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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48화 (839/1,590)

< 848화 마지막 (81) >

얘가 진짜 독기를 품기는 품었어.

“아, 진짜 이지혜. 이… 아… 진짜! 나빴다. 진짜로… 너무 나쁘다.”

---제발… 부탁입니다. 나를 다시 한번… 죽여….

-…….

악마도 손절할 거지 같은 설정. 이 누나가 정말로 인간은 맞는지 의심이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만약 누나가 죽었다면 나도 비슷한 짓을 하기는 했을 테지만 이 정도로까지 인간을 밀어붙일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이건 도를 넘은 잔인함이다.

‘도대체 노리는 게 뭐야.’

사실.

생각해 보면 뻔한 이야기. 굳이 의문을 던질 필요도 없었다.

김현성의 파멸.

재기가 불가능해질 정도의 완벽한 파멸.

다시는 검을 들게 하지 않게 하는 것은 물론 완벽하게 폐인으로 만들어버리려고 빌드업을 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현성이 다시 한번 이벤트 이기영의 목을 잘라버리는 모습을 촬영해 대륙에 뿌릴 수도 있고.

차희라나 정하얀 같은 이들에게 알릴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 행위 자체에서 고통을 얻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놈이 날 다시 한번 찌른다면 아마….

‘끝나겠지, 뭐.’

퓨즈가 끊긴 것처럼 파지직거리며 무너지지 않을까.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있다.

무너진 멘탈을 다시금 기반을 다지는 데에도 이미 많은 것을 희생했다. 다시 한번 무너진다면 복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정신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는 가관, 본인이 잘못 들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지만 이벤트의 내용에 변함은 없다.

중요한 것은 당위성이지. 어째서 김현성이 이기영을 다시 한번 죽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

지금까지의 이벤트와는 다르지만 커다란 그림을 외신전쟁으로 잡아두고 있다면 아마 그게 키가 될 확률이 높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현성 씨.

-…….

---그들이 다시 한번 돌아오기까지….

-…….

---다시 돌아올 겁니다. 더… 강하고 두려운 모습으로, 예언의 날을 막는 것은 불가능해요. 오직 제 죽음만이… 그들이 이곳에 당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클리셰 진짜.”

---이 위기를 헤쳐 나갈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제 피로써 그들을 막아내는 것뿐이에요.

‘그래. 이렇게 나와 줘야지. 나라도 이렇게 써 먹었을 거야.’

고전 판타지에서나 보던 클리셰.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한 성녀의 희생처럼 보인다.

물론 나는 이런 악마 같은 수법을 기용하지는 않겠지만, 만약 사용한다면 이렇게 써먹었을 것이다. 드라마틱하니까.

애초에 정말로 외신들이 다시 한번 찾아오리란 것에 대한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김현성이 선택해야 한다는 것, 선택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 녀석이 대륙의 친우 목숨을 저울질해야 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저건 진짜 친우도 아니고 뭣도 아니긴 하지만 이미 이 새끼는 누더기영을 이기영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부탁드립니다.

-말, 말도 안 돼….

---…….

-말도 안 됩니다….

‘뭐가 말도 안 돼. 그런 이벤트라는데.’

-제가… 제가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무슨 네가 용납을 안 해. 너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네가 죽여야 하는데 왜 용납 안 하면 어떻게 할 거야. 그리고 쟤 누더기영이야. 찐기영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방법이 있을 겁니다.

---다른 방법은 없어요.

누나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내가 김현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그는 진짜 제 모습이… 노을빛의 검사. 그는….”

근데 베라고 하는 게 맞는지 몰라.

지금 이 시점에서 김현성에게 누더기영을 죽이라고 하는 게 맞는 선택인가?

‘시바.’

놈이 진짜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사정을 설명한들, 그게 김현성의 귀에 들려올까.

저 몰골과 저 표정을 짓고 있는 놈한테 누더기영을 죽이라고 하는 게 정답인가.

사랑스러운 회귀자 이기는 했지만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망가질 것 같은 얼굴이었고 이미 고장 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애초에 베는 행위 자체가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이미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팔은 덜덜 떨리고 있고 검도 제대로 쥐지 못하고 있다. 낯선 차가운 감촉이 다시 한번 생각난 것이리라.

이쪽의 배때기를 꿰뚫었던 때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눈을 보면 아마 내 생각이 맞을 것이다.

‘거지 같네. 참.’

이것도 저것도 선택할 수 없게 느껴지기 때문에 오히려 짜증이 날 지경, 주어진 정보가 너무 부족해 상황을 살필 수밖에 없다는 게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외통수야.’

너무 절묘해.

‘만약 정말로 던전이 외신이나 그에 준하는 존재를 떨어뜨린다면….’

“막을 수는 있나?”

확신할 수 없다. 아니,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교국혁명이나, 악마 소환사, 역병 군주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 시스템도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퀘스트를 시행할 수 있는 인원은 선택받은 한 명이고, 돌이킬 수도 물릴 수도 없다.

너무나 간단한 퀘스트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섭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종류의 던전 디자인이나 이벤트 디자인은 리스크가 큰 만큼 리턴도 크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누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리스크가 거 다 죽어가는 누더기의 목을 치는 것이라면 리턴으로 돌아오는 게 얼마나 클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걸 노리고 만든 조건일 것이다. 김현성이 누더기의 목을 쳐도, 치지 않아도 이기는 것은….

‘누나라 이거야.’

물론 내 입장에서 그나마 좋은 선택은 김현성이 놈의 목을 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외신이 소환되는 것은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니까.

그걸 다시 한번 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이쪽이 상정할 수 없는 경우의 수가 무서운 거지.

누군가를 또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다시 찾아온다는 건 최대한 지양하고 싶다.

그런 상황이 찾아오는 걸 원하지는 않는다.

---대륙이 멸망하는 것을 막아주세요. 현성 씨.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대륙을 구해주세요.

‘이기영이라면 그런 말 하지 않을걸.’

-…….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도 죄송스러운 일이라는 거 알고 있어요. 힘드시겠죠. 하시고 싶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진짜라면 책임을 떠넘기는 일 따위는 없다. 대륙의 멸망을 막아달라느니 대륙을 구해달라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김현성이 그걸 알아들을 정도로 정신을 차린 것 같지는 않았다.

혼란스러움 이상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녀석은 무서워하고 있다.

자신이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이 찾아올까 봐. 다시 한번 본인의 손에 피를 묻혀야 할까 무서워하고 있었다.

---고통스럽지 않아요. 현성 씨. 저는 아프지 않을 겁니다. 힘든 일을 강요해 죄송합니다만… 부디 이 풍경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짜증 나. 짜증 난다고.’

애초에 저건 도대체 뭐야?

‘넌 뭐냐고.’

교국혁명의 이기영이 단순한 NPC였고, 역병 군주의 이기영이 더미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인격이라면 지금 저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역병 쓰레기처럼 무언가가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놈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만 같다.

눈물을 흘리고 감정에 호소하며 필사적으로 김현성을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단순한 NPC는 아니야.’

어쩌면….

‘누나야?’

가설은 없다. 하지만 저게 누나가 연기하고 있는 NPC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진다.

직접 저 인형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저걸 조종하고 있을 확률이 낮지는 않다.

위화감, 아까 전 처음 자신을 표정에서 봤던 위화감. 내가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에 대한 위화감.

‘누군가가 전달하고 있는 거야.’

누나가 아니라면 여단 애들 가운데 하나겠지 뭐. 꼬리를 잡기 힘들기는 하겠지만 위화감은 확실하니까.

괜스레 허벅지를 툭툭 두드려본다.

제대로 된 정답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누나가 준비한 판을 한 번 뒤집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느껴진다.

아직까지도 얼빠진 모습을 하고 있는 김현성에게 일단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검 넘겨요.”

-…….

“검 넘기세요. 현성 씨.”

-기영… 기영 씨? 어? 어….

---부탁입니다. 현성….

-기영 씨? 기영 씨… 제가….

“아, 검 넘기라고! 이 답답한 새끼야!”

-네?

“검 넘기라고! 검 넘겨! 검 넘기라고! 검 줘! 검 달라고! 버려 버리기 전에 빨리 검 내놔! 이 새끼야!”

-아….

“빨리 넘겨 이 답답한 새끼야!!”

-네… 네!

무의식이었을 것이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내가 선물한 검을 뽑아 누더기영에게 넘긴 것을 보니 확실히 무의식이 놈을 지배했던 것 같다.

‘가능할 것 같은데.’

저 NPC가 만약 인형이라면 내가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애초에 신체도 나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거고 누나나 여단 쓰레기들이 사용하는데, 나라고 사용 못 할 게 뭐가 있어?

고통도 안 느껴진다고 하고…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니 강림에 들어가는 비용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몸이 얼마나 버텨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최소한 김현성에게 죽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건 몰랐을 거야. 누나.”

몸이 하늘로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다.

한 번 느껴본 감각이기는 했지만 딱히 반갑지는 않은 감각.

격이 줄어드는 감각은 그중에서도 가장 불쾌하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기야 한다. 이렇게 만나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보기는 하자너. 그렇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멍청한 회귀자는 바보처럼 눈을 껌뻑거리며 그 광경을 바라본다.

뭐가 달라졌는지 놈이 깨달았을지 모르겠지만 나를 바라보는 금색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놈은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살짝 아래로 내렸다. 계속해서 흘러내리던 눈물이 턱을 타고 떨어진다.

자꾸만 끄윽 흐윽 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통에 제대로 집중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김현성은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현성 씨.”

“네… 오랜만입니다. 흐윽…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입니다. 기영 씨.”

활짝 웃는 모습.

어차피 곧 울게 될 테지만 아무튼 시야에 비친 것은 웃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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