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867화
마지막 (100)
“놓아줘.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제발….”
‘뭐 해, 너.’
“이미 충분히 고통받은 사람이야. 괴롭힐 만큼 괴롭혔잖아. 네가 원하는 걸 전부 가져갔잖아. 그, 그렇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왜 테러리스트랑 협상을 하려고 그래. 인질이 잡혀 있어도 이러면 안 되지.’
“여기까지만 해줘. 더 이상은….”
‘애초에 협상이 될 리도 없는데.’
무릎을 꿇은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리 봐도 추진력을 얻기 위함은 아니다.
‘싸워야지.’
저 미친놈이랑 대화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넌센스.
송수경이 원하는 것은 아마 노을빛의 신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녀석의 옆자리를 차지한다는 원대한 목표도 있겠지만… 후자는 부수적인 목표일 가능성이 높다.
녀석에게서 노을빛의 신이라는 건 더욱더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분명히 전자에 더 힘을 쏟아붓고 있을 것이다.
당연 김현성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놈의 마음을 움직일 리가 없다.
이미 완전히 악마에게 잠식당한 것으로 모자라 악마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송수경은 정상적으로 상황을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마 지금의 김현성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기영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을 수도 있지. 자신이 이상으로 생각하던 존재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을 테니까.
그만큼 김현성의 지금 보여주는 모습은 노을빛의 신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모시고 떠받들어야 되는 존재가 아닌 약하고 무너질 것처럼 보이는 모습, 얼굴에는 공포와 두려움과 불안감이 들어서 있었고 으스러진 갑옷은 빈약해 보이기 그지없다.
검을 잡고 있는 손은 힘을 주고 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힘이 없어 보인다.
이미 전투 의지를 상실한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거 아니야. 네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이 사이코를 더 자극할 거라는 거 알고 있잖아. 김현성 이 새끼 지금 사리분별이 안 되나 봐.’
정말로 빛의 아들이 영혼을 빼앗기는 경우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는 거겠지.’
그냥 이 모든 상황이 무서웠을 테니까. 자신이 고통받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이기영이 다시 한번 고통 받는 것은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녀석과 검을 맞대는 것이 결국에는 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다.
이기영이 영혼을 먹히고 3회 차에 함께할 수 없게 될 가능성.
회귀자 사용설명서뿐만이 아니라 빛의 아들의 존재가 영원히 사라지게 될 가능성.
여러 가지 불안 요소들은 실타래처럼 꼬여 거미줄마냥 김현성을 꽁꽁 묶고 있을 것이다.
김현성답지 않은 행동이지만, 놈의 무의식은 감정에 호소하는 선택지가 가장 합리적이라 결정한 것이다.
그런 김현성에게 송빌런이 보낼 반응은 뻔하지 않은가.
“…….”
“제발… 제… 제발….”
“쓸데없는 짓 입니다.”
“부탁….”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노을빛의 신이시여.”
최대한 침착하게 김현성을 내려다 보고 있었지만 놈이 동요하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
“당신답지 않습니다. 지금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
“저는 당신이 쓰러뜨려야 할 적이 아닙니까. 적에게 구걸하다니요. 제가 당신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기영 씨를 놔줘.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지… 네가 정말로 나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내 부탁을 들어줘. 제발….”
송수경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이 사이코패스 새끼. 절대로 빛은 너한테 굴복하지 않아.’
라는 눈빛을 담아 놈을 노려본다. 아주 작은 빛이라도 어둠을 밝힐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 거지. 지금 나라도 이런 포지션을 취해야 하잖아.
대륙인들이 이거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적당히 희망찬 상황이 벌이가 잘 되는 거지. 너무 절망적이면 보이는 그림이 조금 그래.
솔직히 현성이도 선 많이 넘었어. 노을빛의 신이, 시바, 저런다는 게 말이나 돼.
나는 이해해 줄 수 있는데. 평범한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다고.
“네가. 네가 정말로 구원자를 바라고 있다면 구원자가 되어줄 수 있어… 그러니까….”
“…….”
“그 사람은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이미… 이미 모든 걸 잃은 사람이잖아. 굳이… 네가 신경 쓸 만한 사람은 아니잖아. 정말로 기영… 아니 저 사람이 나를 망친 거라고 생각한다면 다시는….”
‘뭐 이 새끼야. 끝까지 말해. 시바. 손절 선언한 거 실화야?’
“제발….”
송수경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내 머리채를 붙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그만! 그… 그만해! 제발… 제발!”
다소 거칠게 행동한 것과는 다르게 놈의 눈동자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뭐야. 이 새끼는 또 왜 이래.’
“제길….”
하는 낮은 목소리로 나와 김현성을 번갈아 보는 놈의 얼굴에 혼란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포인트에 꽂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고민할 껀덕지가 뭐가 있어. 그냥 먹어버리면 되지. 시바. 뭐가 문제야.’
녀석은 빛의 아들의 영혼을 취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째서 녀석이 저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비참해진 김현성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으니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치달은 상태잖아. 여기까지 온 이상 무라도 썰어야지.
너한테 다른 선택지가 있어? 열 받을 거 아니야.
완전해진 김현성 대신 네 눈앞에 있는 건 너무나도 허약한 인간인데. 화가 나지도 않아?
네가 지금 동정심을 느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지. 느끼려면 진작 느꼈어야지.
솔직히 송수경이 김현성을 동정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사이코패스가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자꾸만 주변을 둘러보는 게 보인다. 본인이 만든 참상을 바라보며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돌린다.
‘아….’
시바.
이 사이코패스 빌런한테도 한 줌의 인간성이 남아 있었던 것인가.
송수경 안에 자리해 있던, 이미 꺼져 버렸다고 생각한 아주 작은 빛이 어둠을 몰아내려 시동을 걸려고 하는 것인가.
악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자신의 선택에 대한 후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조금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놈에게 남아 있었던 아주 자그마한 반딧불이 힘찬 날갯짓을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씨발 새끼. 어림도 없지.’
이미 어둠에 먹힌 새끼가 갑자기 여기서 깨어나지 마. 아주 작은 희망의 등불, 그런 거 움직이지 말라고.
‘벨 이사 뭐 해! 핏덩이한테 발릴 거야?’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돼?
한 손으로 내 얼굴을 움켜쥔 놈의 손이 보인다.
최대한 얼굴을 비틀어 놈의 손을 꽉 깨물었다.
‘정신 차려! 빛한테 지지 말라고 새끼야.’
“이 개새끼!!”
퍼억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이 돌아간다.
“이 개 같은 새끼가!”
‘돌아왔구나. 송수경이. 이겨낸 거구나. 웃으면서 맞아줄 수 있다.’
“이 추악하고 무능력한 새끼! 네가 망친 거야. 네가 망친 거라고! 모든 걸! 봐. 저기 노을빛의 신의 모습을 보라고. 고개를 들어. 이 개자식. 저게 네가 바라던 노을빛의 신의 모습이야? 저 허약한 인간이… 네가 원한 노을빛의 신의 모습이야? 모든 게 네 탓이야!”
“하지… 하지… 마!”
“그 입 다무십시오! 노을빛의 신이시여! 모든 게 이자의 탓이라 이 말입니다. 모든 게! 이 추악한 괴물이 저를…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씨발. 모든 게 이 가식으로 똘똘 뭉친 개자식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분수에 맞지 않게 당신의 옆에 서 있었던 이 개새끼 때문이야! 도대체 뭐가 그렇게 중요한 거야. 제기랄! 어째서 그러는 거야. 어째서 당신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거야. 나한테 그런 모습을 보이지 마. 그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지 마! 동정을 구걸하지 말라고!”
“…….”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노을빛의 신이시여! 어째서 제게 이런 시련을 내려주시냔 말입니까! 어째서 그런 당신의 모습을 제가 봐야 하는 겁니까! 나는 그저! 나는… 나는 그저….”
“…….”
“하아… 하아… 하아….”
“…….”
“소용없습니다. 노을빛의 신이시여.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의미 없는 행동이란 말입니다.”
“…….”
끝끝내 어둠에 굴복해 버린 녀석의 모습은 굉장히 슬퍼 보인다. 저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맺힐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송수경에 안에 있었던 작은 반딧불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인간 송수경에 대한 성자의 동정심이었다.
녀석은 이미 악마에게 완전히 먹혀 버렸지만 티 없이 맑은 빛은 그런 녀석에게도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
“어떤 의미야. 이기영.”
“당신은….”
“네까짓 게 감히….”
“당신은 참 불쌍한 사람이군요.”
“뭐?”
“가엽고 외로운 사람.”
송수경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구겨진다. 본인이 혐오하던 이에게 동정 받는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을까.
“뭐… 뭐라고?”
빛의 아들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녀석의 마음을, 녀석의 비통한 심정을, 녀석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더럽혀진 영혼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네까짓 게… 네까짓 게 나를 무시해?”
“…….”
“넌 실패자야. 이기영. 패배자라고… 내게 모든 걸 다 빼앗긴 네가 어떻게 나를 동정할 수 있겠어. 응? 네놈은 실패한 거야. 대륙을 둘러 봐! 네놈이 지키자고 했던 대륙의 모습이야. 네놈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거야. 네 죽음은 가치 없는 죽음이었고, 네 개 같은 희생 또한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된 거야. 그런 주제에….”
“제 희생은… 저의 죽음은 가치 없는 일이 아닙니다. 더럽혀진 영혼이여.”
“웃기지 마.”
“제 희생은 분명히 가치 없는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웃기지 마!!”
“저는 인간을 믿습니다. 그들이 가진 가능성을 믿고 어떠한 어려움도 헤쳐 나갈 거라고… 믿어요. 그들이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날 거라고 믿고, 그들이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쓸데없이 비칠 수도 있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사실을 알아준다면 그것은 가치 없는 일이 아닐 겁니다.”
“노을빛의 신은….”
“저게 노을빛의 검사의… 제가 아는 현성 씨의 모습이에요.”
녀석은 약한 김현성을 부정하지만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이게 너와 나의 차이야.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라고.
“부러지기 쉽고, 약하고, 쉽게 흔들리고, 가끔… 가끔은 답답해질 때도 있습니다.”
“…….”
“하지만….”
“…….”
“하지만 언제나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에요.”
그게 영웅이지.
“언제나 검을 들어 올리고 자신을 극복하고, 더욱더 단단해지고, 계속해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게 회귀자야.
“저는… 저는 믿습니다.”
그게 내가 선택한 회귀자라니까.
그게 내가 만든 회귀자야.
빛의 아들은 고개를 숙인다. 끝까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영혼이 악의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히는 순간에도,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마치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조용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