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857화
마지막 (90)
“김현성… 김현성… 넌 뒤졌어, 진짜.”
“…….”
“용서가 안 돼. 시바.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안 된다고. 이 나쁜 새끼.”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돼. 이 새끼는. 솔직히 개인적인 감정이 조금 섞여 있기는 한데.
아무튼 간에 필요한 일이기도 하니까. 그렇지? 다른 건 다 몰라도 나를 버리는 건 안 되지.
애초에 대륙이냐 이기영이냐의 선택지 중에서 이기영을 포기하는 게 말이나 돼.
일생을 바쳐서 내조해 줬는데 그렇게 홀랑 가버리면 내가 뭐가 되겠어? 금이야 옥이야 키워놨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튀어나가? 이래서 잘해줘도 소용없어요.
그 말이 맞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봤지만 역시나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건을 겪을 김현성이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할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동정심은 생기지 않았다.
‘미리 길들여 놔야 돼.’
몇십 년 정도가 아니다. 앞으로 몇백 년, 몇천 년, 아니, 수만 년 동안 함께 지내야 하는 만큼 이 정도의 기선제압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 것도 아니고 쇼 하나가 추가된 것뿐이니까.
그것도 꼭 필요한 쇼. 어차피 진행되어야 할 각본에 곁가지 이야기가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거지.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 신성을 많이 소비했잖아. 심지어 지금도 하고 있는 도중이고….
이런 자극적인 장면이 있어야 흥행하는 거 아니겠어.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기는 것보다는 대박 치는 게 낫잖아.
마음속 깊은 곳에서 후회 한 번 하면 다시는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송빌런으로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벨리알도 준비하고 있을 거고.
녀석이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아마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멘탈이야 이미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마모됐을 테고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닐 것이다.
악마의 목소리에 의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니 잘만 조종하면 공화국 결사단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다운그레이드 버전의 눈도 가지고 있으니 현성이한테도 어느 정도는 저항할 여지가 있겠지.
적어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목이 날아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있잖아.’
송수경이 부족하다면 내가 도움을 주면 돼.
아마 곧 배역들이 무대 위로 모일 것이다. 기왕이면 그전에 준비를 해놓고 싶은 심정, 일단은 조혜진에게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발등에 불똥이 떨어졌다면 떨어졌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애초 북부에서 일어난 메인 이벤트가 통째로 물거품이 된 순간부터 우리는 항로를 벗어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시스템이 친절하게 안내해 준 정상적인 던전 공략 방법에서 벗어난 것이다.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문제는 없다.
‘어차피 한 가지가 아니잖아.’
모든 던전이 그렇다. 규모는 크지만 이 던전도 다르지 않다.
저주받은 신단의 저주를 연금술로 풀거나 균열 박물관에서 순수하며 재치 있고 재기발랄한 방법으로 던전을 클리어한 것처럼 이 던전 역시 다른 공략 루트가 존재할 것이다.
오히려 기존에 경험했던 던전들 보다 간단하다. 명확한 목적이 있었으니까.
‘요지는 부활만 하면 된다는 거 아니야.’
북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 전 병력을 꼬라박는 것보다는….
“내가 내려가면 돼.”
‘내려가면 김현성부터 한 대 쳐야지.’
던전의 클리어 조건은 이기영의 부활이었으니까.
내가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면 신화등급의 던전 빛의 아들이 희생된 대륙은 던전 화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지금 개판 나 있는 모든 것들이 정상으로 되돌아오니 굳이 다른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사소한 문제는 아직까지 이쪽의 부활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어려웠다는 것.
‘그래서 있는 거 아니겠어.’
그렇기 때문에 이지혜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와 접촉하는 게 최우선 사항이었다.
“혜진아.”
-네. 부길드마스터.
“찾았어?”
-네. 부길드마스터가 말씀하신 대로 단서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게 함정일지 아닐지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일단은 알프스와 함께 움직이는 중입니다.
‘좋아. 나이스. 그럴 줄 알았어.’
-부길드마스터는 어떻게 알고 계셨던 겁니까?
“뭐 이유가 필요합니까. 메인 이벤트 하나를 클리어했는데 보상이 없겠어요? 이지혜가 철로를 깔아 뒀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네요.”
-지혜 씨가 말입니까?
“네.”
누나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직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뻔한 이야기다. 메인 이벤트를 클리어하면 단서에 닿을 수 있다.
던전을 유지시키고 있는 시스템은 공평하다. 정상적인 공략 방법이라는 게 본래 이런 거지.
중간에 탈선하지만 않는다면 공략은 정해진 레일 위를 달리는 과정이다.
“당연히 함정 따위는 없을 거예요. 이건 누나가 내건 이벤트일 테니까. 우리가 깔 보상 역시 거짓이 아닙니다. 혜진 씨도 던전 한두 번 공략해 보는 거 아니잖아요. 오히려 나보다 더 많이 다녀봤으면서 새삼스럽게.”
-…….
“던전의 규모나 상황의 특수성 때문에 걱정하시는 건 이해하지만 기존 던전과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무튼 어디까지 갔어요?”
-알프스?
-아. 네. 이제 곧 도착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잘했네요.”
-부길드마스터는 조금 어떻습니까? 북부에서 이상 현상이 발현됐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길드마스터와의 통신 채널 역시 끊겨 있고요. 만약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언제든지.
“아니요. 이쪽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어디 보자… 한두 시간… 정도. 남았겠네요.”
-두 시간 말입니까?
“한 시간 안에는 도착할 수 있겠어요?”
-알프스?
-네. 조혜진 님. 좌표가 가리키고 있는 곳은 이쪽이에요. 흰둥이도 이쪽이라고 말하고 있고요.
‘시간상으로 꼬이지만 않으면 되는 데….’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기는 했지만 메인 이벤트 역병 군주로 얻은 특전이 누나의 위치가 아닐 가능성도 존재하니까.
준비해 놓은 보상이 뭔지 알 수 없는 만큼 여기에서는 운에 기댈 수밖에 없다.
아니, 운이 아니지. 누나라면 알고 있을 거야. 지금 일이 꼬여 있다는 것도 눈치챘을 거고….
지금 그냥 빡쳐서 안 나오고 있는 거야. 애초에 내가 살아 있다는 것도 도중에 눈치챘을 거라고.
강림을 두 번이나 했는데 모를 수가 있어? 보상이 있는 장소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분명히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렇기 위한 메인 이벤트잖아. 물론 복수하겠다는 의지도 있었겠지만 누나라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을 게 분명해.
열차가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지혜라면 충분히 철로를 변경해 줬을 것이다.
시선을 돌리자 계속해서 안으로 진입하고 있는 알프스와 조혜진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흰둥이가 스카프 냄새를 한 번 더 맡은 이후에는 코를 킁킁거리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 조혜진은 기본적으로 전투 준비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중, 아마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있었던 흔적이 있어요. 조혜진 님.
-…….
-네. 잘 지워져 있지만 흰둥이가 이 장소에 누군가가 있었다고….
일반적인 던전처럼 되어 있는 구조를 정신없이 뛰기 시작하는 흰둥이를 따라 들어가는 이들이 눈에 보인다.
누군가 살았던 흔적도 몬스터도 보이지 않았지만 정신없이 뛰어가고 있다.
마침내 작은 동공에 도착했지만….
-아무것도… 없어?
-함정?
라고 말했던 바로 그때였다.
-전투 준비해요. 알프스.
-아… 네… 네! 흰둥아!
몇 명의 인형이 동공 안으로 빠르게 쇄도하기 시작한 것.
조혜진은 창을 들어 올리고 알프스는 조혜진의 뒤에서 진형을 잡는다.
가면을 쓴 인원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 조혜진을 향해 무기를 내질렀다.
하지만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무기를 흘린 이후에는 침착하게 창을 내지르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창이 정체불명의 인형의 가면에 닿기 전에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신성 보호 마법에 가로막힌다.
당황할 상황이기도 하건만 조혜진은 조용히 알프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제가 있습니다. 알프스.
-네… 네!
-일단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흰둥아!
-제길! 성녀급의 고위 사제….
설명을 하려고 말을 내뱉었지만 비슷한 체형의 아이 두 명이 정신없이 위치를 바꾸어가며 조혜진을 압박하는 중, 심지어 화살이나 마법이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그녀를 제일 거슬리게 하는 건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에서 날아들어 오는 신성 마법이지 않을까.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수준이 높다고.
버프, 보호 마법을 외우는 타이밍, 회복능력, 단순히 고위 사제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
틈틈이 견제용 신성 마법을 쏘아 보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규모전투를 직접 지휘하고 있다.
초조해하는 얼굴이 보인다.
사제를 제압하러 간 알프스를 걱정하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비키지 않으면 죽이겠다.
조용히 창을 내밀며 읊조리는 소리에 싸우고 있던 놈들이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네놈들은 누구지?
-우리는.
-달을 부수는 자.
-더 문 브레이….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개소리를 내뱉고 있던 녀석 한 명이 창을 맞고 나뒹군다.
가면이 튕겨 나가며 얼굴이 드러나고 그 모습을 본 동료 한 명이 목소리를 내질렀다.
-앗!
하는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했던 그대로다.
‘여단 쌍둥이들이자너.’
“희영 씨예요.”
-네?
“지금 쟤네 지휘하고 케어해 준 사람이 희영 씨라고요. 애초에 저 정도의 고위 사제가 대륙에 어디 붙어 있겠어요? 당연히 선희영이지. 잘 봐요. 신성 마법 패턴이랑 주문 종류 전부 익숙하지 않아요?”
-희영 씨?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흘러들어온다.
-네. 오랜만입니다. 혜진 씨.
-…….
-일단 무기를 버려주세요.
-……
-이… 이거 놓아주세요! 이… 이것 좀….
검사가 사제한테 제압당하는 걸 보는 일은 쉽지가 않다.
알프스의 목에 단검을 겨눈 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랜만에 보는 선희영.
눈치 없는 흰둥이는 그 옆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다.
아마 적의가 없다는 걸 눈치채서였겠지만 그래도 주인이 잡혀 있는데 꼬리 흔드는 건 아니지, 친화적인 것도 정도가 있는 건데.
그 옆에서 카스가노 유노도 조용히 목례를 건네며 모습을 드러냈다.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다. 둘 다 가면은 벗고 있는 상태….
차이점이라면 몸 전체를 두르고 있는 망토를 입고 있었다는 것.
선희영 쟤는 얼굴에 독기가 조금 들어선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알프스를 찌를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아, 카스가노 유노는 또….
‘많이 수척해졌네.’
아마 능력을 많이 사용한 반등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죽었던 시점부터 지금까지 미래를 얼마나 많이 봤을지 예상하기 힘들다.
‘당연하겠지.’
-여기 계셨군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신 겁니까? 정말로… 정말로 많이 찾아다녔었습니다. 희영 씨. 다른 길드원들도 모두 보고 싶어 하십니다. 저… 저는… 아니, 그런데 지혜 씨는 어디에… 그리고 달을 부수는 자라는 건 도대체….
-그건 저 아이들이 마음대로 지껄인 것이니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기도 하거든요. 혜진 씨. 그보다… 무기를….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안으로 들어오셔도 돼요. 혜진 씨. 이기영 그 나쁜 새끼는 잘 지낼 테고….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카스가노 유노가 주문을 외우고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비쳤던 벽면 사이에서 작은 공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 누가 있을지는 뻔하지 않은가.
작은 인형은 조용히 가면을 벗으며 입을 열었다.
-스카프 돌려주러… 오셨어요?
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