 있는 놈들이 꽤 되겠지.

이곳의 지휘관이 차희라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무장을 걸치고 막사를 빠져나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붉은용병의 부관들을 데리고 향하고 있는 곳은 감염자들이 있는 구역.

‘행보가 정치인이야.’

출전하기 전에 감염자들을 한 번 만나려고 하는 거겠지. 위험하다고 만류하는 놈들도 없다. 차희라가 가겠다고 했으니 막지 않는 것이다.

-제발… 들어가게 해주세요. 제발….

-동생이 무사한지만 확인하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가까이 오시면 안 됩니다. 물러서세요!

-부탁드립니다!

-제기랄! 물러서라는 말 안 들려!

전선에 있어야 할 차희라가 모습을 드러내자 인파들이 몰려드는 것이 보인다.

‘선거 나가는 거 아니자너.’

여기저기에서 커다란 소리가 튀어나오고 있는 모습, 조용히 차희라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

-지금 본부에서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감염자들이 심각한 상태가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이들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본부에서 마련한 안전한 장소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감염자들의 신원 파악이 끝나는 즉시 대책본부에서 그들의 상태를 전해드릴 것이며… 짧은 시일 내에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걸….

-시민 여러분들은 부디 협조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병사들에게 협력해 주십시오.

-협력해 주십시오!

-협력해 주시길 바랍니다!

-협력해 주십시오!

기다렸다는 듯이 깃발을 들어 올리며 인파들을 통제하는 병사들이 눈에 보인다.

차희라는 계속해서 신성력이 떨어지는 장소에 진입해 감염자들을 살피고 있다.

조용히 그들을 격려하거나 위로의 한마디를 건네는 것뿐이었지만 저들에게는 최고 지휘관이 이런 곳에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것이다.

저 역병이 차희라의 신체에 흠을 끼칠 수 없겠지만 그걸 모르는 이들은 더 감동하겠지.

몇몇은 분명 동기부여가 된 모양이다. 붉은용병의 길드원들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버텨라.

-네….

-며칠 안에 해결할 거니까.

-심려를 끼쳐… 드… 려… 죄송….

함께 온 부관들은 심지어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다.

-이렇게 계속 누워 있으면 근손실 오겠다. 새끼들아.

-…….

-…….

-조장… 정말로… 역… 병… 걸리면… 근손실… 옵니… 까?

-나도 몰라.

아니, 농담이 아닌가. 쟤는 마법산데 왜 근손실을 걱정해.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는다. 떡대들이 우르르 몰려와 누워 있는 떡대에게 농담을 던지거나 심지어 툭툭 치기도 한다.

보호구를 착용한 사제들이 그들을 만류하고 있었지만 도통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는다.

비명을 지르던 놈들까지 분위기에 취했는지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고 있으니 확실히 여기도 이상한 놈들만 모인 곳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서 시작했어도 재미는 있었겠어.’

-가자.

-네.

-네.

-네.

전선으로 향하는 전사들을 축복하기 위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진다.

누군가는 깃발을 들어 올리고 누군가가 북을 두드렸다.

아마 이때 즈음이었을 것이다.

본대가 출정을 12시간 남기고 있는 이 시점이 역병 쓰레기가 전선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인식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벌레치고는… 나쁘지 않군.

그 말에.

공화국의 악마 소환 쓰레기 역시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자, 이제 어떻게 나올 테냐. 만들어진 가짜 놈.

아니, 이제 악마 소환사는 아니기는 한데….

원래 빌런들끼리 싸우는 게 조금 더 흥미진진하니까. 그냥 속으로만 그렇게 부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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