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869화 (860/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69화

시나리오의 끝 (2)

“혜진… 씨?”

“네. 길드마스터. 파란 길드 전원 지금 도착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

“길드마스터?”

“아닙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한쪽 어깨를 붙잡는 손이 느껴졌다.

익숙한 목소리다. 한때는 조금 시끄럽다고 느껴지기도 했던 목소리였지만… 새삼스레 마음이 편안해진다.

“거, 그동안 고생 많았다니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부터라도 맡겨주쇼. 매번 형씨에게만 의지하는 것 같아 미안합디다. 우리가 모두 함께 감당해야 하는 짐인데… 지금부터는 조금 쉬어도 된다니까.”

떨리는 손을 꽉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오빠. 미안. 내가… 내가… 흐으윽….”

“괜찮을 겁니다. 예리 씨. 저래 봬도 부길드마스터는….”

박덕구, 김예리, 안기모.

이제야 그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다.

“전선의 지휘는 이지혜 님과 김미영 팀장님께서 맡아 주실 것 같아요. 길드마스터. 최대한 빠르게 지휘 본부를 구성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저희가… 조금 늦었죠?”

“죄송합니다. 길드마스터.”

황정연, 유아영과 김창렬.

“오, 오빠는… 오, 오빠는?”

“괜, 괜찮으실 거예요. 정하얀 님. 이미 전해 들었잖아요. 그, 그러니까 일단 진정하시고… 전부 다 잘될 거예요. 그렇죠?”

“아? 아… 으… 싫, 싫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법을 유지하고 있는 정하얀과 한소라.

“저, 조혜진 님. 잠깐 이지혜 님께서….”

박리안과 신입 길드원 역시 눈에 띈다.

“오랜만입니다. 길드마스터.”

“희영 씨?”

“네. 자리를 너무 오랫동안 비워서 죄송합니다.”

“그동안….”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네….”

오랜만에 보는 선희영도 눈에 띄었다.

“저도 인사드릴게요. 길드마스터.”

“엘레나 님.”

“자주 연락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워낙에 정신이 없었던 터라….”

“아니요.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이종족들을 이끌고 있는 엘레나.

이제야 그들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서로 안부를 물어본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지만 많은 것을 주고받은 것만 같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전과는 다르게 주변의 모든 것들의 형태가 점점 더 또렷해졌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적절한 표현을 할 순 없었지만 진정된 마음은 계속해서 같은 목소리를 되새기고 있었다.

‘틀리지 않았어.’

이기영은 틀리지 않았다.

“기영 씨….”

그의 희생이 틀렸다 맞았다를 이야기하는 것은 주제넘은 행동이지만.

여전히 자신은 그의 희생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그가 가치로 삼은 것은 틀리지 않았다.

빛의 아들이 말하자고 했던 게 무엇인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내게 전하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기영은 전하고자 했다. 인간은 아름답고, 순수하며, 이토록 따뜻하다는 사실을 전하고자 했다.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옳은 행동이라는 게 있다고 믿는 모든 이들에게, 지치고 힘든 이들과 기대에 배신당한 모든 이들에게 지금 이 장면을 전하고자 했다.

소외된 모든 이들에게 당신들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고자 했다.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모두가 그가 옳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믿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모두에게 함께 손을 잡고 걷는다면, 계기만 주어진다면,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저는 믿습니다.’

“네… 네. 기영 씨. 이제는 저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혼잣말 좋아하는 편인가 봐.”

콰아아아아아아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기괴한 모양의 건축물이 튕겨 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딱 맞춰서 온 것 같은데… 너무 늦은 건 아니지?”

“차희라 님.”

“파란 길드마스터. 오랜만이에요.”

“박연주 님.”

린델의 붉은 용병과 검은 백조.

계속해서 빛을 밝히고 있는 마법진에서 익숙한 이들이 쏟아져 내리는 광경은 단순히 장관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교단의 기사단, 공화국과 연방의 병력과 수많은 이종족들, 지금까지 스쳐 지나갔던 모든 이들이 점점 모여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짧게 인사를 건네며 검과 창을 들어 올린다.

“오늘 우리는 보답하고자 합니다. 대륙의 영웅들이여. 그가 대륙에 보여준 헌신과 희생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오스칼 님….”

“그의 죽음이 가치 있었음을, 빛의 아들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남아 있음을 보이려고 합니다. 우리가 증명해야 합니다. 그의 헌신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것을 남겼는지, 그의 삶이 대륙에 어떠한 것을 남겼는지, 우리는 그것을 증명하고자 이곳에 있습니다. 그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습니다.”

“…….”

“저 간악한 악마는 빛의 아들이 틀렸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여러분. 그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늘 위를 수놓은 마법진들에서는 끊임없이 인형들이 쏟아져 내린다.

갑옷을 입고 있는 이들, 커다란 신성력을 내뿜으며 노래하는 사제들, 죽음을 각오한 하급 용병들이나 스스로의 의지로 찾아온 상급의 모험자들까지.

가지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깃발을 들어 올린다.

“빛의 아들을 위하여!”

“빛의 아들을 위하여!!!”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지금 저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뭔가에 북받치는 감정 때문인지, 둑이 터진 것처럼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나온다.

“흐윽… 흐으으윽….”

“길드마스터.”

“흐으으윽… 흐윽… 흐으으윽….”

이걸 지키자고 했던 거였구나.

“죄송합니다… 죄송….”

“괜찮으십니까?”

이걸 보여주고 싶으셨던 거였구나.

“믿지 못해서… 죄송… 흐윽… 흐으윽… 합니다.”

이걸 전하고 싶은 거였구나.

마모되고 또 마모된 1회 차의 김현성에게,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 2회 차의 김현성에게 끊임없이 헤매고 있던 자신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빛은 하나가 아니라고. 인간은 누구나 서로가 서로를 비추어 줄 수 있다고…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거짓말이다. 거짓말이야. 노을빛의 신이시여. 당신은 지금 속고 있는 겁니다. 저들은 당신을 완전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저들은 당신을 약하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저 버러지 같은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

“전부 다 개소리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어! 그의 죽음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단 말이다! 이제 와서 뭘 어쩌려고… 지금에 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이 하등한 필멸자 놈들. 네놈들과는 격이 다르단 말이다. 나는 네놈들과는 달라. 나는… 나는….”

“…….”

“노을빛의 신이시여. 제가 다시 증명하겠습니다!”

“…….”

“다시… 다시 한번 더 당신에게 증명하겠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에게 내가 옳다는 사실을! 그가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야 말 것입니다.”

짐승들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이형의 괴물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정신없이 달리며 인류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두려운 광경일 것이다. 무섭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방패를 든 이들은 한 발자국 앞으로 더 내민다. 서로가 서로를 붙잡고 의지하며 방패를 들어 올린다.

“거, 내 뒤에 서라니까!”

“신성한 보호!”

사제들이 외운 커다란 방벽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짐승들은 방벽을 뚫어내며 기어코 인류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방패 들어!! 방패 들어라! 새끼들아!”

콰아아아앙!! 콰드드드드드득!!!!

“방패 올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거, 형님이 보고 있다니까.”

그들은 이겨낸다. 계속해서 방패를 두드리고 있는 짐승들에게 보란 듯이 두 다리를 대지에 붙인다.

그들에게 계속해서 신성력이 떨어져 내린다. 방패를 따닥따닥 붙이며 오히려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딘다.

“전진! 전진!!”

신기한 광경이었다.

“전, 전… 전부 죽… 죽어!!! 죽, 죽, 죽어!! 오, 오빠… 오빠!”

마법사들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궁수들을 활시위를 당기고, 창병들은 방패 속에 숨어 창을 찔러 넣는다.

치열하고 힘든 싸움이다. 공포에 질린 이들의 얼굴이 간혹 눈에 띄기도 했지만 그들 역시 악에 받치는 듯한 소리를 내지르며 한 걸음을 더 내딛는다.

이들 역시 싸우고 있다. 빛의 아들을 위해 전장에 목숨을 바치고 있다.

“네. 지혜 씨. 예.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쪽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아. 네. 곧 지원을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길드마스터는….”

“…….”

“길드마스터. 실례가 되는 질문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혹시.”

“네. 싸울 수 있습니다. 혜진 씨.”

“지혜 씨가 길을 열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네.”

이번에도 도망쳐서는 안 된다.

“신호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네.”

김현성의 삶은 회피하는 것의 연속이었고 닿지 못하는 것의 연속이었다. 마지막 순간에도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믿습니다.’

“네. 저도… 믿습니다.”

언제나 했던 생각이었다.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것 역시 어쩌면 도망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회피한 것이리라. 책임을, 내 죄를, 어쩌면 빛의 아들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회피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라.

이제는 그의 헌신과 희생에 대한 보답을, 그가 내게 준 것에 대한 보답을, 그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한 속죄를, 항상 받기만 했던 입장에서… 이제는 자신 역시 무언가를 전해야 했다.

그에게 알려야 했다. 이곳이 당신이 사랑하는 장소라고, 저들이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이라고, 당신은 틀리지 않았다고, 당신의 희생은 보답 받았다고.

당신이 비추고 있었던 것들도 당신을 비추고 있었다고. 그 광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고. 노을빛처럼 너무나도 멋진 광경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네. 저도 믿습니다. 제게도 보여요. 기영 씨. 어째서 당신이 이 장소를 이토록 사랑했는지, 이들을 어째서 이렇게 사랑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이들이에요. 이들에게도 당신이 필요합니다. 저는….”

저는 처음에 왔을 때 사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헤매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제가 회귀했는지, 어째서 저에게만 새로운 삶이 주어졌는지, 그 목적을 찾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서 회귀한 걸 거예요.

단순히 싸우기 위해서 회귀한 게 아닐 겁니다.

당신이 세상에 전하고자 했던 것들과 당신이 사랑했던 것들을 돌려주기 위해 이 자리에 있었던 겁니다.

기영 씨는 제게 이 모든 것들을 선물하고자 하셨지만 이걸 누려야 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그걸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당신이 제게 누리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당신이 누려야 하는 것들이에요.”

그 대가가 제 목숨을 태우는 일이라 괜찮습니다. 저는 누릴 수 없다고 해도,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당신이 사랑하고 보고자 하는 것들을 전하겠습니다.

“준비됐습니다. 혜진 씨.”

저는 당신을 살릴 겁니다.

“지금 가겠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