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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77화 (868/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77화

시나리오의 끝 (10)

‘양이 너무 적기는 해. 시바. 이기적인 새끼. 이기적인 김현성.’

앉은 이후에는 곧바로 빵을 살짝 뜯었다.

사실 배가 고프지는 않다. 그냥 대화를 편하게 하고 싶었을 뿐이지.

사람들은 밥 먹으면서 친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김현성의 경계심을 풀게 하기에는 좋은 환경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벽 너머에서도 우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소심하게 조금씩 뜯어 먹는 놈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형 거기 있어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 새끼는….’

“형?”

그래도 조금 떠들썩했던 아까와 분위기가 다르자 갑자기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느낌이겠지.

혹시나 싶어 일부러 대답하지 않자 이윽고 질질 짜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흐윽….”

어째서 이 병신 새끼를 영웅으로 집었는지 나도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약한 모습이었다.

그냥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

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래. 있다.”

“어, 어디 갔다 왔어요?”

“네 알 바 아니잖아.”

할 말 없을 거야. 시바. 무슨 염치로 이 새끼가 어디 갔다 왔으니 뭐니 지껄이겠어. 자기 스스로 저기 처박혀 있는 놈인데.

“…….”

“혼자 있으니까 무섭기는 한가 봐.”

“…….”

봐. 할 말 없잖아.

“어쩌다가 여기 왔어?”

“잘 기억이 안 나요. 제가 왜 여기 있는지,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 형은요.”

“나도 잘 기억 안 나. 내가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우스갯소리는 아니다. 정말로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벽 하나 두고 여유롭게 빵이나 처먹고 있는 꼴이 조금 우습기도 하다. 어떻게 해야 저놈을 바깥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지 고민이나 하고 있으니까.

1회 차 김현성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냥 놔두고 돌아갈까. 화살표를 그어 놨으니 따라오지 않을까.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확실하지 않은 방법이다.

놈이 직접 저 벽을 뚫고 나오는 모습이 보고 싶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대화거리도 전부 다 떨어져 버린다.

사교성이 없는 것은 본래 녀석의 특성인 것 같았다.

“조금 더 줘.”

“…….”

“빨리.”

차라리 튜토리얼 던전 때처럼 아귀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저쪽으로 처넣어 버릴 텐데.

무한의 빵 주머니라도 가지고 있는 거야 뭐야. 식량도 안 떨어졌나 봐.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차분해진다.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래?”

라고 괜한 물음을 던지자 기가 죽은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모르겠어요.”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어.”

“그래도….”

“…….”

“위험할 확률도 있으니까요. 지금 제가 겪은 상황이 일반적인 상황도 아니고… 생각해 보니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형도 여기에 온 이유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시고… 저도… 위험할 거예요. 새로운 곳이라고요. 움직이지 않으니까 계속 안전할 거예요.”

“나는 버젓이 밖에 있잖아. 아니면 내가 너를 해치기라도 할까 봐? 형 싸움 못 해. 무기도 없고.”

아니, 지금 김현성은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전력을 다해 싸운다면 때려눕힐 가능성도 한 40퍼센트는 될지도 모르겠다.

‘같이 빵도 먹었잖아. 이거 왜 이래?’

“꼭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형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겠지만… 그냥 나가기 싫어요.”

“왜.”

“달라지는 게 무서워요. 모든 게 변할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밖에 뭐가 있을지, 앞으로 제가 어떤 일을 하게 되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가 무서워요. 여기에서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니까. 그럼 적어도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형 같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저는….”

“아니야. 나도 이해해.”

“…….”

“나도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네?”

“지금의 환경과 달라진다는 건 무섭지.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원래 누구에게나 무서운 일이야. 누구나 갑작스러운 변화를 두려워하고… 나라고 예외가 아니야.”

“…….”

“아주 작은 계기만 있으면 돼.”

“…….”

“정말로 아주 작은 계기만 있으면 누구나 달라질 수 있어.”

“형도 그랬어요?”

아마 그럴 것이다. 김현성에게 입을 털었던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나 역시 달라진 계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김현성 역시 지대한 역할을 차지할 거라고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처음에 그저 벽에 틀어박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녀석이 1회 차를 이끌고 2회 차에서 스스로를 희생할 줄 아는 영웅이 됐다.

녀석에게 그동안 겪은 일은 작지 않았겠지만 처음 녀석을 벽 밖으로 끄집어낸 것은 분명히 작은 계기였을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위험과 위기를 겪으며 김현성은 성장했다.

놈의 일대기는 소설이나 영화로 나와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영웅의 일대기처럼 보였고, 대륙의 역사였으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서사였다. 벽에 처박혀서 빵이나 뜯어 먹던 놈이 말이다.

본래 감상적인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자꾸만 지난 기억을 되돌리게 되고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들을 중얼거리게 된다.

“꿈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내가 하는 말이 개소리처럼 들릴 수는 있어도 지금 네가 겪는 일이 정상적인 일들은 아니잖아. 넌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그… 그럴….”

“네가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네 말대로 괴롭고 무서울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다고 봐. 그래도 넌 네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을 거야.”

이 새끼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어. 근데 이런 감성이 먹힐 수도 있잖아.

“많은 친구들을 만들 수도 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날 거야. 포기하고 싶어질 만큼 괴로운 일도 겪을 거고, 지금까지 네가 겪었던 삶과는 완전히 다른 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어. 많은 실수를 할 거고, 종국에는 실패하겠지.”

김현성의 1회 차가 그랬다. 많은 이들과 만났고 괴로운 일들을 겪고 많은 실수를 겪었고 실패했다.

“정말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상황에 떨어질 수도 있지만… 넌 가족 같은 사람들과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당장은 그게 지난 삶보다 행복하다고 느껴지지는 않겠지만, 또다시 포기하고 실패할지도 모르겠지만, 마지막에는 네가 겪었던 그 어떤 괴로울 일들이 무색해질 정도로 즐거운 일들을 겪게 될 거야. 소중한 사람도 만나고 좋아하는 여행도, 취미생활이나 네가 하고 싶었던 일들도, 모두 누리게 될 거야. 넌 그걸 눈앞에 두고 있는 거야.”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어디 있어요.”

시바 새끼가 기껏 분위기 잡아 놨더니.

“바깥으로 나와 직접 마주하지 않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

“지금 내가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주사위를 던지지 않으면 모른다고. 그걸 확인시켜 주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네가 직접 확인해야 하는 거라고. 넌… 넌… 영웅이 될 거야.”

“…….”

“모두를 구하고, 대륙을 구하고, 나를 구할 거야.”

“…….”

“넌 내 회귀자가 될 거야.”

“아….”

“너는 내 회귀자가 될 거야. 김현성.”

“어….”

“내가 널 선택했으니까.”

“…….”

말이 없다. 벽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원래 이쯤에서 나와줘야 되잖아. 나와주는 게 맞잖아. 매번 기억 잃은 캐릭터들이 치는 명대사 한번 등장해 줘야 되잖아.

솔직히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냥 되는대로 말했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랑스러운 회귀자는 내 기대에 부응하듯 입을 열었다.

“어라… 왜 눈물이….”

그래, 시발로마. 이거.

“어… 흐윽… 흐으으윽… 어… 어… 왜 갑자기… 눈물이….”

김현성 시바 진짜 쉽다 쉬워. 이만큼 쉬운 놈 또 없다. 이게 먹히네.

“잠깐… 잠깐만요… 잠깐 흐윽… 죄송해요. 형… 흐윽… 갑자기….”

어떻게 이게 먹히지?

“갑자기… 눈물이… 흐윽… 흐으윽….”

“넌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거고 결국에는 구원받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나는 천천히 손을 향해 벽을 뻗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 될 것 같았으니까.

내가 방금 했던 말처럼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밀게 되기 전까지는 모른다.

나는 놈이 벽 속에서 스스로 나오기를 항상 기다렸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벽 안으로 들어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숙제는 놈에게만 주어진 게 아니라는 걸 불현듯 깨닫는다. 놈에게 미래를 선물해야 하는 것은 녀석 자신이 아니라 나다.

“어… 어….”

거짓말처럼 김현성의 모습이 보인다. 쭈그려 울고 있는 22살의 김현성이 시야에 비친다.

김현성은 몸을 일으켰다. 눈물 콧물을 전부 다 흘리며 질질 짜고 있었던 녀석이 손을 뻗는다. 나 역시 손을 뻗으며 놈을 일으켜 세운다.

“좋은 결말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리고.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세계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발밑을 시작으로 말이다.

“아….”

녀석은 주변을 둘러본다. 나는 녀석을 바라본다.

22살의 녀석은 어느새 1회 차의 모습으로, 1회 차의 모습이었던 녀석은 어느새 2회 차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눈물을 떨어뜨리는 녀석은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배경도 함께 변하는 것 같다. 마치 김현성이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들을 복기시켜 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중에는 보기 싫었던 것들도 있는지 눈을 꽉 감기도 했지만 천천히 눈을 뜬 녀석은 모든 것들을 시야에 담았다.

지금까지 자신을 일으키고 성장시켰던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 것만 같다.

내 영웅은 이렇게 성장했다. 우리 회귀자는 이렇게 단단해졌다.

이렇게.

조금 오바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 광경은 마치 노을이 뜨는 것처럼 비치기도 했다.

김현성에 어두웠던 기억들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으니까.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더 이상 퀘스트 메시지도 들려오지 않는다.

이유야 뻔하지 뭐.

마침내 녀석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 완전히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녀석은 웃었다.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노을빛의 신으로는 보이지 않은 모습으로 웃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자신이 되돌아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녀석은 내 모습을 눈에 담은 채로 중얼거렸다.

“다녀… 다녀왔습니다. 흐윽… 죄송… 합니다. 흐윽….”

고전적인 대사를 말이다.

기껏 한다는 말이 그거야? 겨우 그것밖에 할 말이 없어? 아니, 나도 클리셰 좋아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다녀왔습니다가 뭐야. 죄송합니다는 또 뭐고…. 내가 뭐 어서 오세요, 해야 돼? 그건 좀 아니지 않아?

위화감이 없다. 진심으로 저런 말을 내뱉을 수 있다는 게 당황스러웠지만….

나도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씨발 새끼.”

라고.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종료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빠.

-응?

-결국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

-그 1회 차 빌런 있잖아요. 가면 쓰레기. 오빠 머릿속에 있었던 그 새끼요. 아니, 머릿속에 있었던 건 확실한 거 맞아요? 그냥 오빠 혼자 북 치고 장구 친 블러핑일 확률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어요? 지금도… 보이나요?

-글쎄.

-뭐예요. 애매모호하게. 이제 다 아는 거 아니었어요?

-뭐라고 확답을 내릴 수가 없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누나 말대로 블러핑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네.

-그 새끼도 우리 회귀자한테 정이 들었을 수도 있겠네. 오랫동안 봐왔을 테니까 인간적으로 동정심을 느꼈을 수도 있고… 걔가 나한테 이게 맞아. ‘이게 정답이야’라고 말했던 게 진짜였을 수도 있다고 봐. 전부 다 정답이었다는 거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아무렴 뭐 어때.

-…….

-희생과 부활의 신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

-빛이 있었노라.

-…….

-…….

-이 사달을 내놓고 할 말이 고작 그거예요?

-…….

-이기영… 진짜 쓰레기라니까.

-회귀자 사용설명서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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