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874화
시나리오의 끝 (7)
감정적이 된 것은 아니었다. 생각이 뒤죽박죽이라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김현성을 잃어서는 아닐 것이다. 이건 그것보다 더 복합적인 감정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실패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실패….”
이기영은 실패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누구나 실패하는 것에 분해하니까.
누나 말대로 내가 상정하고 있는 상황을 벗어났다는 것에 대해 과도한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회귀자라는 패를 허무하게 날려 버린 것에 대한 짜증이라고 하는 게 어울리지 않을까.
말 그대로 김현성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는 최고의 패였다.
녀석은 사용하기 편리하고, 금전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녀석은 내게 완벽히 감화되어 있었고 가장 통제하기 쉬운 인형이었다. 그 과정이 제법 짜증 나기는 했었지만 종국에는 녀석은 내가 가장 신뢰하고 아끼는 패로 발돋움했다.
놈한테 쏟아부었던 걸 생각해 보면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과정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불안요소는 많았다. 그냥 떠올리지 않았을 뿐이다. 애써 무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씨이발….”
계속해서 녀석을 떠올리게 된다.
‘기영 씨.’
“멍청한 새끼….”
‘저는 기영 씨와는 다른 평범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무언가를 위해 스스로 희생한다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는 대륙을 위해 희생할 수는 없지만 제게 많은 것을 선물한 기영 씨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마 기영 씨가 이 장소를, 이 사람들을 바라보는 심정과 비슷할 겁니다. 덜 숭고하지만 제게는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에요.’
“개 멍청한 새끼… 네가 뭔데….”
‘안녕히….’
이 멍청한 새끼가 나를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부터가 어리석었다.
놈은 겁쟁이였으니까. 그래. 김현성은 지나칠 정도로 겁이 많아 작은 선택 하나에도 사람을 빡치게 하는데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녀석이 이런 선택을 한다는 것 자체를 가정하지 않았다는 게 가장 커다란 문제가 아닐까.
내가 김현성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했던 모든 행동이 내 발목을 잡은 셈이다.
“도대체 네가 뭔데 그따위로 행동해. 주제넘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리 아쉽지도 않아. 녀석은 지나치게 하자가 많았거든.
어째서 내가 놈을 선택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하자가 많았다고.
그래. 생각해 봐. 덩치만 큰 애새끼였어. 손이 많이 가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전부 다 봐줘야 됐다고.
중간부터는 누가 누굴 끌고 가는지도 구분이 안 될 정도였잖아.
꿈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걸 선택한 녀석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짜증이 솟는다.
그러니까 굳이 아쉬워하지 않아도 돼. 실패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괜히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돼.
‘인간이라는 건 참 이상한 것 같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김현성.
‘모든 게 다 무너진 폐허인데… 조금은 예쁘게 보이기도 합니다. 신비롭게 보이기도 하고요. 붉은 노을이….’
아니.
주제에 쓸데없이 감상적이기도 했지.
정확히 말하면 귀찮았다고 하는 게 어울릴 것 같다. 거의 하루 동안이나 놈과 함께 돌아다녔었으니까.
그 폐허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박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영웅상과 거리가 멀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붉은 노을이 보인다. 신비롭지도 않고 예쁘게 보이지도 않는다.
개소리였지. 전부 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바라보던 풍경이 해가 지고 있는 광경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물론 이곳에 해 같은 건 없었지만 말입니다. 계속…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내 눈에는 지금 지고 있는 거로 보여.
그때도 네가 뭔가 착각했던 걸 거야. 전부 다 내가 만든 광경이었어. 넌 잘못된 걸 보고 있었던 거야.
어떻게 봐도 빛이 꺼지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 계속해서 이쪽을 비추던 붉은 노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기영 씨.’
언제나 그런 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녀석은 부정적이었고, 쉽게 의심하고, 결국에는 통제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말 잘 듣는 인형이라는 것도 그냥 내 개인적인 판단이었지. 떠올려 보면 김현성은 내 말을 들은 적도 없어. 제멋대로였지.
‘선물입니다.’
사지 말라는 걸 매번 사기도 했고,
‘죄송합니다.’
하지 말라는 짓을 매번 반복하면서 스트레스 지수를 올려놓기도 했다.
라파엘 건도 그래. 결국에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새끼였다는 거지.
감당할 자신도 없으면서 고집은 더럽게 세고… 사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어.
‘잃었으면 다시 구하면 돼.’
아직 내 주변에는 쓸 만한 패들이 많으니까. 사실 이제 더 이상 늘리는 게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
굳이 회귀자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 얘 이용 가치는 사실 끝났다고 봐도 되거든….
이제 1회 차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1회 차와 2회 차는 완전히 다른 회차였고 무력이 필요한 거라면 대체재들은 많으니까.
김현성은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설사 일어난다고 하더라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후뿐만이 아니라 과정에서도 그랬다. 만약 다시 한번 2회 차를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굳이 김현성에게 개짓거리를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녀석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어차피 제한적이었으니까.
앞으로는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잖아.
물론 할 건 해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엿 먹인 빌어먹을 놈 뒤통수는 갈겨 줘야지.
방법이 없겠어? 무조건 방법은 있을 거야. 어쩌면 내가 1회 차로 직접 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가능성은 모두 열어두자. 김현성을 대신할 사람을 구하는 것도 쉬울 거야.
적당한 놈 하나 물어다가 가져다 두면 돼. 라파엘은 조금 무리일까. 쓰로누스는 어때. 둘 다 검사 타입이고 충성심도….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씨이발… 입 닥쳐. 이 새끼야… 이 머저리 같은 새끼야.”
‘기영 씨. 언제나 믿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이제 꺼져, 이 쓸모없는 새끼야!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사라지라고… 이제부터 바빠질 거야. 내 말 알아들어? 네 생각할 여유 없다고.”
‘저는….’
“제기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떠올리게 된다. 이미 바깥으로 치워 버렸다고 생각했을 터인데 나도 모르게 땅바닥에 주저앉게 된다. 계속해서 얼굴을 감싸 쥐고 머리를 쥐어뜯게 된다.
정말로 다른 방법은 없는지, 자꾸만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미 지나간 실수에 대해 지나치게 복기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자꾸만 내 실수가 무엇인지, 정말로 되돌릴 방법은 없는지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이걸로 끝일 리가 없잖아. 그렇지.
정말로 이렇게 끝날 리가 없어. 나도 보험을 들어놨을 거야.
“누나 어딨어?”
“…….”
“이지혜 어디 있어.”
“…….”
“카스가노 유노는… 넌 뭐 하고 있어.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네가 원하는 건 뭐였어. 네가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게 1회 차의 이기영이라면 너도 용서 안 해.”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 조금 이상한 점도 많이 있었고….
그래.
마법이라면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몰라.
“하얀아… 정하얀.”
“…….”
차희라라면 무슨 방법을 찾지 않을까.
“희라 누나.”
왜 목소리가 안 들리지. 왜 얼굴들이 보이지 않지.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누군가가 내 몸을 꽉 부여잡는 게 느껴진다. 진정시키려는 의도처럼 느껴졌지만 진정이 되지 않는다.
사방에서 부여잡는 손길을 애써 뿌리친다.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 저들이 놓아준 거겠지.
루시퍼는 지금 이걸 보고 있는 건가. 어째서 피드백이 없는 거지. 내가 내기의 전제 조건을 위반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이미 파기된 계약이라 이거야?
정말로 이대로 끝날 리가 없어. 뭔가가 있을 거야. 분명히…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에 뒀을 거라고….
계속해서 허벅지를 두드린다. 아마 미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몰라. 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다.
‘다시 보고 싶은 풍경입니다.’
풍경 이야기 좀 그만 지껄여. 진짜. 정신 사나우니까.
‘언젠가는….’
“그만 좀 지껄이라고 정신 사납다고.”
베니고어나 벨리알과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 아니, 연락이 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당연히 루시퍼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뭘 해야 할지, 뭘 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다. 그저 소리 지를 뿐이었다.
“일어나라….”
쓸모없는 행동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멍청하게 보일 거라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회귀자여… 제길… 일어나.”
아냐, 쓸데없는 행동은 아니야. 충분히 논리적인 행동이야.
저번에도 살아났었잖아. 물론 그때는 완전히 죽은 게 아니었지만 분명히 몸을 일으켰었잖아.
이번에도 가능할 거야. 이번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나타날 거야.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회귀자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뭔가 방법이 잘못됐나.
그때는 어떻게 했었더라. 어떻게 놈을 일으켜 세웠었더라.
“될 리가 없잖아. 씨발… 이게 될 리가 없는데….”
‘저는 언제나….’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회귀자… 흐윽… 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조금 더 크게 떠들었었나. 내 목소리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는 거 맞지.
“일어나라! 일어나! 제기랄! 알타누스의 회귀자! 김현성! 제기랄! 그리하면 내게 네게 미래를….”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제기랄! 일어나, 김현성 이 개새끼야! 알타누스의 회귀자. 이 거지 같은 새끼야! 그리하면 내게 네게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시스템의 오류가 발생합니다.]
뭐.
[신화 등급의 아이템 알타누스의 유산의 사용자 노을빛의 신 김현성에 대한 오류를 확인합니다.]
“일어나! 개새끼야!”
[신화 등급의 아이템 알타누스의 유산의 사용자 김현성에게 등록되어 있었던 퀘스트 목록을 확인합니다.]
“일어나….”
[신화 등급의 아이템 알타누스의 유산의 사용자 김현성에게 허가되지 않은 퀘스트를 확인합니다. 퀘스트 보상을 정리합니다.]
“제발….”
[미래 (0/1)]
제발….
[미래 (0/2)]
“제발!”
[…….]
[미래 (0/5)]
[…….]
[미래 (0/25)]
[…….]
[미래 (0/381)]
[…….]
[…….]
[미래 (0/2,124)]
[총 2,124개의 강제 퀘스트에 대한 보상이 정산되지 않았습니다.]
[노을빛의 신에게 부여한 강제 퀘스트에 대한 보상이 정산되지 않았습니다.]
[대륙의 관리자는 오류를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퀘스트 보상 내역과 알타누스의 유산의 효과가 충돌합니다. 빛의 아들이 노을빛의 신에게 보상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아이템의 발동 조건과 강제 퀘스트의 등급을 확인….]
“일어나라 씨발놈아! 그리하면 내가 내게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니.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회귀자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0/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 (0/2,12■)]
[미래 (0/2,125)]
다시 한번 거대한 빛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그래.
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