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5화 마지막 (78) >
녀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최고의 한 수였을 것이다.
과정은 조금 달랐겠지만 만약 내가 녀석이라고 하더라도 비슷한 짓을 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이벤트의 공략 조건을 완전히 숨겨버리고 모든 시선을 자신에게 쏠리게 만드는 것.
모든 게 블러핑이고 만들어진 각본이었다 이거지.
거만하고 오만한 표정도, 인간을 하등한 벌레들이라고 지칭하는 워딩도, 얻어맞으면서 애써 침착했던 것도, 라이오스에 떨어뜨린 것 역시 모두가 각본이었다.
확실히 이쪽을 매개로 디자인되었다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을 정도.
놈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대담했다. 여러 가지 보험을 들었고 자신이 가장 옳다고 생각한 타이밍에 주사위를 던졌다.
진청은 물론이거니와 조혜진까지 속여 넘긴 것을 보면 놈이 옳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실제로 결과가 말해주고 있으니까.
거대한 벨리알의 화신이 되어 커다란 검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에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당시 역병 군주의 이벤트에서 놈을 막아주던 베니고어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쪽이 넘긴 이벤트였으니까.
눈앞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던 역병 군주에게 온갖 신경을 쓰고 있던 사이, 저절로 스킵된 이벤트였으니까.
‘힌트는 있었을 거야.’
조건이 분명히 있었을 거라고.
당시에 없었던 감염지역이나, 역병에 감염된 이들, 따로 격리되어 있었던 환자들과 그들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 고위 사제들.
괴로워하는 가족들과 기도를 올렸던 사람들. 끊임없이 떨어지던 거대한 신성력과 대지의 정화를 위해 힘쓰던 교단.
‘그게 조건이었겠네.’
이 이벤트를 정석대로 공략하려고 했다면 아마 키는 그쪽이었을 것이다.
그쪽에서 모은 신성, 혹은 몇 가지 소규모 이벤트를 클리어하면서 이벤트에 쓸 수 있는 베니고어의 화신을 소환하는 키를 모으는 거지.
원래 게임이라는 게 그렇자너?
연계 퀘스트, 연계 퀘스트, 연계 퀘스트를 모두 클리어하면 마지막에 보상 촤르륵 나오는 거.
아마 놈도 비슷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쪽을 상대하면서 본인의 소규모 이벤트를 클리어 하고 있었다고 판단하는 게 맞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맞출 수 있나?”
조금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괜찮을지도 몰라. 본래 신성이라는 건 위기에 순간에 더 모이는 법이고, 아직 망한 건 아니니까.
“혜진아 감염구역이랑 감염자들, 그리고 거기에 있는 고위 사제들 중심으로 소규모 이벤트나 퀘스트 진행할 수 있는지 봐줘. 아주 작은 힌트라도 상관없으니까. 진청한테도….”
---제길.
‘이 새끼 자존심 많이 상했네.’
---…….
‘호흡곤란 오는 거 아니냐?’
변명거리는 있다. 놈은 이후의 이벤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역병군주의 마무리가 어땠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조건이 있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는지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
본인이 놓친 것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아마 다시 한번 농락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실컷 재미있게 치고받았다고 생각한 상대가 사실은 다른 걸 하고 있었단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또 속은 것이 된 셈이니 저렇게 분노하고 있는 표정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너만 속은 것도 아니야….’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캐치를 해냈어야 했다.
---멍청한 이기영 자식.
‘뭐?’
---수준 이하로군. 제길.
“엄밀히 말하면 님이 눈치챘어야죠. 메인오더 잡은 게 누군데 나를 탓하고 있어?”
---됐다. 지금이라도 수습할 방법이 있을 테니… 지금 와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겠지.
“아니, 의미 있는데? 의미 있는데? 누가 봐도 네 탓이지. 당신도 이벤트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라며.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눈치챈 사람이 전쟁놀이에 눈 돌아가서 재미있게 즐기셨으니… 일이 이렇게 된 것도 당연한 거 아닌가?”
---이벤트에 대해서는 네놈도 깨닫고 있지 않았나? 게다가… 네가 직접 겪은 일이다. 내가 죽은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천재 군사라면서요. 천재가 다 나가 뒈졌나 봅니다. 무슨 소리를 해봤자 네가 전쟁놀이에 정신 팔려서 일을 소홀히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내가 처리했으면 진작….”
---뭐?
조용히 상황을 전하던 조혜진이 테이블을 내려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진짜 그만 좀 해요! 진짜!
“…….”
---…….
-정신없으니까 제발… 그만 좀 하세요. 부길드마스터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직접 하세요. 군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꼭 그렇게 서로 싸우고 물어뜯어야 직성이 풀리시는 겁니까?
---이기영이 먼저….
-…….
---알겠다. 그만하는 것으로 하지… 제길… 내가 추한 모습을 보였군. 제길… 내가 왜….
“이제야 자기 잘못이라고 고백하는 거 봐라. 혜진아. 한마디 더….”
-그만하라고.
“…….”
-그만해. 이제.
“뭐… 그러지 뭐.”
-알프스를 보냈습니다.
“아….”
-부길드마스터의 말처럼 조금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금방 따라갈 수 있을 겁니다. 아마 그녀라면….
“나쁘지 않은 픽이네요.”
-네.
같이 다니는 멍멍이가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으니 금방 피드백이 올 것이다.
조혜진도 우리가 늦게나마 이벤트를 따라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어쩌면 생각보다 더 빠르게 결과물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석적인 방법의 공략이라면 혜진이가 나보다 나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처음 생성된 감염지역부터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현재 감염자들을 대상으로 늦게나마 조사를 시행하고 있고… 로렌의 신전이 가장 먼저 오염되었다는 제보를 중심으로 사건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부길드마스터와 군사님은 벨리알의 화신을 수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세요.
---그렇게 하지.
“얼마나 오래 걸릴 것 같아?”
-정확히 말씀드리기는 어렵겠지만 최대한 빨리 따라가 보겠습니다. 알프스? 네. 도착하는 즉시 로렌의 신전으로 향하세요. 좌표로 합류할 수 있는 파티를 보내겠습니다. 전투가 일어나거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곧바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3시간 정도.”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은 3시간 정도가 전부입니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지나게 되면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세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알프스가 흰둥이와 함께 그리폰에 내려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굳이 숨을 참을 필요는 없지만 사제들의 축복을 받은 이후에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감염구역으로 향하기 시작.
이미 모든 주민이 대피를 마친 폐허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조혜진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사실 걱정해야 하는 쪽은 알프스 쪽이 아니다.
---죽어라. 하등한 벌레들아.
거대한 검을 들어올린 벨리알의 화신이 더 문제지.
마치 거대한 탑이 떨어지는 것 같은 모양새.
진청은 정신없이 통신을 날리며 벨리알 레이드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약간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희라 누나.’
웃고 있는 얼굴.
-하하하하하하하하핫!
활짝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
“위험하면 곧바로 빠져나오라고 해. 혜진아. 내가 이럴 줄 알고 준비한 게 있거든.”
-네?
---…….
당연하지만 준비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내다본 척하는 놈이 승리자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원래 남은 공적 같은 건 먼저 먹는 놈이 이기는 거고. 사실 희라 누나 공적이기는 한데 한 수저 정도는 얹어도 괜찮잖아.
거대한 검이 떨어지고 차희라는 도끼와 대검을 교차해서 화신의 검을 맞딱 들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차희라가 밟고 있는 대지가 음푹 꺼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그녀가 든 도끼와 대검이 으득으득 소리를 내다 결국에는 부서져 버린다.
앗 하는 사이에 다시 양팔로 검을 붙잡은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으득으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가 갈리고 그 안에서는 피가 흘러나온다.
단순한 근력 수치로 커버할 수 없는 질량에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즐거워 보인다.
역병 쓰레기를 먹어버린 벨리알의 화신은 거대한 검에 더 마력을 들이붓고 있었지만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죽어라!!!
-이기는 건 나야.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라왔지만 차희라에게 대미지는 없다.
코로 팽 하고 핏물을 뱉어낸 이후에 조용히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 눈에 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뭐?
-이렇게 하면 제대로 싸울 수 있겠네.
---뭐… 뭐… 야… 너는… 너는… 도대체….
그녀의 등에서 검붉은 색의 빛이 뿜어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
날개라고 하기에도 마력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것은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차희라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누나… 사랑해.”
역병 쓰레기가 벨리알의 화신을 몸에 담은 것처럼 차희라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검붉은 빛도 점점 형태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몸을 부풀리며 착실히 갑옷의 형태를 띈 무언가가 만들어진다.
벨리알의 화신이 검을 휘두르자 붉은 갑옷의 전신은 한쪽 팔을 들어 검을 막으며 다시 한번 덩치를 키운다.
녀석과 덩치가 비슷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에 붉은 전신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이 괴물… 괴물 년….
-쉽네.
마치 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
거대한 모습의 벨리알과 베니고어가 몸을 부딪쳤을 때처럼 벨리알의 화신과 붉은 전신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은 압도적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한 번씩 검을 부딪칠 때마다 대지를 울리는 굉음이 들려온다.
너무나도 쉽게 주변이 폐허로 변한다.
어떻게 저런 걸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저거 김현성도 할 수 있는 건가. 역병 쓰레기가 실제로 벨리알의 화신을 몸에 담은 것은 아니니까.
아마 가능하겠지? 정확히 말하면 신성으로 몸을 감아 모양을 만들어낸 거지. 거기에 이벤트로 시스템 판정 좀 받고… 능력치 상향 판정 좀 받으면….
말은 쉽지만 저런 일련의 과정들이 쉬운 것은 아니다.
놀라운 것은 희라 누나가 한 번 보고 저걸 따라 했다는 것.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신성이 쌓였다는 걸 이해했던 건지, 고급 마력 운용으로 정확한 형태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희라는 자신의 몸 안에 자신의 화신을 담았다.
불안정하지만 그 모든 과정은 인간이 이룬 업적이라기에는 믿겨지지 않아 나도 모르게 눈을 비비게 했다.
붉은 용병들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니, 저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연방의 시민들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광경을 비상식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붉은 전신. 붉은 전신이다.
-정말로… 붉은 전신이야.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말도 안 되는 전투로군… 정말로… 이게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광경인 건가.
-차희라 님….
콰드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당연히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광경이지.
여기서는 한마디 더 얹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계획했던 대로네요.”
---…….
“보험을 넣어놓은 보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군사님.”
---…….
지랄하지 말라는 눈빛이었지만 원래 뻔뻔한 놈이 이기는 법이지.
“원래 진짜 소중한 패는 아군한테도 숨겨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