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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54화 (84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54화

마지막 (87)

‘이 나쁜 새끼가 나를 버려둬?’

꾸역꾸역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괜스레 입술을 깨물게 된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눈을 걷어차 봤지만 화풀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옹졸한 모양으로 눈이 튀어 오른다.

“혼자 다 하시겠다고?”

아주 대견하시네. 그래.

그래. 솔직히 맞아. 대견하기는 해.

김현성과 가까워진 것, 녀석에게 회귀자라는 고백을 들은 것, 유대감을 쌓거나 녀석의 짐을 들어준 것은 좋았지만 그 많은 사건 이후에 내게 너무 의지하는 게 짜증 나게 느껴지기는 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짜증 나는 건 아니고 조금 아쉬웠다고 표현하는 게 어울릴 것 같다.

물론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가 항상 좋지 않다 보니 조금 소극적인 스탠드를 취하게 됐다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정도가 조금 심하게 느껴질 때도 종종 있었으니까.

“그래. 얼마나 대견해. 시바. 너무 대견해. 이렇게 또 대견할 수가 없어요.”

성장하기는 했어.

굳이 표현하자면 어느 정도 김현성이 주체적인 행동을 해주기를 바라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허락된 범위 안에서 주체적으로 움직이길 원했다는 거지, 허용된 범위 안을 뛰쳐나가는 걸 허락한 적은 없다.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굳이 하나하나 말로 정해줄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다쳤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린 건 이기영자치공화국에서는 엄연히 불법적인 행위.

무기징역 혹은 사형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행위였다.

그 무능력한 쓰로누스도 그렇게 개판이 난 상황에서도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

‘아직 정신 못 차린 거야.’

뭐가 더 중요한지 아직 정신 못 차린 거라구.

이런 순간에서 내 말을 안 들으면 얼마나 개판이 나는지 알고 있는데도 고집부리는 거니 내가 뭘 더 어떻게 하겠냐고.

한 번 더 후회하게 만들어줘야지. 그게 손절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엄연히 그게 내다 버리는 것보다는 낫다.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니 확실히 뭐가 터지기는 터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 실제로 김현성이 이곳을 떠난 이상 이쪽에서 뭔가 이상이 생기는 건 확실한 이야기다.

아마 차희라나 교국에서도 북부로 병력을 이끌고 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이걸 수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변화를 감지한 각 무력집단에서는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일은 이미 터졌고 돌이킬 수 없다.

현시점에서 내가 판단해야 하는 것은 이걸 어떻게 주워 담느냐다.

사실 생각할 거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정답은 간단했고, 지금 당장 내가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부분이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이 신체를 버리고 다시 위로 올라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계속해서 여기에 깃들어 있는 게 좋을까.

실시간으로 신성이 소비되고 있다는 건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이쪽이 대처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

일단은 곧바로 망원경으로 김현성을 바라보는 게 먼저.

정신없이 날아가고 있어 눈으로 좇기가 쉽지가 않다. 입술을 꽉 깨문 채로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다. 당연히 송수경한테 달려가고 있겠지.

그 와중에 미안한 마음은 있는지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지만 저건 악어의 눈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울어? 뭘 잘했다고 울어? 시바.’

-…….

‘악어의 눈물 줄줄 흐르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한다고 끝나는 거 아니죠?’

-정말로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은 하는 거 아니야.’

이만 시선을 돌려도 될 것 같았다. 다른 특이사항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송수경은.’

-송수경 님.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지지해 주신 덕분입니다.

-원하시는 것은 얻으셨습니까.

‘개짓거리하는 데 여념이 없고.’

녀석이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며 입을 여는 모습이 보인다. 굳이 왜 한쪽 눈을 감으면서 등장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아마 기분이라도 내고 싶었나 보다.

-네. 얻었습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의 눈. 조용히 녀석을 지켜보던 얼굴들이 환하게 빛나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모두의 얼굴에 경외심이 보인 것은 당연지사.

송수경으로서도 그 표정들이 퍽이나 만족스러웠는지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눈에 비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이후에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것만 같다.

저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이미 녀석의 주요관심사와 상당히 멀어지지 않았을까.

붉은색으로 얼룩진 손이 보였지만 스스로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

응당 얻어야 할 것은 얻었고,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어야 했던 것을 받은 것만 같은 태도였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는 표현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무가치하다.’

그래. 무가치하다고. 이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권력이나 누군가의 위에 선다는 것,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 모두가 바라는 이상이 된다는 것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무가치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본래 그런 가치를 좇는 놈은 아니었지만 몸 안에서 퍼지고 있는 기운이 그러한 것들이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리가 없다.

놈은 신의 격을 밟고 올라왔고 자신이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는 달라.’

혹은.

‘그분에게 어울리는 격.’

혹은.

‘인간을 초월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놈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올라온 게 아니었으니까.

-어떻습니까?

-연방은 정리가 된 듯합니다만 북부에 이상 징후가 생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일로 미루어 봤을 때 아마도 멸망의 날의 재림이 아닐까 판단하고 있습니다.

-멸망의 날의 재림…. 그렇군요. 라이오스는 어떻습니까?

-현재 정하얀 님께서 힘써주시는 중입니다. 교국은 오스칼 님의 지휘 아래 정리가 되는 것으로 보이니 당장 현재 전선으로 지원을 보내기 힘든 상황인 것 같습니다. 더불어….

-저희 쪽도 빠르게 끝을 내야겠군요. 정리가 되는 즉시 북부로 향하겠습니다. 일단 전선으로 향하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메인 이벤트가 발현되지 않은 곳도 도움이 필요할 테니까요.

-네. 뜻대로….

-제가 직접 가도록 하겠습니다. 병사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리고 송수경 님. 죄송합니다만 잠깐 따로 드릴 말씀이….

-네.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것은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일단은….

-네.

-일단은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처후는 일이 완전히 마무리 된 이후에….

-네. 그럼. 그리폰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니요. 직접 향하겠습니다.

천천히 두 쌍의 날개를 펼치는 모습은 우습고 같잖다.

-허….

-오오오오오오오….

-오오… 과연….

-송수경 님. 정말로… 신이시여….

-병사들에게 큰 힘이 될 겁니다.

‘병신 새끼. 신나 보이기는 하시네. 얼마나 신났으면 날개까지 펼쳤어. 곧 뒈질지도 모르는 놈이….’

북부를 확인한 이후에는 눈에 띄게 흥분한 모습. 사실 녀석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작전을 성공시켰다는 기쁨과는 별개로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특히나 북부에서 시작될 이벤트에 가장 흥분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너였어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노을빛의 검사와 빛의 아들의 서사를 지운다는 것.

기존에 있던 역사를 한 번 더 바꿀 수 있다는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벤트들을 해결하고 있는 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녀석의 입장도 희라 누나와 다르지 않다. 후회됐던 일,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일이 한 번 더 일어났으니 머릿속으로 개같은 상상력을 키우고 있을 것이다.

노을빛의 검사의 옆에 선 자신이 대륙인들의 앞에서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 뒤가 찌릿거리지 않을까.

애초에 내 자리를 빼앗고 싶어 하던 녀석이었으니 그게 놈에게 걸맞은 행동이다.

내가 빠진 빈자리를 본인이 채우고 싶어 하는 것이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녀석이 지금의 김현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

‘회귀자 사용설명서에 거리 제한 페널티라도 붙어 있어?’

완벽하지 않은 반쪽짜리. 자리에 대충 앉아 허벅지를 툭툭 두드린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노선을 취해야 할지 정해진 것은 없지만 뭐가 쓸 만한지 판단한다.

하지만 일단은 곧바로 녀석에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검 한 번에 뒈지면 투자한 게 무용지물이 되니까. 기왕 빌런으로 키우기로 결심한 만큼 제대로 활약해 줘야지.

“어떤가.”

-…….

“어떤가. 새로운 힘은.”

-굳이 대답해야 합니까.

“축하하네. 너는 자격을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아주 훌륭하더군.”

-단순히 자격뿐만이 아닐 겁니다. 저는 이미….

“아니. 기반은 마련되었지만 아직 완전한 힘을 얻은 것이 아니다. 느껴지나.”

-무엇이 말입니까?

“지금 느껴지냔 말이다. 노을빛의 신이… 네 안에서 느껴지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무슨 소리를….

“…….”

-당연히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이 느껴지나.”

흐릿할 것이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안개가 낀 것마냥 흐릿한 감각일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확실해지는 것만 같다. 잡히지 않은 흐릿한 감각이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녀석은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자신과 연결된 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적의.

악의와 분노.

-어째서….

“…….”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입니까! 어째서입니까!!

“네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어째서입니까! 메시아시여! 어째서 그 칼을 제게 돌린 것입니까. 흐윽… 흐으으윽… 아아아아! 어째서! 무엇이 부족하단 말입니까.

‘이 새끼 확실히 미친 것 같기는 해.’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거대한 감정의 파도가 놈을 감싸는 것 같다.

“필멸자여 너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그 힘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제대로 다루지도 못했지. 그대는 이제 겨우 두 쌍의 날개를 펼칠 수 있게 됐을 뿐이다.”

-아아… 아아아아아!! 그분께서 저를 죽이고자 합니다. 그분께서 이 세상을 죽이고자 하신단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분이 저를 거두어 간다 하시면 저는…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짜 제정신 아닌 것처럼 보이자너.’

-이제야 겨우 옆에 설 수 있게 되었는데 어째서 분노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걸 몰라서 물어?’

-내가 도대체… 뭐가 부족하냔 말입니까… 흐윽… 흐으윽….

광기에 먹혀버린 것 같다. 아까부터 미친놈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자세히 보니 더 미친놈처럼 보인다.

녀석의 안에 들어가 있는 악마가 얼마나 속을 갉아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먹다 남아 썩어 비틀린 사과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동공은 힘을 잃는다. 아까와 같은 흥분과 기쁨은 온데간데없다. 그 대신 얼굴에는 초조함이 감돈다.

“내가 그대와 함께할 것이다.”

-아아… 노을빛의 신이시여. 어째서 당신은… 어째서… 제가 무엇이… 흐윽… 흐윽….

“그대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영혼이다.”

-영혼….

“그래. 빛의 아들의 혼이지.”

-빛의 아들의 혼?

아마 마음에 들 것이다.

십자가에 못이 박힌 채로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누더기영이 선물이었으니까.

물론 이건,

김현성에게 보내는 선물이기도 했다.

‘진짜 아낌없이 주는 나무야.’

대륙을 위해 모든 걸 다 내주자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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