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885화 (876/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85화

휴가 (3)

“지긋지긋해.”

누가 봐도 어처구니없는 타이밍이었고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하루아침에 엔젤기영이 데빌기영으로 뒤바뀐 시점,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웃어주지 않았던가.

녀석이 사온 쓰잘데기없는 선물에도 과한 리액션을 해주며 연신 고맙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최근 김현성과 내 유대감 전선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굳이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좋았던 쪽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역정을 낸 것은 물론 이거니와 선물로 사 온 가방까지 패대기 쳤으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조금 억지스럽기는 했지만….

본래 먼저 화내거나 먼저 우는 사람이 이기는 거자너.

본인이 잘못을 하지 않았더라도 상대방 쪽에서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다시 한번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볼 수밖에 없다.

내가 뭘 잘못했지. 어떤 걸 실수한 걸까. 오늘 기분이 안 좋은 걸까. 도대체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잠깐의 침묵이 장내를 감돈다. 지긋지긋하다는 한마디가 김현성의 귀를 통과해 머릿속으로 전달하기까지 무척 긴 시간이 걸린 것만 같다.

언제나 그렇듯 녀석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하나.

“죄송합니다.”

이미 예상한 그 문장.

“뭐가 죄송한 겁니까? 정확히 뭐가 죄송한 건데요?”

김현성의 18번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단어가 뇌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튀어나온 게 느껴진다.

‘번개처럼 몰아쳐야 돼.’

깊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말고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몰아붙여야 한다. 그게 협상의 기본이자너.

“뭐가 죄송한지 한번 제대로 말씀해 보세요. 네? 한번 들어나 봅시다.”

“기영….”

“매번 그런 식입니다. 일단 사과부터 하는 버릇 좀 고치셨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아….”

“죄송하지 않은 거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한번 조그맣게.

“지긋지긋해. 진짜.”

표정 왜 그래.

“됐어요. 이만 나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누나 나 잘하고 있는 거 맞지? 이거 맞는 거지?’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라는 것처럼 매정하게 자르는 모습도 필요하지만 실제로 녀석이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진짜로 나간다면 정말로 끝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너 진짜로 나가? 나가봐. 나가면 끝이야.

역시나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한다고, 일단은 시간을 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흔들리는 눈, 입술을 꽉 다문 놈의 얼굴은 왜 이렇게까지 이기영이 화가 난 것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솔직히 나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자너….’

무려 몇십 년 동안이나 고생한 김현성이 아니었던가. 1년 정도는 자신이 해보고 싶은 걸 해보고 하고 싶은 걸 한다고 뭐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쉬는 게 맞지.

지금까지 김현성이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1년만으로 부족할지도 몰라.

조금 방법이 잘못되기는 했는데. 그래도 본인이 행복하다잖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조금 짠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이 정도 임팩트는 있어야 조금 시간을 끌 수 있지 않을까.

평범한 방법으로 타이르면서 이야기했다면 애초에 대화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예상했던 것처럼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조금 더 몰아붙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래. 이 정도까지만 하자. 충분히 대화할 상태가 된 것 같으니까.’

솔직히 그냥 노는 거면 상관없는데 길드 재정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놀고 있었던 거니까.

어느 시점에서는 막았어야 했던 게 맞아. 마침 딱 적절한 타이밍이니까. 누나랑도 일 봐야 되고….

“후우….”

“죄… 송합니다. 기영 씨.”

“하아….”

“제가….”

“아닙니다. 제가 조금 말이 심했던 것 같군요.”

“네?”

“요즘 스트레스가 심해서 조금 예민해진 모양입니다. 본래는 이렇지 않았었는데. 걱정거리가 많이 늘어서….”

“…….”

슬그머니 다시 가방을 집어 든 이후에는….

“괜찮네요. 마음에 듭니다.”

라고 말을 내뱉었다. 아직도 분위기는 편하지 않았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환기된 것 같은 느낌.

앉아도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자리 잡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모르고 계시겠지만 파란 길드에서 준비하고 있는 사업들이 몇 가지가 있어서요. 대부분이 초보 모험가나 소외된 계층을 위해 마련된 안건들인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사정이 여의치 않습니다. 무료심리상담센터에 투자한 자금이랑 린델 도시계획이 맞물리다 보니….”

“그, 그렇군요.”

“연금공방과 무기사업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아껴야 되는 상황이에요.”

사실 그렇지는 않다. 워프 게이트에서 오는 수익이 상당하니까. 하지만 김현성이 파란의 자금상황에 대해 파악하고 있을 리 만무, 아마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도 기왕이면 현성 씨가 하고 싶은 걸 막고 싶지는 않습니다. 복지사업을 조금 늦추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서… 후… 죄송합니다.”

“그렇군요… 네.”

“이런 말씀 드리기 너무 죄송하지만 현성 씨가 매달 품위유지비로 사용하시는 자금이 만만치 않은 터라… 네. 품위유지비요.”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으리라. 개인의 품위유지비로 어지간한 클랜과 길드의 연간 예산을 사용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날조된 파란의 재무 상태를 들이밀며 설명한다면 조금 더 좋은 포지션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수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니나 다를까 흔들리는 녀석의 얼굴이 눈에 띈다.

이 새끼는 기본적으로 돈에 대한 개념이 없어. 지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는 않았지만 아마 금수저가 아니었을까.

“제가… 제가… 너무….”

“당연히 저는 현성 씨가 그런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더 이 곳을 즐겨 주셨으면 좋겠고요. 하지만 가끔은 갑옷을 입고 일터로 나가시는 모습이 보고 싶기도 해요. 벌써 1년이나 흘렀으니….”

너도 슬슬 이제 뭐 해야 할지 결정해야지. 이대로 계속 놀고먹을 거 아니잖아.

앞으로 몇백 년 동안 이렇게 살 거야? 이기영도 사람이야. 사람.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되더군요.”

너 그러다가 진짜 백수 될까 봐 겁나. 빨대 꼽겠다는 심보로 붙어 있는 거 아니지? 빛기영 가라사대 무능력한 새끼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하셨노라 못 들어봤어? 너 지금 투 아웃이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이해했습니다. 네….”

“작은 부탁을 드리고 싶은데….”

“네. 어떤 부탁이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공화국에 다녀와주셨으면 해요.”

“…….”

“파란 길드의 지점이 세워질 예정입니다. 많은 지원을 드리기 힘들 것 같지만 꼭 해야 할 일이에요. 처음 파란 길드에 들어와 길드를 키웠던 것처럼 예전의 현성 씨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원은 일체 없을 테니까. 네 혼자 거기 가서 한번 만들어 봐. 세력도 일구고, 던전도 다니면서.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고 있지?

절대로 대출받지 말고 초보 모험가로 돌아간 것처럼 열정을 불태워 보라고.

의미 없이 놀고먹는 것보다는 좋잖아.

녀석이 파란의 길드마스터였던 만큼 대놓고 굵직굵직한 것들로 밀어주고 싶었지만 현장 감각이 없는 놈을 당장 투입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연방과는 멀어질수록 좋으니 공화국에 박아놓는 게 편리하겠다는 판단이 선다.

어차피 파란 길드 공화국 지점은 그냥 상징적인 의미로 만들려고 했었던 거니까. 실패해도 성공해도 굳이 상관없으니 딱 좋지 않은가.

게다가 현성이가 직접 창설한다면 그 상징성은 더욱더 올라갈 테니 구태여 다른 곳으로 파견을 보낼 이유도 없다.

감각을 키우고 돌아오면 그때 가서 업무를 봐도 되는 거고….

천천히 김현성을 바라보자… 조금 머뭇거리는 것 같은 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야 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기영 씨의 안전과 건강이 염려돼서….”

“위협은 지나갔다는 거 알고 계시잖아요. 현성 씨가 저를 걱정해 주시는 건 기쁘지만 저는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최근에 들어서는 그런 친절이 조금 불편해지기 시작했고요. 깨어난 직후의 삼 개월처럼… 하….”

“네.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조금은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현성 씨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언제까지나 멈춰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하아… 지긋….”

이 새끼 지긋지긋해 PTSD 걸리겠네.

“네. 기영 씨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지긋지긋한 놈이 되기는 싫었는지 곧바로 태세전환한 모습은 가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쉬운 것 같아 입꼬리가 올라가기야 한다.

“하지만 기영 씨의 안전이 정말로 걱정됩니다.”

“길드의 다른 분들도 계시니까요. 그리고 천년만년 떨어질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몇 달이니… 무엇보다 제가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처한다면 곧바로 알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앞머리를 살짝 넘기며 입을 열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눈을 확인했던 거겠지. 기뻐 보이는 얼굴, 얘 이런 말 좋아하니까. 마무리하기에 알맞은 대사가 아닐까.

“생각해 보니 제가 지금까지 너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렸던 것 같군요. 나태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뿐만 아니라… 믿음직스럽지 못하셨겠죠.”

“그런 것도 아니지만….”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기영 씨.”

마지못해 한다는 느낌이 강하기는 한데. 그래도 의지는 마음에 들어.

이 이후에는 일사천리지.

“식사라도 같이 하러 갈까요?”

“네.”

밥 먹고.

잠깐 뭐 상점 좀 들르고 산책 좀 했다가.

“저거 괜찮네요.”

다른 길드원들도 만나서 와인 좀 마시고….

“그러니까 현성이 형씨가 공화국으로 출장을 간다는 거요? 누구랑?”

“길드에서 커다란 지원은 없을 것 같아서… 아마….”

“제가 같이 다녀오겠습니다.”

“거, 희영 누님이라면 안심이지. 아. 기왕 이렇게 된거 신입도 데려가는 게 좋을 거요.”

“저, 저도요?”

“혹시나 던전 갈 일이나 사냥 갈 일이 있으면… 실전 훈련은 중요하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역시 현성 씨는 그 모습이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갑옷을 입은 김현성을 칭찬해 준 다음에.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다음에….

그리고….

으음….

그리고….

“말해보세요. 누나. 누나 입으로 직접 듣고 싶거든요. 누나가 원하는 게 뭔지, 직접 부탁해 보세요.”

시바.

“이지후… 도련님… 입니다.”

우리는 연방에 발을 내디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