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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56화 (84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56화

마지막 (89)

암묵적으로 말하지 않기로 한 것에 대해 물어보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이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괜스레 시선을 돌리자 정신이 나간 것처럼 웃고 있는 이기영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어째서 저런 놈이랑 엮여가지고….’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놈을 예의주시했으리라.

아직도 아무런 말도 해오지 않는 언니와 벨리알이 보였지만 이미 주사위를 던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다시 한번 입을 벌리자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할 말은 해야지.’

“제가… 빛의 아들을 계속해서 지켜본 것은 아니지만 이거 하나는 확신할 수 있어요. 거울호수 안에 있었던 차원의 바다는 이스터에그라고 말할 수도 없어요. 명백한 버그였어요. 애초에 인간이 만든 너덜너덜한 배로 차원의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다고요.”

“버그라고 볼 수는 없어. 로렌. 그건….”

“네. 그래서 따로 픽스하거나 수습하지 않았던 거예요…. 아마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걸요.”

“…….”

“그게 시스템의 의지일 수도 있으니까.”

“…….”

“바깥 세계의 신은 명백히 이레귤러였기 때문에 시스템이 노을빛의 신과 빛의 아들에게 선물을 내린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들을 공짜로 스펙업 시켜주기 위한 수단이라고 느꼈었다고요.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었겠네요. 롱기누스의 창을 선택했다면 말이에요. 결과론 적인 이야기라 의미는 없지만….”

“…….”

“근데 그런 게 아니더라고요. 멸망의 날이나 외신전쟁에서도 저 팬던트가 사용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감춰져 있더라고요. 애초에 그런 아이템을 얻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처리되어 있었단 말이에요. 그때 거울 호수에 함께 갔었던 빛의 아들의 추종자는 물론이거니와 본인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요. 심지어 팬던트를 착용하고 있는 노을빛의 신 역시 마찬가지죠. 대륙기록보관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삭제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아요?”

“제법 파헤쳤나 보군. 노력한 게 가상해.”

“저도 이곳에 합류하는 게 도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알 건 알아야 되잖아요?”

“로, 로렌 언니 못 믿은 거야?”

“그런 게 아니에요. 언니 기왕이면 확실하게 가고 싶었을 뿐이에요. 저보다는 언니를 위해서요.”

확실히 이상한 점이 많아.

단순히 이상하다고 말로 부족할 정도로 상황이 오묘하다.

‘애초에 저건 뭐야? 왜 보이지 않는 거야?’

아이템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 대륙기록보관소는 물론이거니와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없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막아놨다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물론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는 대충 예상이 간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저 아이템의 정보를 막아놓은 이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저는 루시퍼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아마 루시퍼 일 거예요. 제 말이 틀린가요?”

루시퍼 정도가 되는 악마가 아니라면 이런 일을 벌일 수 없을 테니까. 상위의 악마나 신이 아니라면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의문점은 어째서 루시퍼가 그런 일을 벌였냐는 것.

어째서 빛의 아들은 물론이거니와 그 추종자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끼쳤냐는 것이 아닐까.

‘신화등급의 아이템이야.’

무려 신화등급의 아이템이라고. 신을 죽일 수 있는 롱기누스의 창을 버리고 선택한 아이템인데….

저 극단적인 효율충이 저 아이템을 아직까지 썩히고 있었다고? 저 팬던트를 선택한 건 이기영 아니야?

어째서 쓰지도 않을 아이템을 루시퍼와 상호협의 하에 아직까지 묵히고 있었던 건데. 저건 도대체 뭐길래 기억까지 날린 건데?

“언니는 몰라도 저 쓰레기 같은 악마가 아무 이유 없이 합류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뭔가 승산이 있기 때문에 합류하신 거 맞죠? 또 두 분은 저와는 다르게 빛의 아들이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누군가 저 아이템에 영향력을 끼치기 전에 두 분은 분명히 저 팬던트를 확인하셨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최소한 두 분 중 한 분은 알고 계시겠죠. 높은 확률로 둘 다 알고 있을 거고요. 그러니 알려주세요.”

“…….”

“…….”

“그건….”

“베니고어.”

“언니, 말해주셔야 해요.”

“그건 알려줄 수 없어.”

“어째서예요?”

“이기영 후배가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

“네? 그건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야. 이기영 후배는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아. 모르고 있어야 한다고 했어.”

“지가 고른 아이템이잖아요?”

“나, 나도 자세히는 몰라. 하지만 기억을 잃기 전에 이기영 후배가 신신당부했단 말이야. 절대로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자기 자신한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로 먼저 말하지 말라고…. 그러면 된다고 이야기했어. 이기영 후배가 그렇게 초조해하는 걸 본 적이 없었거든. 아마 정말로 중요한 일일 거야.”

“벨리알도 알고 있어요?”

눈치를 보면 알고 있는 것 같다.

‘도대체 뭐냐고 제기랄.’

재미있다는 듯이 실실 웃고 있는 얼굴이 짜증 나게 느껴진다. 머리에 손을 올리는 게 도발하는 것처럼 보여 심사가 뒤틀린다.

‘왜 나한테는 안 알려주는 건데. 저 악마도 알고 있는 걸 왜 나한테는 안 알려주는 거냐고.’

“물론 알고 있다.”

할버드를 반사적으로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말해. 이 빌어먹을 악마.”

“나는 계약으로 묶여 있어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그리고 딱히 네가 알게 된다고 해서 무언가가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나도 정확히 빛과 어둠의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건 그의 선택이며 의지다. 비밀이나 보안이라는 건 원래 변수를 줄이기 위해서 가 아닌가.”

“…….”

책상에 살짝 걸터앉은 이후에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네가 변수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는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야. 자신의 기억까지 지웠으니 설명이 필요 없겠지. 빛의 아들이 가진 패로 네가 다른 일을 벌이지 않을 거라는 보증이 어디에 있나.”

“기억을 지운 건….”

“물론 루시퍼 님과의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다. 실제로는 그 내기를 편법으로 무효화시키기 위해서 이기는 하다만. 아마 루시퍼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빛과 어둠의 아들로서는 미리 레일을 깔아놓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판단했으니 할 일은 간단하지. 기억을 지우고 열차를 레일 위에 올려놓는다. 정말로 간단하지 않은가.”

“정신병자 새끼.”

“변수를 달가워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변수가 없다면 열차는 정해진 레일 위를 달리고 결국에는 목적지에 도착할 테니까.”

“나는 변수가 되지 않을 거야. 이게 언니한테 해가 되는지 알아야 하니까…. 만약 해가 된다고 해도 다른 손을 쓰지는 않겠어. 그저 화가 닥칠 때를 대비하고 싶을 뿐이야.”

“로… 로렌.”

“…….”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계획이 실패해도 이기영 후배가 뒤를 잘 봐준다고 했거든.”

‘그게 거짓말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내가 지켜야 돼.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 감동했다는 듯이 손을 꽉 잡아 오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사기라도 당한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 왠지 모르게 억울하게 보이는 눈빛을 외면하기가 힘들다.

같이 지옥으로 굴러떨어지게 되더라도 이걸 아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발을 뺄 수 없게 되더라도 일단은 합류해야 했다. 어차피….

‘언니는 이미 탈출하기에는 틀렸어.’

적어도 옆에서 커다란 화가 닥쳐오는 걸 막아주는 게 최소한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와 꽂혔다. 벨리알이 싱긋 웃으며 계약서를 내미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이럴 줄 알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참담한 기분. 괜히 일을 벌인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반짝거리는 눈으로 사인할 곳을 짚어주는 언니를 보고 있으니 뺄 수가 없다.

기본적인 비밀유지조항과 더불어 비밀을 발설했을 시에 대한 페널티, 벨리알의 인장이 찍혀있는 것만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아무 문제는 없었지만 행위 자체가 치욕스럽게 느껴진다.

다시 한번 옆을 살펴본 이후에는 펜을 휘갈긴 상황.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언니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알타누스의 유산이야.”

“네?”

“신화등급의 팬던트의 이름은 알타누스의 유산이야.”

“…….”

“소원을 이루어주는 팬던트.”

“…….”

“페널티는 사용자의 소멸.”

“…….”

“쉽게 설명하면 노을빛 검사의 소멸로 그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팬던트야.”

“왜… 왜 그런 걸 고른 거예요?”

거기까지는 모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1차원적인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순식간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어째서 빛의 아들은 노을빛의 신의 죽음을 패널티로 하는 아이템을 선택한 거죠? 어째서 노을빛의 신은 빛의 아들이 자신에게 팬던트를 주는 것에 동의한 걸까요?”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갖는다.

“어째서….”

빛의 아들과 그의 추종자들은 페널티에 대해서 완전히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템의 선택을 받은 이후에 그 소유자만 확인할 수 있는 패널티 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하지만 빛의 아들의 눈은 특별하잖아. 그의 추종자들이면 몰라도 빛의 아들이라면 페널티를 분명히 알고 있었어야 해. 모르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이때부터 레일을 그리고 있었다는 건가. 아니면 그냥 노을빛의 검사가 미웠던 거야? 갑자기 복수라도 하고 싶어진 거야?

“루시퍼가 그때부터 개입하고 있었던 걸까요? 기억을 처음 지운 시점과 내기가 시작된 시점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 거죠? 어째서… 어째서 노을빛의 신은 자신이 장착하고 있는 아이템을 확인할 수 없는 건가요. 이게 제일 이상하다고요. 어째서 자기 자신이 소유자로 등록되어 있는 아이템의 존재에 대해서 인지조차 할 수 없는 거냐고요. 추종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건 가능해도 소유자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

“물론 당시라면 가능했겠죠. 그때는 필멸자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노을빛의 신을 봐요. 그의 격을 생각해 보면 자신의 소유로 들어온 아이템을 인지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루시퍼라고 해도 그런 건 불가능해요. 루시퍼가 내린 아이템이 아니라 알타누스의 유산이잖아요. 엄연히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을 거라….”

회귀자 사용설명서.

“회귀자 사용설명서?”

“…….”

“…….”

빛의 아들의 권능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회귀자 사용설명서….”

빛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권능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게 조종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을빛의 신의 머릿속에서 팬던트를 아예 삭제시키는 것, 인지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 존재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것.

루시퍼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빛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권능으로는 쉬운 일이다.

의문점은 남아 있다.

차고 넘친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내기의 내용은 노을빛의 신이 빛의 아들을 죽이느냐 마느냐가 아니었군요. 그가… 그가 팬던트를 이용해 빛의 아들을 살릴지 살리지 않을지가 내기의 내용이었어요.”

“맞을지도….”

“받기로 한 보상은 빛의 아들의 부활이 아니었군요.”

“…….”

“노을빛의 신의 부활이었어. 신성을 모으고 있는 이유는 빛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을빛의 신을 살리기 위해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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