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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70화 (86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70화

시나리오의 끝 (3)

‘이 새끼들 아주 지랄 났네. 지랄 났어.’

아주 전용 브금이라도 깔아줘야겠어. 너무 감동적이라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야. 시바.

‘그래. 시바 솔직히 감동적인 장면이기는 해. 충분히 멋진 장면이야.’

단연코 마지막 결전에 어울리는 신이라고 말할 만했다.

진실은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일단 대륙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악마에게 대항하는 영웅들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으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모두가 하나가 되다니 이런 기적이 또 어디 있을까.

어떻게 봐도 밝은 내일이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벌써부터 희망찬 음악이 들려오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아직도 계속해서 마법진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쏟아지고 있다.

파란 길드는 물론이거니와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놈들까지 합세하는 중, 모두가 빛의 아들에게 도움을 받거나 은혜를 입은 녀석들이 틀림없으리라.

녀석들의 얼굴에는 비장함 이상의 감정이 깃들어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빛의 아들을 구하고 말겠다고, 더 이상 그가 고통받는 모습을 바라볼 수는 없다고, 이제는 우리들의 차례라고….

저 많은 이들이 빛의 아들을 위하여를 외치고 있는 모습은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초조해진다.

‘누나. 이게 맞아?’

원래 우리 시나리오는 이게 아니었잖아.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대표적으로 정하얀의 존재가 그랬다.

‘라파엘 저 새끼도 그래.’

누나가 한소라에게 말을 잘 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지금의 정하얀은 이성을 잃기 직전처럼 느껴진다.

계속해서 대규모 워프 마법을 진행시키는 와중에도 이형의 괴물들이 폭죽마냥 터지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이를 악문 모습, 한소라가 그녀를 밀착 마크하고는 있지만 아마 그녀의 입장에서는 외줄 타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외줄에서 떨어지는 순간 이곳에 운석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쟤 올 줄 알았으면 최소한 겉모습은 숨겼겠지.

“죽, 죽, 죽어. 죽어버려. 죽, 죽어….”

“정하얀 님? 정하얀 님?”

이 모든 일의 원흉처럼 느껴지는 회색 비둘기는 열심히 본인의 강함을 뽐내고 있는 중, 계속해서 파닥거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본인이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형! 저예요! 저 왔어요! 라파엘이에요!”

‘너 주인공 아니야. 시바. 단역이라고.’

자꾸 침범하지 마. 왜 조연이 허락도 없이 주연배우 연기하는데 애드리브치고 그래.

완벽한 장면을 만들어야 하는 나로서는 정돈되지 못한 배우들이 신경 쓰여 참을 수가 없다.

“흐윽… 형… 이 개자식! 으아아아아아!”

넌 좀 꺼져. 진짜. 감정 과잉이야. 우리 현성이 카메라 뺏어가지 마. 이 새끼야.

전체적인 화면 자체는 봐줄 만했지만 디테일을 들여다보면 정신이 없다.

애초에 이게 맞는 건지조차 의심스러운 상황이 아니었던가.

물론 많이 벌리고 있기는 해. 사람들 이런 거 좋아하잖아. 인류에 희망과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다는 이지혜 감독의 저의는 충분히 알겠다고….

근데 자꾸만 선 넘는 얘들이 보이잖아. 솔직히 우리 김 배우가 티켓 파워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어디서 회색 비둘기가 파닥거리게 만들어?

“형! 제가 구해드릴게요. 조금만 참으세요.”

아, 쟤 좀 치워 진짜….

여러모로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시점. 결과적으로 본다면 이득을 본 것은 맞다. 정하얀이 보여주고 있는 장면은 기적이나 다름이 없었고 타이밍도 절묘했으니까.

‘시바, 생각해서 뭐하겠어.’

어차피 내 손을 떠난 것이나 다름없는데. 누나가 이게 맞다고 판단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기획하기는 했지만 현재, 시나리오를 바꿀 수 있는 재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나였고… 어차피 나도 무대 위에 선 배우였으니 여기서는 그냥 입 닥치고 있는 게 정답이다.

‘누나… 누나….’

지금 본대를 정리하고 있는 게 맞다면 다시 한번 주연배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해주겠지.

“길을 열어!!! 길을 열어라!!”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전진! 전진! 한 발자국씩 전진!!”

박덕구를 필두로 한 방패부대가 몸을 움직이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전진하라니까! 밀어붙이라니까!”

사제의 신성력이 계속해서 방패병들에게 떨어지고 놈들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거짓말처럼 천천히 길이 열리는 것이 눈에 비친다. 아주 작은 길이지만 마치 바다가 갈라지는 걸 보고 있는 것만 같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짐승들로 꽉 차 있는 대지를 인간들이 방패를 맞대고 길을 만든다.

“길을 열어!!”

그 모습만으로도 입을 벌리게 만든다. 조금 간질간질 하기는 했지만 저런 건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으니까.

그 누구보다도 필사적인 박덕구가 눈에 띈다. 이를 악물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발을 맞춰가며 진영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별별 생각이 다 들게 했다.

‘성장했네.’

본래대로라면 박덕구는 이미 한참 전에 떨어져 나갔어야 했다. 실제로 녀석이 벽에 부딪힌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고, 놈을 성장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로 신경 써야 할 점이 많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륙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박덕구를 보면 그런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애초에 희망이 없었던 공격력을 본인 스스로 거세했고 성장한계치에 막힌 다른 부분들은 버프나 장비로 보완해 꾸역꾸역 올라왔다.

덩치들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조금 짠해지는 것만 같다.

“거,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니까. 앞에서 막아주는 것밖에 없소.”

‘돼지 새끼….’

“심지어 이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궂은일이라면 맡겨 달라니까.”

‘민망해지는 대사 치지 마.’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녀석의 말을 받은 것은 조혜진이었다. 아니, 조혜진을 필두로 한 파란 길드원들이다.

“지휘는 본부에서 내릴 겁니다. 최우선 순위로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네. 조혜진 님.”

“이렇게 같이 움직이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네요.”

“응.”

알프스와 유아영, 김예리가 그녀의 말을 이었다. 덩치 큰 돼지들이 열어 준 길을 그대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제대로 된 훈련에 참여한 지 오래된 나와는 다르게 파란의 파티원들은 강도 높은 훈련을 거른 적이 없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할 정도로 피드백은 즉각적이다.

제대로 만들어진 파티가 어느 정도까지 강해질 수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모범사례.

실제로 교본에도 실려 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파티원들은 몸을 움직인다.

조혜진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파티의 목적은 뚫어내는 것. 뾰족한 창을 보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진영에 들어선 이들에 얼굴에 긴장감이 감돈다.

신호는 조혜진이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딛는 것으로 시작.

총알처럼 튕겨 나간 조혜진이 창을 내질렀고 방진의 중심에 있는 선희영과 엘레나가 신성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펑 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극단적인 질주, 사제들을 품고 달린다는 발상은 위험했지만 파티의 허리 라인을 맡고 있는 두 레인저의 존재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김창렬, 그리고 김예리.’

사실 김예리야 말이 필요 없다. 그녀는 레인저의 탈을 쓴 올라운더였고 다운그레이드된 버전의 김현성이라 불릴 정도로 접근전에도 능했으니까.

사방에서 쏟아지는 온갖 변수를 마크하는 그들이 느낄 압박감은 가장 전위에 선 조혜진 이상이다.

계속해서 파티의 주변을 맴돌며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대처한다.

김미영 팀장조차 그들에게 코멘트나 명령어를 입력할 수 없다. 말인즉슨 두 레인저가 자의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할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은 그 둘이다.

이를테면 레인저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마법이 날아들어 왔을 때, 적들에게 둘러싸이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선택은 그들의 몫이다.

김예리는 선택할 수밖에 없다. 쏟아지는 촉수와 앞을 가로막은 짐승, 김예리는 짐승의 목을 베는 선택지에 발을 들인다.

쏟아지는 촉수는 마크하지 않는다. 왜. 안기모가 촉수들을 막아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나이스. 기모 아저씨.”

“하하….”

김창렬 역시 파란의 후위들을 마크할 인원인 유아영에게 짐을 떠넘긴다.

‘동료를 믿는다.’

따위의 간질간질한 명언을 때려 박고 싶지만 저건 그런 게 아니야. 시스템의 승리인 거지.

수천, 수만, 수백만 번을 반복해서 훈련한 결과물.

서로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완벽하게 짐을 분담하는 시스템의 승리야.

방진 안에 들어가 있는 사제와 마법사, 황정연이 계속해서 주문을 외울 수 있는 이유라고.

끊임없이 전위에 버프들이 내려온다. 그들의 에너지가 떨어질 때 즈음에 다시 한번 신성력과 마법이 내리꽂힌다.

물론 이렇게 불가능한 전술이 가능하게 만드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해.

“우리 하얀이.”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수백만 가닥으로 갈라진 마력이 파티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떨어져 내린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엘레나와 선희영이 내뿜는 신성력 역시 규격 외지만 정하얀은 레벨이 다르다.

자기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마냥 움직이는 마력의 가시는 계속해서 범위를 넓혀가며 이형의 괴물들을 꽤 뚫는다.

한소라도 도움이 많이 되기는 하는데. 쟤는 비방용이니까. 뭐 보여주면 좋겠는데 보여줄 수가 없네.

“이 눈엣가시 같은 놈들이!”

커다란 마력을 뭉쳐서 쏘아 보내는 송빌런. 이쯤에서 녀석이 한 번 저지할 때가 됐어.

“우리한테 맡기라니까!”

조혜진과 스위치한 박덕구가 방패를 들어 올린다. 유아영, 안기모와 함께 커다란 마력을 몸으로 막아낸다.

“튕겨낼게요! 황정연 님! 황정연 님!”

“응. 아영아. 덕구 씨.”

선희영은 전위들을 보조할 수 있는 버프를, 황정연은 마법으로 탱커들이 받을 물리적 충격을 감소시키고 저 마력의 운동에너지를 바꿀 수 있는 주문을 외우고, 은근히 정연 씨도 만능이야. 마력이 딸려서 그렇지.

그리고 그사이에 엘레나는….

“조혜진 님?”

“네.”

조혜진한테 새로운 연료를 불어 넣자너. 아직 숙련도 부족한 알프스만 기웃기웃거리지. 흰둥이는 멍멍 잘 짖으면서 알뜰히 얘들 멘탈 챙겨주는데 말이야.

가까이서 보기에도 압도적인 장면이었지만 멀리서 보면 입을 벌리게 되는 장면이다.

사방이 흉측한 촉수와 괴물로 둘러싸인 곳에서 소규모 파티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놈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떻게… 저렇게….”

“두 눈 똑바로 뜨고 봐. 우리 애들도 배워야 할 거야. 동료를 믿는….”

동료 믿음, 신뢰, 우정의 힘. 그런 거 아니야. 훈련과 피나는 노력, 시스템의 힘이라니까.

붉은 물결이 갈라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방진의 가운데,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김현성의 얼굴이 편해 보인다. 항상 전위에서 파티원들을 이끌었던 녀석이 이번에는 가장 안쪽에서 보호받으며 움직이고 있다.

‘아니, 이 새끼야말로 동료들을 믿자. 이러고 있는 것 같어.’

아마 녀석들은 김현성의 기대에 부응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택배 왔어요?’

꽁꽁 가둬 놨던 방진이 열리고 노을빛의 날개를 활짝 펼친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항상 불안했던 얼굴을 하고 있었던 전과는 다르게, 녀석은 무척 개운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가 당신을 구하겠습니다.”

“…….”

왠지…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기도 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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