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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58화 (849/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58화

마지막 (91)

오랜만에 보는 이지혜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예전과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솔직히 반갑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들어와 꽂힌다.

그렇게 찾아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기도 했고, 누나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이 경우에는 누나와 내가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게 다행이지.

하지만 여전히 걱정거리가 남아 있다.

‘이 누나 맛탱이 간 거면 어떻게 해.’

잠정적으로는 그녀가 내게 달릴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해 계획을 짜놨을 것이고, 루시퍼에게 얻은 정보가 있다면 그 정보에 의거해 길을 닦아놨을 것이다.

정황상 누나가 내 뒤를 봐주고 있다고 느끼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아마 이지혜는 선택지 A와 선택지 B를 둘 다 고려하고 있을 것이다.

손을 내밀어 주는 선택지와 그렇지 않은 선택지.

김현성이야 애초에 누나에게는 고려 대상도 아닐 테니까.

말하자면 누나의 변덕에 달려 있다고 표현하는 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누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루시퍼와의 계약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우리 쪽에서 제시할 수 있는 것보다 크다고 느껴진다면 등을 돌릴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물론 누나가 나와 충돌하는 걸 바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것 이상으로 누나의 변덕이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예상하기가 힘들다.

결론은 그거야.

‘비위를 잘 맞춰줘야지.’

아마 처음 누나를 만났을 때였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솔직히 누나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1회 차도 마찬가지였을 거고.

“혜진아. 비위 잘 맞춰주고 말 잘해. 괜히 막 이상한 무리수 던지지 말구.”

무슨 말부터 이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조혜진의 모습이 보인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이후에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중, 선희영와 카스가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잠깐 움찔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섣부르게 몸을 움직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른 명령이 없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이지혜의 옆에 있는 익숙한 얼굴이 입을 여는 모습이 들어온다.

-거기까지. 가까이 다가오지 마.

-연수야, 괜찮아.

-언니.

-어차피 네가 막고 싶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니. 상대방과 자신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도 덕목이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저는 지지 않아요.

-…….

-지지 않는다구요…

-말 들어야지?

악역 포스 오지자너.

카리스마 그 자체자너.

이게 빌런이자너.

분한 얼굴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하연수.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조혜진이 조용히 스카프를 돌려주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이지혜는 작게 미소 지을 뿐이었지만 조혜진으로서는 그게 퍽이나 안심이 된 모양이다. 적어도 그녀가 적의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테니까.

분위기가 다소 무겁기는 했지만 대화를 해보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던 조혜진이 고른 선택지는….

-지혜 씨. 지혜 씨를 조종하던 악마는….

그다지 내 마음에 드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

-…….

-푸훗.

-…….

-푸하하핫. 우리 혜진 씨 너무 순진하시다. 정말로 악마가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이거 별로 안 좋은데.’

“아니, 왜 그런 걸 물어봐요. 그냥 본론부터 말하지. 무슨 악마니 뭐니 그런 이야기는 왜 해요. 그냥 도와달라고 말하지. 아니….”

-정말로 내가 악마한테 조종당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연수야, 언니 물 좀 가져다줘. 푸훗. 너무 재미있다.

‘아, 이 누나 무서워지는데. 왠지 빠꾸 없이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은데. 이거….’

조종당하고 있다는 설정이 태세전환을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굳이 조혜진한테 이런 식으로 말을 한 의도가 뭐겠어. 그냥 불도저 하겠다는 거지.

-…….

-…….

-시작부터 끝까지 제가 저지른 게 맞아요. 여러 곳에서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도움이었고 제 머릿속에서 나온 거예요. 크게는 에베리아를 지도에서 지운 일이나 대륙을 던전화시킨 일부터, 엘리오스를 장기 말로 만든 것도 제 작품이네요. 굳이 하나하나 열거하기 힘들 정도인데… 뭐 여러 가지로 말이에요.

-어째서.

-교훈을 주려고요.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셨던 겁니까.

-교훈이 필요했으니까. 사실 이유는 많지만 여기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네요. 그냥 변덕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대게 소중한 사람을 잃으면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잖아요? 제가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에요. 왜 조금 다시 보이나 봐요?

‘아니, 진짜 이 누나 왜 이래. 왜 이렇게 거침이 없어.’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다. 천천히 가면을 쓰고 조용히 등받이에 몸을 받치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함께 있는 여단 멤버들 역시 조용히 조혜진을 바라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여주기 싫은 의도였겠지만 저런 모습이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쪽 다리를 꼰 채로 뭐라 말해보라는 듯 턱을 치켜올리자 하연수가 조용히 앞으로 나와 조혜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혜진아. 그냥 커피나 한잔하면서 밀린 이야기나 하자고 그래.”

너는 좀 닥치라는 듯 창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

-…….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도 다시 보이지 않습니다. 지혜 씨는 이전에 제가 봤던 지혜 씨 그대로예요.

-…….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기준에서는 용납할 수 없지만… 제 잣대로 지혜 씨를 판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은 전부 다른 법이고… 지혜 씨가 얼마나 슬퍼하셨을지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아마 모든 사람들이 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

-실수는 되돌릴 수 있습니다. 지혜 씨는 현명하신 분이니까요.

-나는 내가 한 행동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아요.

-…….

-죗값을 치러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륙이고,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부족해.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고 그렇게 착한 사람도 아니거든.

-지혜 씨는 상냥한 사람입니다.

‘상냥 나왔죠.’

“상냥 진짜 오랜만에 들어본다. 진짜루.”

진짜 상냥한 단어네. 진짜 대단해. 우리 혜진이. 응. 이 상황에 상냥이 나와.

-제가 생각하는 지혜 씨는 그 누구보다도 상냥한 사람입니다. 어째서 여기서 저를 기다려 주셨던 겁니까?

-그게 보상이었으니까요. 던전의 히든 보스를 만나셨다고 생각하세요. 제대로 된 보상을 얻어갈 수 있는지의 여부는 당신의 의지에 달려있어.

-지혜 씨는 제 적이 아니에요. 이 곳에 계신 분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어요. 부길드마스터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물론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어요. 진심으로 말씀하건대 지혜 씨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해 주셨으면 합니다. 함께 싸워주셨으면 합니다.

-…….

-제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한 번 만 더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지혜 씨의 실수를 주워 담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솔직히 저 말이 이지혜에게 들어 먹힐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막무가내라면 막무가내였고 사실 무슨 의미인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가면을 천천히 벗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조용히 조혜진의 얼굴을 한 번 살펴보고 있다.

조혜진은 고개를 숙인다. 뭘 의미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을 담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처구니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 듯한 표정. 이지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나오네.

-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이렇게 나오네요. 괜히 내가 더 부끄러워진다니까.

-…….

-진짜 사람 할 말 없게 만들어. 오빠랑 이야기하는 게 더 편할 뻔했어. 얘들아, 문 좀 닫아. 연수는 차 한잔 내오고. 희영 씨도 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 놔주세요. 어차피 오빠도 대충 예상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대충이 아니라 거의 확신하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네… 네?

-여기는 루시퍼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에요. 던전의 시스템이 보상으로 내린 공간이니까. 격이 높은 이들도 볼 수 없는 곳이라 이거죠. 합법적인 버그라고 생각하시면 편하실 거예요. 뭐 조금 이쪽의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낄지는 몰라도 제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는 아마 모르고 있을 것 같네요. 아, 그 창은 제가 만질 수 있을까요? 그나저나 잘 찾아왔네요. 솔직히 힌트를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물론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와 같이 온 게 조금 의외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찾아와 줘서 기뻐요.

-저… 지금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제가… 잘….

-제대로 찾아오셨다는 거예요. 혜진 씨. 후훗. 우리는….

-달을 부수는 자… 더 문….

-너희 입 안 다물어?

-……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일을 예견하고 있었어요. 외신전쟁, 이기영의 죽음과 그 이후에 일어날 사태들…. 에베리아 소멸 사태나 대륙의 던전화 같은 것들도 전부 말이에요. 모두 실리아의 카스가노 유노 님 덕분이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카스가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모든 것을 완전히 본 것은 아니옵니다. 제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극히 일부였지만… 좋은 결과로 향하는 미래에 닿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말입니다.

-네. 카스가노 님의 말이 맞아요.

-그건 지혜 씨가….

-에이, 설마 제가 정말로 그랬겠어요?

-…….

-상냥한 제가 정말로 그런 무시무시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니죠?

-네… 지혜 씨가 그럴 리가… 없겠죠. 네….

-누군가는 이 일을 악마의 눈에 닿지 않게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음지에서 활동해야 했죠. 어려웠어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저희는 한 가지 목적을 향해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죠.

-그게….

-빛의 아들의 부활.

-가능한 일입니까?

-네. 가능하다마다요. 설계도를 넘겨준 건 카스가노 유노와 오빠예요. 저와 저희 멤버들은 열차가 달릴 수 있는 레일을 마련한 거죠. 목적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이고… 확인한 것이라고는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이었지만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닿을 수 있었답니다. 대륙은 지금 철도 위를 달리고 있어요. 여러 가지를 설명해 드리고 싶지만 아쉽게도 전부 설명드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네요.

-다행입니다.

-네?

-지혜 씨가….

-제 성격 잘 아시잖아요?

진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는 솜씨가 일품이야.

어떻게 눈 한 번도 안 깜빡이고 거짓말을 저렇게 해.

혜진이도 조금 이상하다는 거 눈치챈 것 같은데 누나가 워낙 당당하니까 헷갈려 하잖아.

‘대단해 진짜.’

당장에라도 누나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누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빨리 도장 찍는 게 좋지 않을까.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잠깐 오빠랑 이야기 좀 해도 될까요?”

“아… 네.”

조용히 창을 넘기는 조혜진이 눈에 보인다. 이지혜는 조심스럽게 창을 받아든다.

커다랗게 숨을 몰아쉰 그녀는 욕을 퍼붓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조용히 눈을 감은 이후에 다시 한번 숨을 가다듬었다.

어울리지 않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모양, 아무래도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할 것 같다.

“잘 있었어? 누나? 내 사랑. 내 영혼의 단짝.”

-물론 잘 있었죠. 오빠. 내 사랑. 내 소울 메이트.

히죽거리는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쓰레기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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