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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68화 (859/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68화

시나리오의 끝 (1)

“저게 노을빛의 검사의… 제가 아는 현성 씨의 모습이에요.”

네. 이게 제 모습입니다.

“부러지기 쉽고, 약하고, 쉽게 흔들리고, 가끔… 가끔은 답답해질 때도 있습니다.”

부러지기 쉽고, 약하고, 쉽게 흔들리고 가끔은, 아니, 어쩌면 매번 당신을 답답하게 만들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언제나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에요.”

이번에는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어요. 언제나 저는 혼자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저를 일으켜 세운 거예요.

“언제나 검을 들어 올리고 자신을 극복하고, 더욱더 단단해지고, 계속해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사람입니다.”

과대평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극복하고 단단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냥 발버둥 쳤던 거예요. 그냥 벗어나기 위해서 도망치고 도망친 것뿐입니다.

제 본의로 온 게 아닙니다. 저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어요. 그걸 가르쳐 준 것은 당신입니다.

“저는… 저는 믿습니다.”

저는 기대에 부응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였다.

끝까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던 그는 자기 자신의 영혼이 악마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히는 순간에도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믿는다는 듯, 나를 믿는다는 듯이… 그렇게 웃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아… 흐윽… 흐으윽….”

발버둥 쳐봤지만 닿지 않는다. 계속해서 검을 휘둘러 봤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은 저 자리에 닿을 수가 없었다.

매번 그랬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단 한 번도 닿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김현성의 삶과 인생은 닿지 못하는 것의 연속이었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싸우고 투쟁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투쟁은 닿지 못하는 것의 연속이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엇에 닿아야 하는지조차 깨달을 수 없었지만, 누군가가 내 인생을 들여다본다면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 계속해서 한 자리를 달리고 있는 듯이 보일 것이다.

정말로 자신은 커다란 원통 안을 끊임없이 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없었다면 계속해서 어두운 통 안을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김현성의 제자리걸음을 끝낸 사람은 이기영이었다. 보일 듯 보이지 않은 길에 첫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빛의 아들이라 불리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김현성이라는 인간은 조금씩 성장하고 한 걸음을 더 내디디고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서 있게 됐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모두 그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파란 길드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도,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웃고 떠들 수 있게 된 것도, 대륙에서의 삶을 즐길 수 있게 된 것도 말이다.

힘든 기억들을 잊을 수 있던 것도,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도 역시 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힘든 투쟁과 삶을 견디게 해준 것은 매번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도 자신이 똑바로 앞을 바라보고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던 빛 때문이었다.

물론 그 빛이 비추고 있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지만….

그 빛이 비추고 있는 것은 대륙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자신이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윽… 흐으으윽….”

거대한 이형의 탑과 융합하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저게 어떤 걸 뜻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발버둥 쳐봤지만 여전히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곳에 붉은 날개를 달고 있는 악마에게 거대한 탑이 통째로 달라붙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미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변한 그 괴물의 왼쪽 가슴에는 회색으로 변해버린 빛의 아들이 박제되어 있었다.

이미 혼을 잃어버린 듯이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은 그 육체는 마치 목석처럼 느껴졌다.

거대한 팔이 휘둘러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저편으로 날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다시 일으켜 검을 붙잡았지만 어째서인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저는 믿습니다.’

도대체….

도대체 무엇을 믿으시는 겁니까. 이 지경이 되면서까지 도대체 무엇을 믿고 계신 겁니까.

기영 씨도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잖아요.

제가 형편없는 놈이라는 거, 응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거,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른다는 거, 사실은 대륙 같은 건 관심도 없다는 거 알고 계시잖아요.

‘저는 믿습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저는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처럼 모든 걸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싫습니다. 당신을 이렇게 만든 이곳이 원망스러워요. 모든 걸 빼앗아간 이곳이 너무나도 증오스럽습니다.

당신이 아끼고 사랑하던 것들은 제 눈에는 전부 썩어 문드러진 것들처럼 보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그 말은 이제는 저주에요. 저를 지탱하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흐윽… 어째서… 어째서 저를 믿어주시는 겁니까. 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을 버리려고 한다는 것도 모두 알고 계셨잖아요. 당신이 아끼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려고… 저는 이제 이곳을 원하지 않아요.”

‘저는 믿습니다.’

“이제 그만하세요. 더 이상 저를 믿지 마세요. 흐윽… 흐으윽… 제발… 저를 믿지 않아도 좋으니 돌아오세요. 그런 것 상관없으니 그냥 돌아오세요. 사라지지 말란 말입니다!”

‘저는….’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보이십니까. 이게 보이십니까. 노을빛의 신이시여.”

“…….”

“이제는 제가 그가 되겠습니다. 신이시여. 그의 영혼을 취한 제가 그를 대신하겠습니다.”

“…….”

“그는 실패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삶은 가치 없고 실패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힘을 가지고 있기에는 부족한 인간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노을빛의 신이시여. 그는 당신을 무가치하게 만들었지만 제가 당신을 완전하게 만들겠습니다. 그의 헛된 죽음이 이제야 진정으로 가치 있는….”

“…….”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몸이 일으켜진다. 마치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몸은 저 목소리에 반응해 검을 들어 올리게 된다.

억지로 들어 올린 검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숨을 가다듬고 자세를 잡는다.

어려운 싸움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조용히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딛게 된다.

‘저는 믿습니다.’

“어째서 믿어주시는 겁니까. 저는 당신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말입니다. 저는 영웅이 아니에요. 저는 사실은 기영 씨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몸이 튕겨 나간다. 숨이 턱 하고 멈춰진다. 온몸에 고통스러운 통증이 느껴진다.

저도 모르게 콜록거리며 안에 있는 것들을 내뱉었다.

쓰러지고 싶어. 이대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들고 싶어.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어.

처음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상태로 되돌아갈 수도 있어. 모두 잊을 수 있어.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몸이 일으켜진다. 조용히 녀석을 응시하고 검을 들어 올리게 된다.

어째서인지는 자신도 모르겠다. 죽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미 모든 게 망가진 이 상황에서 왜 내가 싸우려고 하는 것인지 답을 내릴 수가 없다. 모든 걸 잃은 자신이 왜 검을 들어 올렸는지… 현재의 자신을 무엇이 지탱해 주고 있는지….

‘저는… 믿습니다.’

“흐윽… 흐으으윽… 아아아…아아아아아… 아흐으윽… 끄윽… 아아아… 흐윽… 네… 네에….”

그렇게 한 손으로 눈물을 닦고 검을 들어 올렸다.

이를 악물고 검을 내지른다.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귓가에 스친다.

몸을 움직이고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찾는다. 착각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저 환청을 듣고 있는 것뿐이겠지만 마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 어떻게 검을 휘둘러야 할지 전해지고 있는 것만 같다.

‘저는 믿습니다.’

“네. 네….”

‘저는 믿습니다.’

“네… 네… 네….”

거대한 기둥들이 떨어진다. 몸을 날린 이후에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른다.

차마 눈으로 전부 셀 수 없을 만큼의 마력들이 쏟아졌지만 어디로 몸을 움직여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벽에 가로막혀도, 몸을 움직일 공간이 사라져도 눈은 계속해서 다음으로 향해야 할 곳을 찾는다.

날개를 펼치자 그가 내린 빛은 계속해서 악마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따뜻한 빛이 공간을 점점 밝게 비추고 있다.

“노을빛의 신이시여. 왜 저를 부정하시는 겁니까! 저는 당신을 완전하게….”

“너는… 너는… 나를 완전하게 만들 수 없어.”

“저는 나 자신도 죽였습니다.”

“…….”

“그는 당신을 망치고 있습니다. 노을빛의 신이시여. 당신을 옳지 못한 길로 이끌고 있는 겁니다. 그는 당신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는… 그가 한 것들은 모두 당신에게는 가치 없는 일이 아닙니까. 당신 역시 그의 희생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당신을 진정으로 위하는 이가 아니란 말입니다. 신이시여.”

그가 진정으로 위하는 건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대륙을, 생명을, 이곳을, 희망과 꿈을, 빛을, 순수를, 모든 것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었으니까.

‘제 희생은 분명히 가치 없는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기영 씨의 희생은 가치 없지 않아.”

‘저는 인간을 믿습니다. 그들이 가진 가능성을 믿고 어떠한 어려움도 헤쳐 나갈 거라고… 믿어요. 그들이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날 거라고 믿고, 그들이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쓸데없이 비칠 수도 있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사실을 알아준다면 그것은 가치 없는 일이 아닐 겁니다.’

“제가… 제가 알고 있습니다.”

“…….”

“제가 알고 있어요. 기영 씨.”

제가 깨닫고 있습니다.

김현성은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섰다.

많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 했지만 틀림없이 나는 성장하고 있다.

아직은 내가 가진 가능성을 믿고 있지 못하지만 많은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모두가 그를 부정해도 자신은 그를 부정할 수 없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다.

분명히 그가 대륙에 뿌린 것들은 가치 없는 일이 아닐 것이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형의 괴물이 거대한 팔을 들어 올린다. 그 팔이 휘둘러지는 것이 눈에 보였던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이 균형을 잃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희미하게 빛나는 회색빛.

“…….”

그리고.

허공에서 마법진들이 열리며 익숙한 인형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 오… 빠….”

어깨를 붙잡은 손 너머로 시선을 돌리자 길다란 창을 들고 있는 인형이 시야에 비쳤다.

“길드마스터.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붉은 신전을 꽉 채운 인파들을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빛의 아들을 위하여!”

“빛의 아들을 위하여!!!”

어째서 그가 이 장소를 사랑하는지.

어째서, 어째서 그가 이들을 사랑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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