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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63화 (854/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63화

마지막 (96)

-남은 게 그것밖에 없다고.

‘아니, 너한테 왜 남은 게 그것밖에 없어. 남은 게 얼마나 많은데 그래.’

-그러니까 내놔.

-……

-내놔! 이 역겨운 새끼야!

‘그리고 아까부터 왜 이렇게 욕을 많이 해. 바른 말 고운 말 써야지.’

-나한테 남은 건….

‘근데 얘 어떻게 해. 진짜 그렇게 생각하나 봐.’

물론, 어째서 김현성이 저런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로 3회야?’

진짜로 마음먹었나 봐.

녀석은 내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지 않았지만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했다.

아마 빛의 성자가 무거운 짐을 지게 하지 않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더 이상 빛의 아들과 짐을 공유하지 않겠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김현성의 생각대로 3회 차가 시작된다면 아마 나는 녀석과 만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내 기억이 온전할 것인지 온전하지 않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김현성은 나를 피해 다닐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짐을 혼자 들어 올리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녀석의 어처구니없는 3회 차 계획은 처음부터 나를 만나지 않는다는 게 기본 전제로 깔려 있었다.

튜토리얼도.

‘정말?’

던전 탐험도 마찬가지네.

‘혼자 가게?’

3회 차의 김현성은 파란 길드에도 입단하지 않을 것이다.

‘파란 길드도 버릴 생각이야. 우습네. 세력도 없이 싸우겠다고. 그게 가능할 것 같아? 혼자서 다 하시겠다고.’

교국혁명이랑….

‘공화국 전쟁도 혼자 처리해? 27군단 소환사태는 어떻게 할 건데. 달라진 미래는 어떤 식으로 대응할 거야? 세세하게 대응할 수 있겠어?’

에베리아 문제랑 균열박물관도. 외신전쟁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처리하겠다 이거네.

당황스러워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김현성의 생각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웃음이 나온다.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김현성이 1회 차보다 성장했다고 한들, 지금의 격을 가지고 1회 차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들, 그 모든 일을 혼자, 숨어서 처리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저 멍청한 새끼는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욕심 많은 새끼. 그림자의 영웅까지 지가 먹으시겠다.’

기어코 진청이 설 자리까지 빼앗으시겠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빛의 성자가 받은 고통과 이 대륙에서 일어난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 때문이라 생각하는 녀석다웠다.

아예 대륙의 자신의 존재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혼자서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들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김현성은 내가 판단하기로는 이상적인 영웅상이기는 했지만.

잘 흔들리고, 외로움을 많이 타고, 겁이 많고, 우유부단했으니까.

어디 그것뿐이랴. 뒤통수는 무방비에 멘탈도 약하다. 꽂히는 게 있으면 앞뒤 안 보고 달려들고, 금전 감각조차 없다.

어차피 사회생활과는 담을 쌓은 놈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사회성도 너무 떨어지지.

물론 이 새끼가 그림자의 영웅 행세를 하겠다면 다른 사람과 마주칠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정도라는 게 있어야 되잖아.

김현성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정신력으로 3회 차라는 지옥을, 그림자의 영웅으로 버틴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본인이 원하는 미래와 멀어진다는 것과, 본인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 싸움은 길고 힘들 것이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귀자 사용설명서. 하나는 들고 가겠다. 이거지.’

그게 3회 차를 버틸 수 있게 해줄 유일한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원동력이라기보다는 유일한 위안으로 삼을 작정인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싸움이 시작돼도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과 유대감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 그나마 기댈 구석이 생긴다는 게 자신의 원동력과 안식처가 되어줄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는 거다.

‘아니, 어차피 회사설로 연결되어 있을 텐데… 내가 못 찾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뭐야. 지가 그런 거 처리할 깜냥은 돼? 회귀자 사용설명서는 네 거가 아니라 내 거야. 무슨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라고. 빛의 성자는 모든 걸 알고 있어요. 그대로 3회 차 가도 내가 모를 줄 아나 봐. 처음에는 어떨지 몰라도… 결국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이건 내 거니까.’

어디 그것뿐이랴.

‘저게 빠진 상태로 회귀한다고 해도 연결 안 끊겨요.’

물론 송수경이 내 것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회귀가 시작된다면 회귀자 사용설명서를 잃게 되겠다는 불안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몸이 아니라 영혼에 새겨진 특성이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잖아. 저건 그냥 아이템이라고.

‘아니, 송수경한테 달린 채로 회귀할 수도 있는 건가? 그건 아닐 텐데.’

가능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희박하다. 오류나 버그라도 끼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는 거지.

“아주 괘씸해. 3회 차는 개뿔.”

내가 분명히 3회 차는 없다고 말했는데. 아주 괘씸하다고.

저것도 병이다.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자신을 채워줄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겠지만 알콜 중독자처럼 술에 의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결국에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된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것도 웃기지만 저것밖에 남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 김현성이 조금 서글퍼지기도 했다.

녀석이 저렇게 필사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유에는 아마 그런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리라.

-내놔!! 돌려… 줘!!!

-…….

콰아아아아아아앙!!!

다시 한번 이형의 짐승들에게 검을 뻗는 김현성의 모습이 보인다.

아까보다 더 필사적이지만 적은 죽지 않고 분열하거나 계속해서 김현성이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송수경의 신전은 점점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고 이윽고 한 도시마저 완전히 삼킬 정도가 됐을 때에는 군단에 가까운 악마들이 녀석을 가로막는 게 보였다.

흔하고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 모습은 마치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해 싸우는 이상적인 영웅의 서사를 그린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영웅은 눈물을 흘리며 검을 휘두른다. 입술을 꽉 깨물며 몸을 쉬지 않는다.

으스러지고 넘어지고 지쳐도 녀석은 다시 한번 일어나 끝끝내 노을빛으로 어두워진 장내를 비춘다.

환하게. 더 환하게 계속해서 비춘다. 놈의 목적 자체는 다소 불경하기는 했지만 그 겉모습만큼은 이 순간 힘들어하고 있는 모두를 비추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녀석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숨을 쉬는 것도 잊게 만들 정도로 너무나도 소름 돋는 광경이었다.

김현성은 손을 멈추지 않는다.

북부에서 희미한 빛이 점점 더 쏟아진다.

이벤트가 실패한 페널티를 받고 있는 대륙 때문인지 김현성은 전보다 더 초조한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계속해서 괴물들을 베어 넘기면서도 시선은 돌리지 않는다. 목적은 명확했고, 다른 건 전혀 상관하지 않았으니까.

조금씩 조금씩 김현성이 머리를 부여잡고 흔드는 것이 보인다.

-네 거 아니라고 말했잖아!

송수경이 녀석의 정신에 침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요. 분명히 이제는 제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아니, 그건 네 힘이 아니야. 네가 얻은 것도 아니고, 네게 허락된 것도 아니야. 그러니 내놔. 꺼져. 나가라고. 개자식. 너를 위해 준비된 게 아니야. 내 머릿속에서 나가! 이 개새끼야!

-이제는 제 것입니다. 아니, 제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 힘은 올바른 곳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느껴지십니까. 이 힘이야말로 당신을 완전하게 만드는 열쇠입니다. 이 힘이 있으므로 인해 당신은 완전해질 수 있는 겁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기영은 이 힘으로 당신을 약해지게 만들었지만 저는 다르다고요.

-이 추악한 괴물 새끼.

‘계속되는 명대사 퍼레이드.’

정신 혼미해 지겠다. 갤러리들 절박해지는 거 봐. 우리 관객들 눈물 흘리는 것 좀 보라고. 현성아.

-대신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그가 될 수 있어요. 그가 하지 못하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너는 절대로 기영 씨가 될 수 없어.

-아니요. 될 수 있습니다. 저를 죽인다면 말입니다. 제 자신을 죽일 수 있다면 저는 충분히 이기영이 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넌 죽게 될 거다. 쓰레기 같은 놈.

-의미 있는 죽음이 될 겁니다. 네. 아주 의미 있는 죽음 말입니다. 영광스럽고 숭고하고, 이 대륙을 위한 죽음이! 그의 육신과 영혼을 모두 취하고 저는 저를 죽이겠습니다. 노을빛의 신이시여.

-미친….

녀석이 천천히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한쪽 손을 뻗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녀석의 손짓으로 기괴한 모양의 탑이 계속해서 뻗어 나간다.

송수경은 위를 바라보며 황홀한 미소를 짓는다.

김현성 역시 촉수와 이형의 물체들로 이루어진, 마치 녀석이 신전의 상징처럼 자리 잡은 이형의 탑을 바라보는 중.

그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는 이미 확인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울상이었던 얼굴이 더 일그러졌으니까. 녀석의 비참했던 얼굴이 더 절망적인 모습으로 변했으니까.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저 역시 완전해질 수 있어요. 빛의 아들의 영혼을 제 것으로 만들 겁니다. 그의 영혼을 취하고 그도 저도 아닌 존재로 새로 태어날 겁니다. 제가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달라요. 이제는 정말로 완전해질 겁니다.”

“…….”

“당신도 저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결국에는 제가 옳았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실 거란 말입니다.”

일단은 정신 못 차리는 게 나을 것 같다. 구질구질한 신파극을 찍기에는 상황이 적절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상황이 과하기는 해.’

연출이 조금 자극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원래 자극적이고 과한 게 극단적으로 땡기기 좋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역겨운 이물질로 이루어진 탑의 꼭대기 위에 묶인 빛의 아들의 영혼, 그 영혼을 취하기 위해 자신이 만든 신전 위에서 웃음치고 있는 빌런, 어떻게든 빛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영웅.

물론 내 영혼이 실제로 빼앗기지 않겠지만 이런 장면은 충분히 자극적이다.

사람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안 그래도 모든 걸 희생하고 그 시신까지 욕보여진 베니고어의 아들, 그 아들의 영혼마저 위협받고 있는 상황.

적은 너무 강하고 인류들에게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상황이다.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노을빛의 검사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다.

기도를 보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여기저기에서 울부짖고 있는 사람들이 시야에 비친다.

절박한 얼굴로 응원을 보내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곧바로 귀에 들어오는 것 같다.

‘제발….’

제발 노을빛의 영웅이 승리하기를.

‘제발.’

제발 빛의 아들의 몸과 영혼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우리의 믿음으로 대륙과 노을빛의 신과, 빛의 아들이 구원받을 수 있기를.’

우리의 작은 기도가 제발 그들에게 닿기를. 제발 그들에게 커다란 힘이 되기를… 그들에게 닿기를.

‘닿고 있어요. 여러분.’

닿고 있답니다. 너무나도 확실하고 크게 닿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주신 응원과 성원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빛 줘.

‘빛 줘!’

김현성은 입을 열었다.

“기… 기영 씨.”

“…….”

“기영 씨? 기영… 기영 씨….”

나도 장단을 맞춰줘야지.

나는 천천히 눈을 뜨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제발….”

라고.

그렇게.

몸이 성스러운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쏟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여러분의 큰 성원 절대로 잊지 않을게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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