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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82화 (873/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82화

에필로그 (5)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계속해서 안겨 있었을 것이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눈에 비친 것은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는 마법사였다.

물론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뭔가 불안한 듯한 얼굴과 언짢다는 표정은 평소에 자신이 상상하던 대마법사의 얼굴과는 달랐지만 말이다.

빨려들어 갈 것만 같은 눈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은 분노와 살의.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몸이 굳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명예추기경님께서 정하얀 님의 머리를 쓰다듬자 공기가 환기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분명히 자신이 받은 것은 뭐라 설명하지 못할 적의였을 것이다.

‘어째서?’

라는 생각을 품기도 전에 검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는 이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에 상처가 난 여자… 그녀뿐만이 아니다. 김예리 님도, 안기모 님이나 선희영 님도, 심지어 알프스 님까지 긴장한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눈에 띄지 않았던 황정연 님도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제야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천천히 고개를 올리자 여전히 웃음 짓고 있는 명예추기경님이 보인다.

무척 여린 몸.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서질 것처럼 가녀린 신체. 마치 섬세하게 만들어진 유리세공품과도 같다.

빛의 아들, 희생과 부활의 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유약하지 않은가.

저 가는 손목에 조금이라도 힘을 준다면 금방 부서져 버릴 것이다. 얼굴은 금방 피투성이가 되어버릴 테고 몸은 종잇장처럼 구겨지겠지. 아주 조금만 힘을 줘도 말이다.

피범벅이 된 명예추기경님의 모습을 떠올리자 순식간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

‘부끄러워.’

자기 자신만 생각했다는 게 부끄럽다. 현재 이들이 느끼고 있을 불안감과 두려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너무나도 부끄럽다.

“떨, 떨… 떨어지라구… 말… 말했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괜찮아. 하얀아.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 없어요. 모처럼 길드에 찾아와 주신 손님이 아닙니까. 콜록.”

“형님. 거, 괜찮은 거요?”

“괜찮아. 나는… 콜록. 죄송합니다. 벨리에 님. 콜록.”

“명예추기경님….”

잠깐 동안 멍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 선희영 님께서 곧바로 명예추기경님에게 달라붙고 상태를 지켜보고 있다. 괜찮다는 듯이 만류하고 있지만 기침을 막은 손 사이로 붉은색이 눈에 띈다.

“아….”

“부길드마스터!”

왠지 모르게 몸이 떨려와 고개를 푹 숙였을 때 시선이 느껴졌다.

‘…….’

“…….”

마치 뱀 앞에 개구리가 된 것만 같다. 숨을 쉬기가 곤란해진다.

“이… 이, 이, 이익!… 내가 떨어지라고… 너, 너! 너어!!”

“그만.”

“…….”

“그분의 탓이 아니야. 하얀아. 여러분도 실례가 되는 행동은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뿐이니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이기영 님? 몸이 편찮으시다면 일정을 취소하는 게 어떠신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희영 씨. 그리고 하얀아. 괜찮으면 부축 좀 해주겠니?”

“네? 네… 네!”

“…….”

“…….”

“벨리에 님. 잠깐 걸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니요. 저는… 그것보다 명예추기경님이!”

“괜찮습니다. 잠깐 휴식을 취한다고 상태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바깥바람을 쐬고 싶군요.”

“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하얀이가 함께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네.”

“거… 알겠소.”

“네, 부길드마스터.”

“응.”

짧게 대답을 마친 김예리 님을 마지막으로 떠들썩했던 공간이 적막해졌다. 명예추기경님과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정하얀 님에게 몸을 의지한 채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머릿속이 처음부터 끝까지 복잡하기만 하다. 엉엉 울었던 것부터, 갑작스레 이렇게 파란의 길드 하우스를 함께 거닐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조금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세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와는 다르게….

‘몸을 회복하지 못하신 거야.’

“오, 오빠… 괜찮으세요?”

“응. 걱정해 줘서 고마워. 하얀아.”

“힘, 힘들어지시면 언제든지 말해주세요.”

“응.”

몸에 딱 달라붙어서 함께 이동하는 모습은 쓸쓸해 보인다. 명예추기경님의 진실한 모습을 확인한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가 않다.

살짝 고개를 돌린 명예추기경님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깜짝 놀라게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벨리에 님.”

“아닙니다. 명예추기경님. 제가… 괜히.”

“하하…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는 습관 같은 일이니까요. 그저….”

“네.”

“오늘 저희 길드 하우스에서 있었던 일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알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네. 네!”

“벨리에 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김미영 팀장님께서 따로 찾아가시더라도 너무 놀라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 팀장님께서는 워낙 일 처리를 확실히 하시는 편이라… 하하… 아마 서약서를 들고 찾아뵐 수도 있겠군요. 어쩌면 혜진 씨가 찾아뵐 수도 있고요.”

“조혜진 님께서….”

“그러고 보니 입단 시험을 치를 당시에 만났겠군요.”

“네. 정말로 많은 걸 가르쳐 주셨어요. 엘레나 님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큰 상처가 났었는데. 엘레나 님께서 순식간에….”

“…….”

“그, 그리고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비밀유지서약서에도… 네. 필요하시면 마법으로 제약을 걸으셔도 괜찮아요.”

아마 숨기고 싶으실 것이다.

모두에게 건강한 모습만 보이고 싶으실 테니까.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대륙 전체에 크고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명예추기경님의 소식은 경제, 정치는 물론이거니와 일반인들의 실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조금 어떠셨습니까?”

“네?”

“파란 길드 말입니다.”

“아. 좋은 곳 같아요.”

분명히 좋은 곳이다.

“시설이나 다른 부분은 언급할 필요도 없고… 제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면도 있기는 했지만 특히나 길드원 분들이 다들 좋으신 분들 같아 보였어요. 친절하시고… 어려울 것 같았는데 그런 부분도 없었고요. 한소라 님도… 그렇고… 네. 김예리 님이나… 선희영 님도.”

“그렇게 느끼셨다니 정말로 다행입니다.”

“가족 같다고 해야 할까요. 정말로 가족 같았어요. 아무래도 이런 곳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요. 특히나 삼대 길드라고 불리는 파란 정도라면 조금 더 사무적이고 딱딱한 분위기를 예상했거든요.”

“…….”

“예상과 너무 달라서… 오히려 더 동경하게 되더라고요.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게 보이고… 함께 있다는 걸 정말로 즐거워하는 것만 같아서….”

“그렇습니까?”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모습에 말을 멈추게 된다. 마치 묻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네가 만난 사람들은 어땠는지, 네가 겪은 대륙은 어떤 곳이었는지 말이다.

물론 좋은 이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악의나 부조리, 부당한 처사나 억울한 일들도 많이 겪어 왔으니까.

원하지 않은 싸움을 해야 한 적도 많았다. 심지어 사람을 해치기까지 했다.

대륙에서의 삶은 대개 그렇다. 이권이나 자존심 때문에, 단순한 악의나 눈앞의 이득 때문에 서로를 상처 입히고 또 상처 입힌다.

자신 역시 그런 환경에서 성장해왔다. 그래서….

동경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래서 파란 길드를 동경하고 존경한 것이리라. 남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이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내던질 수 있는 이들…. 서로 아끼고 살아갈 수 있는 이들.

“그러니까….”

“네. 저도 즐겁습니다.”

“아….”

정말로 기뻐 보인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매번 일어날 때마다 생각하고는 합니다.”

꽈악 안기는 정하얀 님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조용히 정하얀 님의 어깨에 손을 올린 명예추기경님은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의지할 수 있고, 마음을 나누는 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건 정말로 즐거운 일이에요.”

포근한 미소를 지은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은 린델이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천천히 지고 있는 노을이 눈에 띄었다.

붉은색으로 물든 린델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게 비친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여기저기서 떠들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광장에서 뛰어노는 어린이들, 함께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연인들, 하루 일과를 끝낸 노동자들과 평범하게 하루를 보내는 상인들,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들, 기도를 드리는 사제, 의자에 앉아 술잔을 들어 올리는 모험가들까지.

이 도시는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것만 같다.

디아루기아 님의 모습도 눈에 보인다. 물들고 있는 저녁노을에 자리 잡은 용의 모습에 저절로 입을 벌리게 된다.

아마 그런 의미일 것이다. 명예추기경님께서 사랑하는 이 린델이라는 도시는 그가 의지할 수 있고 마음을 나누는 이들이 모인 장소일 것이다.

“모두가 같을 겁니다.”

“그렇군요.”

“터무니없는 말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저는 이 도시, 아니, 이 대륙에 모인 모든 이들은 모두 베니고어 님의 아들딸들이… 분명 모두가 서로를 위하고 아끼기 위해 존재할 거라고 믿습니다.”

정말로 그럴까.

“물론 세상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다시 한번 노을이 지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게 된다. 아까와 다름이 없는 경치다.

“그래서 노력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

“가까운 곳부터. 서로가 서로를 위할 수 있는 장소로, 모두가 모두를 가족으로 여길 수 있는 장소로 바꿀 수 있도록 말입니다.”

명예추기경님이 먼발치를 바라보는 게 눈에 보였다.

노을이 지는 풍경 너머로 천천히 걸어오는 한 인형이 시야에 비쳤다.

한 손에는 빵이 든 종이가방을 들고 있었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여러 가지 물건을 들고 있는 사람이다.

무척이나 노을에 잘 어울리는 그가 창문을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정말로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모든 것을 다 가진 것만 같은 표정으로 짐을 내려놓은 이후에는 어린아이처럼 양팔은 흔든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기영 씨!”

명예추기경님은 살짝 손을 들어 올린 이후 턱을 괴며 웃음 지었고 정하얀 님은 크게 손을 들어 올린다.

‘정말로… 가족 같아.’

솔직히 아직도 명예추기경님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대충은 이해가 가지만 자신이 모르는 큰 뜻이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하지만 큰 뜻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르겠다.

“서로가 서로를 위할 수 있는 장소, 모두가 모두를 가족으로 여길 수 있는 장소.”

정말로 그것뿐일지도 모른다.

무슨 용기가 났던 걸까.

“명예추기경님….”

“…….”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부족하지만 길드를, 린델을, 대륙을 더 좋은 장소로 만드는 것에 힘이 될 수 있을까요.

명예추기경님처럼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저를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파란 길드원분들처럼, 당신처럼… 눈앞에 이익보다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위해 싸울 수 있을까요.

“저도… 저도 가족이 될 수 있을까요.”

“…….”

“…….”

한참 뒤,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이 눈에 보였다.

“파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벨리에 님.”

노을에 비친 그 미소는, 빛의 아들이, 대륙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희생과 부활의 신이 보내는 그 웃음은….

자신이 지금까지 본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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