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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46화 (837/1,590)

< 846화 마지막 (79) >

악마 소환 쓰레기의 힘을 빌린 것은 어디까지나 이쪽이 진짜 의도를 숨기기 위함이었다는 설정이 괜찮을 것 같다.

괜스레 턱을 추켜올리고 이죽거리는 표정을 보여주자.

어차피 악마 소환 쓰레기에게는 내 얼굴이 보이지 않겠지만 이런 건 분위기와 몰입감이 중요한 법이 아니겠는가.

“모든 게 예상대로였네요.”

-…….

“모든 게 예상대로였습니다. 혜진아, 빨리 전해 줘.”

-…….

“아… 제발. 평생의 소원이야. 진짜.”

-모든 게… 예상대로였습니다.

“지나치게 넓은 범위의 감염구역이나 이전에 없던 특수한 상황들을 생각해 보면 눈에 빤히 보이는 이야기죠. 뭐 딱히 공화국의 군사님을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군사님 말씀대로… 군사님은 이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하… 하하 굳이 군사님을 탓하지는 않겠습니다.”

---…….

“어차피 시선 끌기. 딱 그 정도가 군사님의 역할이었으니까… 진짜는 이쪽이었다 이 말입니다. 베니고어의 화신을 소환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저 역병 쓰레기가 예상하지 못하는 한 수가 필요했습니다.”

-정말… 입니까?

“모든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이 컨트롤 하려고 했던 녀석입니다. 베니고어의 화신을 소환한다고 한들, 아마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놨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몇 가지 오차가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만… 결과에 착오는 없습니다. 모든 건… 이 천재가 설계한 그대로….”

---어처구니가 없군.

표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애초에 개소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았지만 내 말이 사실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얼굴이었다.

1퍼센트 혹은 2퍼센트 내외이기는 했지만 아주 작은 의심을 심어 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여러 번 뒤통수를 맞아왔으니 설득력 없는 개소리가 설득력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

굳이 여기서 더 뻐기지 않고 마무리만 지어줘도 악마 소환 쓰레기의 마음속에는 자괴감이라는 감정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붉은 전신과 거짓의 군주. 신화 속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싸움을 보세요. 훌륭한 장면이지 않습니까.”

거대한 붉은 전신과 거짓의 군주가 몸을 부딪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거짓의 군주는 잔뜩 몸을 부풀리며 검을 휘두르지만 붉은 전신을 물러섬이 없다.

건틀릿처럼 생긴 팔을 들어 올려 검을 튕겨내며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멀리서 보면 접전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밀리는 것은 거짓의 군주 쪽이라 판단해도 되지 않을까.

녀석이 팔을 뻗자 공중에서 거대한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

붉은 전신을 휘감으려는 기운은 내가 봐도 살벌해 보이기는 했지만 전신은 몸을 비틀어 그것을 받아낸 이후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긴다.

---제길… 넌 도대체… 뭐야… 넌 도대체 뭔데!! 여기 나타나서 나를….

-차희라.

---제길!! 제기랄!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다. 네 정체가 뭐냔 말이야. 제길! 네놈… 정말로 인간인가.

-그거 이외에 다른 대답이 필요해? 나는 차희라야.

---…….

-인간이니 신이니 하는 것들로 나를 정의하지 마. 나는 차희라야.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년이… 감히… 감히… 모든 걸 망쳐? 내가… 내가 정말로 그런 걸 용납할 것 같으냐. 갑자기 끼어든 불순물 따위한테….

-…….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갑옷을 입은 전신의 주먹이 놈에게 틀어박혔다.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인간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존재들의 싸움은 확실히 비현실적이다.

움직이는 질량 자체가 달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놈들의 움직임이 조금은 느린 것처럼 보인다.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를 때마다 폐허가 튀고 서로가 몸을 부딪칠 때마다 대기가 떨린다.

마치 하늘이 찢기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벨리알의 화신이 휘두른 검에는 구름이 갈라진다.

하지만 초조한 것은 녀석 쪽이다.

‘알고 있을 거야.’

시간이 끌리면 끌린 만큼 자신이 불리해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 만무.

알프스의 흰둥이가 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고 진청은 어떻게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베니고어 화신 소환 퀘스트를 거침없이 밟아 내리고 있다.

본인이 숨겨 놓은 패로 이미 끝을 보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놈에게 이로운 상황이 아닐진대, 상대는 계속해서 힘을 얻어가고 있다.

차희라가 보여주는 모습 자체가 이미 인간과는 거리가 벌어진 만큼 계속해서 신성이 쌓인다는 건 이미 예정된 사실이고….

“뭐… 사실상 여기도 게임 끝이라는 겁니다. 더 이상 구경하는 게 놈한테 실례가 될 지경이에요. 시선 좀 돌릴까요? 군사님도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

이 새끼 말 안 듣네.

그 누구보다도 차희라가 지기를 원하는 모습은 확실히 악마 소환사의 그것. 하지만 반전은 일어날 리가 없다.

---나는 질 수 없다. 이런 곳에서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나는 네놈과 등에 지고 있는 것이 달라.

-…….

---걸고 싸우는 게 다르다 이 말이다.

-가치에 우선순위를 매기지 마. 멍청한 새끼. 네가 들고 있는 것만 무겁다고 생각하지 마. 증명하고 싶으면 싸워서 이겨. 원래 싸움이라는 게 그런 거야. 간단하잖아. 서로가 들고 있는 가치를 두고 싸운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뭘 걸고 싸우는 건 너뿐만이 아니야.

---나는… 나는 내 모든 것을 걸고, 내 모든 것을 지키고, 내 모든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싸운다. 네년은… 네년은 도대체 무엇을 걸고 싸운단 말이냐. 단순히 전투에 미쳐 발광하는 주제에… 그런 주제에!!

-내 긍지.

---뭐?

-내 긍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갑옷의 전신이 들어 올린 도끼가 벨리알의 화신의 목을 내려치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마력이 흐트러진다.

벨리알의 화신이 그 형태를 잃고 역병 쓰레기는 추한 모습으로 피를 토하며 땅바닥에 뒹군다.

차희라 역시 다르지 않다. 익숙하지 않은 전신의 모습이 다소 무리가 가기는 했는지 그녀답지 않게 조금 지친 것만 같다.

하지만 눈빛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자신의 긍지를 위해 싸운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녀의 눈빛은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맞아.’

매번 했던 생각이지만 27군단 소환사태와 역병 군주 사건처럼 그녀를 무기력하게 만든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이 사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렸던 사건은 분명히 없었을 것이다.

당시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김현성이 노을빛의 검사로 각성하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하나부터 끝까지 녀석을 위해 마련된 무대였으니까.

악마 사천왕 중의 하나인 도노반도, 역병 군주도, 심지어 벨리알의 화신이나 모든 전쟁에서도 그녀는 위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것은 그녀에게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좌절감을 심어줬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그녀의 자존심에 분명한 상처를 입혔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녀가 이 싸움에 자신의 긍지를 걸고 싸운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다.

-나는 내 긍지를 걸고 싸워.

그녀는 그녀의 긍지를 걸고 싸운다.

잃어버렸던 자존심과 자존감을 되찾기 위해서.

그녀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자신이 차희라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웃기지 마… 제기랄… 웃기지 말라고! 겨우 그딴 것 때문에….

‘이 새끼 많이 흥분하기는 했어.’

-…….

---긍지? 존엄성? 빌어먹을 년. 그딴 게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옳다는 걸 증명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제는 추해 보이기도 해.’

나다운 행동이 아니기는 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나다운 행동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저렇게까지 내몰린 적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잘 모르겠다.

녀석을 지켜주던 벨리알의 갑옷은 이미 없다. 맨몸으로 검을 들고 차희라에게 달려드는 모습이 우습게 느껴진다.

유령 몇과 뼈 방패를 들고 전면전에 나서는 모습은 누가 봐도 어색해 보인다.

애초에 전투 직군이 아니었던 걸 전투 직군으로 만들 수는 없었는지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놈의 모습은 위화감이 있다.

그래도 상향 판정을 받기는 받았는지 여러 가지 함정과 역병을 뿌리고는 있지만, 이미 밸런스가 깨진 몸은 이것저것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희라에게 계속 달려들고 있다.

마치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려고 하는 것처럼 넘어지고 쓰러져도 계속해서 달려들고 있다.

‘누나는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죠?’

긍지를 관철하기 위한 눈에 흔들림은 없다. 오히려 놈을 전사로 인정한 것 같지 않은가.

‘긍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

입술을 꽉 깨물고 마력과 마력이 부딪치고 신체와 신체가 부딪친다.

역병 쓰레기는 넝마가 된 몸으로 계속해서 어색하게 검을 휘두르며 달려든다.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 광경이기는 했다. 이미 승산은 없었으니까.

저렇게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는 게 이롭지 않다는 것 정도는 녀석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안 돼.’

나였으면 납작 엎드린다. 희라 누나한테 전사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 결과가 좋지 않다는 걸 의미하니까.

아군으로서 인정받는다면 또 다르겠지만, 적으로서 인정받는다면 결과는 냉혹한 죽음뿐이다.

‘왜 갑자기 그런 스탠드 잡고 자빠졌어.’

-너는 전사야.

‘데드 플래그 꽂았죠.’

---나는 전사가 아니야. 하아… 하아….

무의식중에 회피하는 솜씨가 제법.

-아니, 너는 전사야.

그걸 또 확실히 전사라고 단정 지어버리네요.

---나는 전사가 아니다. 나는 싸우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야. 나는 그저… 그저….

-어떻게 태어났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자신이 가치로 하는 것을 위해 발을 들였느냐 들이지 않았느냐가 중요한 거지. 넌 우리 자기가 아니야. 넌 누구지?

---역, 역병 군주… 나는… 제길… 나는 역병 군주다. 이 세상에 공포를 뿌리기 위해서… 너희 벌레 같은 것들을 짓밟기 위해 태어난 역병 군주… 역병 군주다.

-넌 누구야.

---나는… 역병 군주라고… 말하지 않았나.

-나는 차희라다. 너는… 누구지.

---나는… 나는….

-이름이 듣고 싶을 뿐이야.

---너… 너 같은 짐승에게 알릴 이름 따위는 없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차희라에게 향하는 놈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누나의 눈에 동정은 없다. 남아 있는 것은 존중, 자신이 가치를 되찾기 위해 죽어야 하는 대상을 위한 존중이다.

거대한 뼈가 차희라의 발밑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어디까지나 시선을 돌리기 위함. 유령도, 기괴한 촉수도, 모든 것도 시선을 돌리기 위함이다.

안개를 흩뿌리고 독을 흩뿌린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 만한 모든 요소를 모두 끌어다 쓰고 계속해서 시선을 돌린다.

결국에 닿는 것은 녀석이 휘두른 검. 차희라의 품 안까지 파고들어 휘두른 검.

차희라는 굳이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으로 이름을 듣지 못한 전사의 검을 받은 채로.

-유언은?

---부탁이 있다.

놈의 목을 그대로 꺾어버렸다.

-받아들이지.

---…….

-…….

---…….

[신화 등급의 던전 빛의 아들이 희생된 대륙의 메인 이벤트, 역병 군주가 클리어되었습니다.]

-이기영 너 이 개새끼. 너는 진짜 내려오면 뒤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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