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855화
마지막 (88)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언니.”
“글… 글쎄.”
“글쎄라는 말로 대충 그렇게 얼버무릴 상황이 아니라는 거 알고 계시는 거 맞으시죠? 지금이라도 철회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조금 늦기는 했지만 윗선에 상황을 보고 드리면 어떻게든 수습할 여지가 남아 있을지도 몰라요.”
“나는 이기영 후배 믿어.”
“그 새끼는 그냥 정신병자라구요! 그냥 제정신이 아니라니까요! 지금이라도 수습하고 노을빛의 신에게 따로 접선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에요. 이대로 가면 정말로 대륙은 끝장이라고요. 지금 노을빛의 신 얼굴 보여요? 아예 우리를 적대시할 게 분명하다니까요. 우선 사정을 설명해야 돼요. 우리 때문이 아니라는 걸 해명해야죠.”
“…….”
“대륙 끝장내고 여기서 올라와서도 검 휘두르기 전에 어서요!”
“언니 말 들어야지. 로렌!”
“아니… 언니….”
눈을 꽉 감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살짝 감은 눈을 뜨자 입꼬리를 실실 올리고 있는 놈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정신병자 새끼….’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 순진한 언니를 속여 먹은 걸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만 같았다.
‘진짜로 끝장날 거야.’
정말로 언제 끝장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개입할 수도 없는 거 아니야? 완전히 끝난 거 아닌가?’
이미 대륙의 던전화가 진행된 상황이다. 시스템이 결정을 내렸으니 외부에서 간섭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하늘로 퍼지고 있는 이질적인 빛, 이벤트 실패의 페널티는 멸망의 날의 재현이겠지만 저건 이전의 그 빛과 같은 빛이 아니다.
엄연히 시스템이 내린 페널티였으니 사실상 외부의 간섭으로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제가 그렇게 오랫동안 이 대륙을 지켜봐 온 건 아니지만… 이거 하나는 확신할 수 있어요. 이렇게 대륙이 개판 나는 걸 본 적이 없었다구요. 대전쟁도, 이종족 해방전쟁이나 대기근으로 일어났던 전란도 지금 보다는 나았단 말이에요.”
말 그대로였다.
‘완전히 개판 났어.’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일어난 전쟁, 여러 가지 전쟁을 많이 봐오기도 했다.
몬스터나 마족, 혹은 공허에서 온 존재들을 막기 위한 대륙의 투쟁도 지켜봐 왔지만 그 모든 위기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생각이 든다.
‘진짜로 개판 났다구….’
이것보다 지금의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으리라.
여기저기에서 몬스터들이 미쳐 날뛰며 전 대륙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이벤트가 떨어진 지역에서의 전쟁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나마 믿고 있었던 노을빛의 신은 눈이 돌아가 있는 상황, 이 모든 걸 수습하기 위해 아래로 내려간 놈이 불난 집에 기름을 쏟아붓고 있으니….
“제가 안 불안하겠어요? 끝장이에요. 언, 언니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물론 언니를 나무라는 건 아니지만… 그, 그래도 이건… 만약 이거 안 되면 저희 뭐 먹고 살아요?”
“이… 이기영 후배를 믿으라니까.”
“저 새끼 그냥 사이코라고요! 그냥 자해중독이라니까요. 아마 지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거예요. 뭣 때문에 눈이 돌아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대륙에 분탕질 칠 생각밖에 없어 보인다고요.”
“…….”
“그냥 자기 꼴리는 대로 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냥 양보하기 싫은 거예요. 저 미친 컨트롤 프릭은 남 손에 대륙이 망가질 바에 차라리 자기 손으로 망가뜨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을 걸요? 지금 이미 그런 상태로 넘어간 거 아니에요?”
“어, 어차피 계약으로 묶여 있어서 지금에 와서 등 돌리는 건 불가능해. 그… 그리고 이기영 후배가 그렇게 생각 없이 움직이지는 않, 않는다구.”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베니고어 언니 역시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어느 정도 믿음을 보이는 것 같기는 하지만 흔들리고 있는 게 보인다.
아마 저 이기영을 가장 가까이에서 많이 봐왔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언니는 내 말에 공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같이 계약서라도 한번 자세히 살펴볼까요? 어딘가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있는지도 모르니까… 아. 지금 엘룬도 같이 불러서….”
“이기영 후배랑 나는 한날한시에 함께 매도하고 매수할 거란 말이야. 그, 그게 우리의 맹세였다구….”
“여기는 이미 침몰하는 배라구요. 지금 저걸 보세요. 저걸 어떻게 해결하겠어요? 저기서 지금 대륙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나 해요? 애초에 노을빛의 신부터가 글러 먹었는데… 새로 태어난 신의 손에 멸망한 대륙이라니 다른 신들이 이거 들으면 거짓말인 줄 알 거예요. 평생의 웃음거리로 남을 거라고요.”
“이기영 후배가 있잖아.”
‘틀렸어. 언니도 이미 완전히 세뇌당했나 봐.’
이렇게 된 이상 무력행사밖에 남은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쥐며 언니를 바라봤을 때였다.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지.”
하는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시선을 돌리자 손가락으로 안경을 올리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는 벨리알이 눈에 보인다.
이죽거리고 있는 얼굴을 할버드로 짓이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천추의 한처럼 느껴진다.
“이미 한배를 탄 것이 아닌가. 조금은 즐기는 걸 추천하고 싶군.”
“누가 함부로 말을 걸어도 된다고 했지? 언니 제 뒤에 서세요. 냄새나고 역겨운 악마 주제에.”
“빛과 어둠의 아들이 정말로 생각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겠지. 지금 모습을 보면 네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다만 전부 뜻이 있을 것이다.”
“…….”
“너무 부족해.”
“뭐가.”
“로, 로렌… 우린 더 많이 벌어야 돼. 언니 이해하지?”
“언니까지 무슨….”
“너무 부족하다 이 말이다. 어차피 던전의 클리어 조건은 두 가지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벤트는 그 조건들을 돕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야.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나도 알고 있지만 어차피 우리는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를 맞추면 그만이다. 초조해할 필요는 없어.”
“모든 생명의 끝 혹은 이기영 후배의 부활이야. 로렌.”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지금 저 사이코가 벌이고 있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전자의 경우는 어차피 불가능해요. 언니 설마 엘룬… 진, 진심으로 갈아버리려고 하는 건 아니죠?”
“…….”
‘왜 시선을 피하고 그래요. 언니?’
“설, 설마. 내가 그러겠어? 엘룬도 소중한 우리 친구고 동료니까. 나도 여기서 끝을 보고 싶어. 아마 이기영 후배도 마찬가지일 거야. 3회 차는 없어. 던전 클리어 조건은 이기영 후배가 부활하는 거라는 거지.”
“말은 들었지만 그게 정말로 가능하기는 한 건가요?”
“가능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우리가 모일 일도 없었겠지. 그렇지 않은가. 베니고어.”
들은 적은 있다. 루시퍼와의 계약. 이지혜라는 인간. 그리고… 이기영 저 사이코패스가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 한다는 것까지.
‘키는 루시퍼와 이지혜라는 인간이 쥐고 있다고 했지.’
보험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들은 적이 있다.
“보험은 신성이에요?”
“맞아, 로렌. 이기영 후배는 완전히 독립하고 싶어 해. 위뿐만이 아니라 루시퍼에게도 마찬가지야. 이벤트를 해결하거나 이기영 후배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상정했던 것보다 더 많은 걸 소비했거든. 아마 이기영 후배도 느끼고 있을 거야.”
“그래서 저러는 거고요?”
“갤러리들이 보고 싶어 하는 장면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무대는 갖춰졌고 배역도 정해졌지만 임팩트가 없어.”
“무슨 임팩트?”
“악이 어디 있나. 이 모든 짓을 꾸민 흑막이 없지 않은가.”
‘흑막 있잖아. 이지혜라는 인간이라며.’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거든?”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뒤집어쓸 흑막. 노을빛의 검사와 빛의 아들에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간단한 이야기다. 갤러리들은 그런 것에 흥분하고 신성을 소비해. 당연한 클리셰 이기는 하지만 왕도는 패배하는 법이 없고 큰 위기가 큰 서사를 만드는 법이다. 당위성 역시 필요하다.”
“…….”
“빛과 어둠의 아들이 다시 내려오는 당위성. 빛과 어둠의 아들이 다시금 대륙에 내려오게 되는 과정에 필요한 이야깃거리. 필멸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서사. 일이 꼬이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이야기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 부족한 것은 반대쪽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다.”
“…….”
“그래서 송수경이라는 인간에게 씨앗을 뿌렸다는 거다.”
‘미친 쓰레기 같은 악마. 쓰레기 같은 인간.’
언니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사이드로 빠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언… 언니는 죄 없어. 잠깐 휘말렸을 뿐이야.’
순간적으로 욱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노리는 게 그것이라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합당하다는 생각은 든다.
적을 만든다. 쉬운 발상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한 희생양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적당히 똑똑하고, 이용하기 쉽고, 제대로 된 배역을 연기해 줄 연기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인격을 마모시키고 빛의 아들의 유산을 건네 신성을 부여한다.
아마 이게 끝이 아닐 것이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릇을 만드는 게 쉽지는 않은 과정이었다고 말해주고 싶군.”
저 인간은 부족했으니까.
노을빛의 신과 빛의 아들의 대척점에 서기에는 가진 바 능력이 너무나 부족했으니까.
그는 초인도 아니고 특출난 천재도 아니다. 유능하다고 분류할 수 있는 인간이었지만 붉은 전신이나 마법의 신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다.
애초 신성을 얻을 자격도 없었고, 자신만의 신화를 써 내려간다고 해도 한계에 닿을 것이다.
이기영과 비슷한 종류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겠지.
정신력은 오히려 더 유약하다. 약하고, 쉽게 흔들리고, 남에게 의지한다.
자신이 마음에 둘 곳을 찾고 싶어 해 결과적으로 자신만의 메시아를 만들었다.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하고 옆에 서고 싶어 하며 추악한 질투를 하며 자신에게 좌절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인간이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빛의 어둠의 아들은 자신의 것에 손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성격이 아닌가. 네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새삼스럽군. 로렌. 신이나 악마, 초월적인 존재의 분노를 사 안 좋은 끝을 맞이한 인간이야 어디에든 있는 법이다.”
“…….”
“이유를 찾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것이지. 아마 곧 씨앗이 발아하겠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 저 생쇼를 하고 있는 거라고? 갤러리들 보여주려고?’
“그냥 자기를 내버려 두고 간 노을빛의 신에게 엿이나 처먹으라고 던진 게 아닐 거라 이 말이야? 언니 제 말 아닌 게 확실해요?”
“…….”
“…….”
‘왜 다들 시선을 피해.’
“그럴 수도 있고… 우, 우리는 지원조인 만큼 우리 할 일을 하면 돼. 엘룬한테 신성 좀 당겨오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그건 받아왔지만. 언니.”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다른 곳에서도 알아봐. 어차피 이제 위랑은 마주칠 일이 없을 테니까.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애들 좀 꼬드겨서 제대로….”
“제…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언니.”
“로, 로렌 내가 많이 믿고 있는 거 알지?”
“네. 물… 론이죠.”
“이번에는 진짜야. 로렌. 실수는 없을 거야. 이기영 후배는 감정적일 때 제일 똑똑해진다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저 인간이 저 쓰레기 같은 영혼으로 빛의 아들이 된 것만 봐도 언니의 말이 저절로 이해가 됐으니까.
하지면 여전히 의문점이 남는다. 크게 상관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암묵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으로 정해진 것만 같은 이야기.
일단은 조용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함께하기로 한 만큼 이런 종류의 궁금증은 해결해야 했으니까.
“언니, 그럼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응.”
“노을빛의 신에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는 도대체 뭐예요.”
“…….”
“그리고.”
“…….”
“어째서 노을빛의 신과 빛의 아들 역시 모르고 있죠?”
“…….”
“기억을 지운 건… 누구죠?”
눈을 동그랗게 뜬 언니와 턱을 매만지고 있는 벨리알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