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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65화 (856/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65화

마지막 (98)

-라파엘… 만약 이번 일이 끝나면… 우리.

-그래. 마리엔. 같이 형을 만나러 가자.

-…….

-모두들 고마워.

-길을 뚫는 것은 내가 도와주지.

“…….”

“…….”

“연수야. 언니 손 좀 펴줄래?”

“넷. 언니.”

“진짜로 펴달라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 죄… 죄송해요. 제가….”

“아니야. 사과받으려고 말한 것도 아닌데. 아니, 안 그래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쟤네는 왜 또 저기서 유아용 모험 활극을 찍고 자빠졌다니? 어떻게 저런 대사를 제정신으로 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네. 특히 이주혁 쟤. 쟤는 컨셉이 아니라 진짜야. 네 눈에도 그렇게 보이지?”

“아… 네. 확실히 저건….”

“쌍둥이들이 묘하게 좋아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는 거야. 쟤도 그 뭐야. 달을 부수는 자에 가입되어 있는 거 아니야?”

“…….”

“…….”

“아. 그나저나 라파엘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언니?”

“글쎄. 일단 최대한 막아보기는 하는데. 저거 막을 수 있나 몰라. 굳이 이쪽에서 뭐 할 필요는 없을 거야. 지금 똥줄 타는 건 내가 아니라 오빠잖니. 아마 알아서….”

-누나. 저 미친놈들 봤어?

“그게 아닌 모양이네… 얘도 참 손이 많이 간다니까.”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여신의 거울을 통해 입을 여는 빛의 아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언니를 향해 다급하게 목소리를 보내고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가식적으로 보인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과민반응하지 마요.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잖아요.”

-웬만하면 못 오게 해. 현성이 정신 사나워져. 안 그래도 얘 지금 심란한데 왜 더 심란하게 만들고 그래. 걔까지 오면 안 돼. 아니, 걔는 걘데. 라이오스로 간다는 건 봤어? 하얀이. 하얀이는 제발 어떻게….

“네, 네. 그래요. 오빠 마음 충분히 알겠네요. 저도 그 미친년은 무서우니까. 진짜로 대륙 멸망에 한 발자국 들어서고 싶은 마음은 없네요.”

-나 감정 잡아야 돼서 다른 데 집중 못 하는 거 알지? 지금 여기 일로도 너무 바빠서… 누나가 좀 처리해 줄 거라고 믿어. 아, 누나 혹시 신성은….

“굳이 지금 정산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모여들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실시간이라고요. 초 단위로 앞자리가 바뀌고 있으니까. 일단 이것 좀 정리해 놓는 게 좋겠네요. 혹시라도 쓸 일 있으면 쓸 수 있게 정리 좀 해놔야겠죠? 위쪽에서도 준비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벨 씨는 바쁠 테고 베 씨는 조금… 그러니까 제가 처리할게요.”

-좋네. 아무튼 누나만 믿을게.

“너무 믿지 마세요. 상황을 컨트롤 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면 더 무리가 있다고요.”

-그래도.

“보고 계시겠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쇼에 대한 각국과 여러 집단에 대한 반응 보내드렸어요. 교국은 굳이 보실 필요 없지만 공화국 쪽에서 수금되는 속도가 조금 느리네요.”

-그림자 영웅 투입해서 좀 감정에 호소하는 게 좋겠네. 채널 연결해 놓을 테니까.

“홍보 영상 짧게 하나 제작해서 송출할게요. 로노베에게 부탁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고요. 예상했던 범위 내에서 오차는 있지만 대부분의 반응이 긍정적이에요. 사방팔방에서 모여들고 있으니까. 라이오스 쪽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아무튼 그렇네요. 잘해봐요. 오빠.”

-응, 누나. 항상 고마워.

“저도요. 사랑하고 고마워요.”

조용히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는 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면 속에 있는 회색빛의 용사는 붉은 날개를 달고 있는 악마들을 떨쳐내고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검으로 적들을 베어 넘기는, 그 모습은 뭐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필사적으로 보여 자신도 모르게 응원을 하게 될 정도였다.

“이거 막기 어렵겠는데… 잘 안 되네. 따지고 보면 이 회색 병아리도 엄연히 벽을 넘은 사람인데… 이게 쉬울 리가 있겠어. 이미 통신 채널도 끊어서 연락할 방법이 없어. 마리엔이랑 이주혁도 마찬가지지?”

“네.”

하지만 그 장면은 수많은 거울의 단면에 불과했다.

방 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거울에 각 도시는 물론이거니와 대륙 전체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라이오스에서는 아직도 마법의 신과 마법의 천사가 거대한 마력을 막아내고 있었고 전선 곳곳에서는 쉬지 않고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성스러운 전투다! 성전이다! 신은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악마에게 굴복하지 마라. 대륙의 우리 기사단이 살아 있음을 알리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나의 형제자매들아.

-빛의 아들과 베니고어 여신님을 위해 싸워!

-절대로 물러서지 마라.

-공화국을 위하여! 그림자의 영웅을 위해 싸우자!

-로렌이시여. 가호를 내려주시옵소서. 전장으로 향하는 우리의 아들딸들을 위해. 힘을 보내주시옵소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은 필사적으로 기도를 올린다. 아니, 이미 전투에 휩쓸려 폐허가 된 도시에 남은 이들도, 지하실이나 건물 안에 들어가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있었다.

작은 석상을 올려놓고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거나, 목에 걸린 로자리오를 움켜쥔 이들도 결코 적지 않다.

전쟁터에는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시민들 역시 떨리는 손으로 검과 방패를 들어 올린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대륙을 지키기 위해.

그들 역시 소중한 이들과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인사를 나눈다.

‘이게….’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너무 당황스러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이게 저 사람들이 만든 무대고 연극인 거야.’

이기영과 이지혜가 대륙이라는 무대 위에 각각의 인물들에게 배역을 만들어 집어넣은 연극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저 처절하고 숭고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상황들이… 저 두 사람이 만든 엔터테인먼트 쇼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쏟아지는 빛들과 천사들, 몬스터와 뒤엉켜 싸우는 모험가들, 도시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는 용병들과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이들까지.

이 모든 것이 잘 짜여진 각본을 따라 흘러가는 희극이었다.

대륙에 믿겨지지 않는 일들을 일으키는 이들이 간혹 존재한다.

지금 계속해서 붉은색 악마들을 베어 넘기고 있는 회색빛의 용사,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참고 있는 대마법사,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며 얼굴을 구기고 있는 용병여왕이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교국의 지도자, 엘프들을 이끌고 전선의 한쪽을 책임지고 있는 엘프 공주도 있다.

이들 만큼은 아니지만 대륙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이들은 수 없이 많다.

교국 8좌, 공화국의 대장군들, 연방과 연합의 무력집단.

하지만 이 모든 이들 역시 저 두 사람에 비하면 너무나도 보잘것없어 보인다.

‘두 명이서….’

대륙을 가지고 놀고 있는 거야.

놀이터로 생각하고 주사위를 던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니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장기말을 옮기고, 장기말이 자신들의 영향력 바깥으로 넘어가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적이 될 사람들까지 자신들이 선택하고 손바닥 위에서 조종하고 종국에는 그들을 파멸로 이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다.

언니가 이런 사람이라는 건 애초에 알고 있었다. 자신이 따르기로 한 여자가 본래부터 이런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니… 심지어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대륙이 무대가 되어버린 이 상황을 한눈에 담고 있다는 건 평범한 자신에게는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으로 모자라 여러 가지 종류의 혼란을 느끼게 했다.

너무 생각이 많아졌던 탓이었을까. 턱을 괴고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는 이지혜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연수야. 보고 있으니까 어때?”

“네?”

“저거 보고 있으니까 어떠냐고.”

“글쎄요. 그냥… 안심되는 것 같아요.”

“왜?”

“저는 언니 옆에 있으니까요. 저곳이 아니라.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알고 있으니까요. 최소한 저는….”

‘장기 말이 아니니까요.’

극단적으로 말해 하연수라는 인간은 저 무대를 떠받치고 있는 부품일지도 모른다.

이기영과 이지혜 밑에서 그들이 만들어놓은 철로에 있는 쇳덩어리 정도일지도 모르지.

언니는 나를 아낀다고 말해줬지만 그냥 아끼는 부품이라고 판단할지도 몰라.

하지만 장기 말이 아니라는 것은, 다른 어떠한 사실보다 안도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느끼는 게 중요한 거야. 너무 깊게 생각하는 건 가끔 안 좋더라고. 아! 내 정신 좀 봐. 공화국 쪽에 병력 좀 더 투입해야겠네. 메인이벤트도 사실상 끝났고… 으음… 혹시 카스가노 유노 님 좀 불러다 줄래?”

“네.”

천천히 문을 열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이미 알고 있었나 봐.’

“아. 유노 님.”

“네.”

“안내해 드릴게요. 혹시 조혜진 님은….”

“선희영 님과 함께 아직도 대화를 나누시는 중입니다. 현재 노을빛의 검사가 계신 곳으로 향하고 싶어 하셔서…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 여쭙고자 하시는 것 같더군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그나저나…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주셨네요.”

“…….”

‘대화하기 불편해.’

사실 이 여자가 가장 소름 끼친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찾으셨습니까. 이지혜 님.”

“네. 카스가노 님.”

슬쩍 이쪽을 바라보는 카스가노 유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저는 나가 있는 게 좋을까요?”

“아니야. 연수야. 여기 앉아 있어도 돼.”

이상한 부분에서 입꼬리가 올라간다. 미래를 보는 무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마 뒤바뀐 것에 대해서 궁금하시겠지요.”

“네. 맞아요. 어느 정도까지의 변수가 허용되는지, 과정에 변화가 온다고 해서 미래가 변하지 않는 건지가 궁금하네요. 솔직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거든요. 회색 쪽은 어떻게든 처리가 될 것 같은데. 린델이 자랑하는 우리 붉은 여왕님께서도 달리고 계신 것 같아서요.”

“…….”

“…….”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근거는?”

“끝에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써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것뿐입니다. 이지혜 님. 모든 건 주인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흘러가실 것입니다.”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용히 시선을 여신의 거울 쪽을 바라본 이후에는 몸을 일으켜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어떤 계산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카스가노 유노는 뻥 뚫린 동공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으….’

“그리고 조혜진 님께서….”

“우리도 가죠.”

“네? 언니?”

“우리도 가요. 어차피 막을 수 없다면 이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으니까.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맞는 것 같아. 어차피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고, 슬슬 우리도 세탁기에 들어가야지. 다른 건 몰라도 에베리아 사건은 조금 그렇잖니. 대륙의 멸망을 예견하고 먼저 움직이고 있었던 수호자들이라는 걸로.”

“이유는 그것뿐인가요?”

“항상 그렇듯.”

“…….”

“조금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았을 뿐이야. 오빠 말처럼. 주사위를 던져야 하는데 던지지 않는 건 바보나 하는 일이잖니. 이기는 내기니까 당연할 뿐이야. 아. 가기 전에 정하얀한테… 아니, 한소라한테 채널 연결해. 상황 설명하고 바로 들어갈 테니까.”

‘저기로 간다고?’

붉은 신전의 위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노을빛의 신과 영혼이 뜯겨져 나가고 있는 빛의 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영 씨… 기영 씨!!!

-아아아아악…!

공허한 얼굴로 그 장면을 바라보는 카스가노 유노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주인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언제나 그랬지만 이상하게 소름 끼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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