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883화
휴가 (1)
“결국 길드원은 새로 뽑기는 뽑았네요… 신입은 좀 어때요?”
“좀 이상해. 누나. 성장 가능성이나 재능은 나쁘지 않은데. 아! 성격도 괜찮은 것 같고 의지도 있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한데… 애가 좀….”
“좀 싸한 게 있나 봐요?”
“본인은 아직 모르는 것 같더라고. 아무튼 만족하고 있어. 적응도 잘하고 있더라.”
“우리 용병여왕님께서 많이 안타까워하시겠네. 붉은용병에서도 오퍼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
“그래서 오빠. 우리 특별한 데이트는 언제 하는 거예요?”
몸을 일으킨 지혜 누나가 말을 이었다.
“시간이 있어야 하지.”
“솔직히 만들려면 만들 수 있잖아. 왜 이래요?”
“뭘 만들 수 있어? 그래. 누나 말대로 하루 빼는 건 문제가 없기는 해. 6개월 열심히 박아놓고 하루 정도는 뺄 수 있다니까. 근데 그걸로 끝이 아니잖아. 김현성한테는 뭐라고 설명해? 길드원들도 마찬가지고….”
“…….”
“…….”
“걔는 아직도 오빠한테서 안 떨어져요? 정하얀이랑 다른 게 뭐야 진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 새끼 진짜….”
“많이 힘들었잖아. 조금은 즐기게 놔둬. 이제 자기 삶 찾겠다는 얘한테 너무 그러지 말고.”
“아냐. 그 새끼는 너무 심해요. 요 1년 동안 탱자탱자 놀기만 하는 것 같던데… 뭐라도 시켜야 되는 거 아니에요?”
“…….”
“자기만 놀면 말을 안 해. 답답해. 그 새끼. 너무 답답하다고요. 돈 쓰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용돈이라도 줄여요. 진짜. 그래야 지랄병이 조금 낫지.”
‘걔 용돈 줄이면 대출받아.’
확실히 그동안 너무 많이 놀기는 했어. 한량도 아니고 말이야.
다시 한번 지난 김현성의 행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지혜가 저렇게 짜증을 내는 것도 이해가 간다.
본인이 본인 인생 즐기는 것을 딱히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겠지만 그 여파가 이쪽에도 미치고 있었으니까.
“축제를 갈 거면 혼자 가면 되는데. 도대체 오빠를 왜 데려가요?”
사실 내가 아니라 이지혜 쪽이 미치고 있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다.
“아니, 축제를 가는 것까지는 또 말을 안 해. 자기가 뭐라고 축제를 열어? 그것 때문에 일정이 얼마나 꼬인 줄 알아요? 우리 길드는 좀 빼주든가. 연주 언니 꼬셔서 연다는 게 가방 축제야? 아니, 가방 축제는 또 뭐예요? 세상에 그딴 근본 없는 축제가 어디 있어? 뜬금없지 않아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없네. 이 야발놈. 그 새끼 정신병자예요. 미친 것 같다구요.”
지난날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분노가 극에 달한 것처럼 보인다.
“이제는 차라리 정하얀이 나아 보일 지경이에요. 그래도 걔는 마나라도 관리하고 있잖아. 맡은 일 정도는 열심히 하고 있다고요. 김현성한테도 뭐 맡기면 안 돼요? 아니, 안 되지. 걔한테는 뭘 맡기면 안 돼. 제가 한 말 잊어줘요. 아무것도 맡기지 마.”
“…….”
“똥 싸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냐고. 아마 김미영 팀장도 그 새끼 죽이고 싶을 거예요.”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신성은 많이 벌어다 주잖아. 내년 예산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쉴드 그만 쳐요. 다 엎어버리기 전에.”
“현성이가 조금 심하기는 했지.”
“진짜 힘들어요. 진짜로. 대륙 관리하는 게 힘들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진짜로 너무 힘들다고요. 제가 언제 힘들다고 이야기한 적 있어요? 차라리 외신 전쟁 때가 나았어. 여기 던전화시켰을 때가 훨씬 나았다고요. 안 그래도 사람 부족해서 미치겠는데. 그나마 최근에는 오빠가 많이 도와줘서 망정이지. 오빠가 우리 아가 만들었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요? 삼 개월 동안 미치는 줄 알았어.”
한참 동안이나 씩씩 거리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 자리를 잡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아마 업무가 더 늦게 끝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 때문이리라.
‘나도 이 정도일 줄은 예상 못 했어.’
한 차원을 관리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야 길드나 나라를 관리하는 일도 어려운데 이런 일이야 오죽할까.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끝은 새로운 시작이요. 다음 고통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시스템은 내가 세운 자회사가 차원을 관리하는 것에 동의했지만 제대로 된 인력을 확충할 수 없었던 것이 문제.
베니고어가 데리고 온 인력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 인력들로도 구멍 난 차원을 유지 보수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대륙의 전반적인 마력에 대한 관리를 하얀이에게 맡기고, 공허를 비롯한 타 차원의 견제는 희라 누나가 전담하게 됐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시스템에 허가를 받은 것은 5명뿐이다.
차원관리 프로그램에 접속할 수 있는 것은 나, 이지혜, 정하얀, 차희라, 김현성이 전부.
본인에게 접근 권한이 있는 줄도 모르는 김현성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베니고어 사단과 이쪽 4명이 모든 걸 이끌어 나간다는 소리가 된다.
디아루기아가 그나마 나를 도와줄 수는 있었지만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던전화와 기적의 여파 때문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마나번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심할 경우에는 프로그램 자체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들, 이를테면 공기나 물, 원소제어장치에 문제가 생기거나, 대륙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기도 했다.
‘너무 쉽게 보고 덤벼든 거야.’
신생회사들이 겪는 전형적인 실수의 절차를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이지혜의 손을 거치지 않는 일이 없으니….
‘이 누나 미치는 것도 당연해.’
“오늘 베니고어 님이랑 벨 이사님한테 온 보고서예요. 제가 미리 보기는 했는데. 오빠가 다시 한번 봐주세요.”
누나가 조금 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과로사할 거예요.”
“…….”
“7A 구역에 또 문제 생겼네요. 마나번이요. 정하얀한테 보수 요청 넣어 놓을게요.”
[차원관리 프로그램을 작동합니다.]
[271차원의 관리자, 희생과 부활의 신의 접속을 확인합니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4건 있습니다.]
[베니고어-이기영 후배! 내 사업 계획서 읽었어?]
[이지혜-김현성 그 새끼….]
[정하얀-오, 오빠… 사….]
[…….]
거대한 차원의 축소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교황청 지하에 있는 던전에서 이상 현상 보여요? 두더지 성녀요. 저거 40년 안에는 처리해야 해요. 신탁을 내리든가 직접 공략을 하든가.”
“응, 보여.”
“3,412번 개체는 결국 멸종했네요. 제길. 이거 정력에 좋다는 소문 퍼뜨린 새끼 진짜 찢어 죽일 거야.”
‘누나 무서워.’
“원소제어장치는 또 왜 이래요? 이 시발! 진짜!”
“지혜야. 진정해. 으응?”
“…….”
“…….”
“아직 자리가 안 잡힌 게 크니까. 조금씩 자리 잡히기 시작하면 지금보다는 여유로워질 거야. 오늘은 조금 쉴까? 이리로 올래? 아니, 잠깐 숨 좀 돌리자. 누나는 여기 누워 있어.”
“이 오빠 또 꼬리 치네.”
“무슨 표현을 그렇게 해?”
“내가 당해줘야지. 이리 와요. 같이 쉬게.”
“…….”
“우리 도미 좀 빨리 키워야겠네요. 한 10년만 지나면 일할 수 있으려나. 아. 그러고 보니 제가 말했나요. 얘가 영특하기는 영특한가 봐. 저번에 애들 퀘스트 이야기 했었나? 혹시나 쓰로누스 걔가 이상하게 보고했을까 봐 말하는 건데요.”
재잘재잘 떠드는 목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괜스레 누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1년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도미니온스의 이야기를 할 때면 이를 드러내고 웃고는 했다.
맡고 싶다고 직접 이야기를 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재미있나 보네.’
그녀를 데리고 사는 게 즐거운 것 같았다.
“책을 얼마나 읽는지 모르겠다니까요.”
“그래?”
“다른 애들은 어떻게 지내요?”
“뭐 비슷하지.”
“퍼렁이 걔는 차희라랑 매일 매일 치고받고 있을 테고… 세라핌은….”
“걔는 정이 안 가. 애초에 줄 생각도 없기는 했는데….”
“오빠 성격에 다시 받은 것만 해도 대단하기는 해.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런 것도 아니네요. 케루빔이 몰래 데리고 왔다며. 어떻게 보면 걔네 쌍둥이 같은 거네. 케루빔 만들었을 때 옆에 붙어 있었다는 거 정말이에요?”
“응.”
그때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원래는 쓰로누스를 정하얀한테 맡기려고 했죠? 세라핌은 그냥 낙동강 오리 알로 만들고… 근데… 김현성이 쓰로누스를 채가서 정하얀 걔가 세라핌이라도 주라고 우긴 거잖아. 여기서도 그 새끼가 문제네… 아. 그런 것치고는 그냥 방임하고 있는 것 같던데… 얘 교육은 제대로 하고 있대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 사실 하얀이보다는 소라 손을 더 타는 거 같기는 하더라고. 하얀이야 애들 더미월드로 실습할 때만 기웃거리는 편이고… 마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성과가 그렇게 크지는 않나 봐.”
“어떻게 보면 벌 받고 있는 거네. 나도 원래 별생각 없었는데. 우리 도미 보니까 얘가 조금 짠해 보이기는 하더라.”
“구라 치지 마.”
“진짜라니까요?”
“이 누나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네.”
“아니, 진짜라니까.”
“정말?”
“커피나 한잔할래요?”
“내가 타줄게.”
“고맙게 마실게요.”
커피를 들고 다시 의자에 앉는 누나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갑작스럽게 말을 돌리는 걸 보니 짠해 보인다는 건 거짓말이 맞는 모양이다.
정말로 짠해 보였으면 말이라도 걸어줬겠지. 애초에 이 누나는 남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김미영 팀장은 접속 승인 안 되나 몰라.”
“안 될걸.”
“저도 알아요. 그냥 아쉬워서 지껄여 본 거지. 21B 구역에서 확인 불가 오류 떴네요. 로렌이 확인 좀 해달라고 하네요. 이거 게이트인가 보다. 또 떨거지들 몇몇 들어오겠네. 로렌 교단에서 신탁 승인 요청이요. 결재 부탁드려요.”
“누나가 직접 결재해.”
“네, 네. 아, 맞다. 엘룬이 세계수… 문제 때문에….”
“닥치라고 해.”
“안 그래도 그렇게 보냈어요. 근데 이게 웃기네요.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짜증 났는데. 막상 오빠랑 같이 일하니까 재미있기는 해요.”
‘그건 누나가 일 중독이라서 그래. 나도 비슷하고.’
업무에 집중하며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내 계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조용히 중얼거리는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응?”
“우리 좀 여유로워질 수 있겠는데요?”
“왜?”
“벨 이사가 하청 업체 구해왔대요.”
“어?”
“가격도 싸요. 대박.”
‘무슨 시바 하청 업체가….’
“와! 벨 이사 한 건 했네요!”
“신원은 확인했고?”
“폐기된 차원 관리자들이라고 하네요. 붕 떠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다가 걸렸나 봐. 벨 이사랑 벌써 계약서 작성했고, 기본 교육받은 이후에는 바로 베니고어 팀으로 합류한다는데요?”
“…….”
“우리 휴가 갈 수 있겠다.”
광대까지 올라간 입꼬리가 눈에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