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887화
휴가 (5)
‘생각보다 빠르네.’
사실 모험가 길드에 들어왔을 때부터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누군가가 접근할 거라는 건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그야 일거리를 찾기 위해 모이는 장소가 아니었던가. 단순한 여행을 생각했다면 평범한 여관을 찾아갔겠지.
나와 이지후가 이 자리에 발을 들인 순간 우리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괜찮은 일거리를 가지고 있거나, 좋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네가 쓸 만한 모험가라면 와 보라고 암묵적으로 이야기한 것과 같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고 있는 다른 인원들과는 다르게 녀석이 이쪽에 말을 건네온 것은, 아마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겠지.
‘어쩌면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친목을 다지고 싶어서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간에 놈이 붙임성이 좋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20대 후반의 서양인, 당연하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다. 곧바로 마음의 눈을 열어 바라보자 놈의 전체적인 스펙이 시야에 들어왔다.
‘영웅 등급 정도. 그 이상이네.’
“부끄럽지만 질풍의 질레인이라고 불리고 있는 질레인이라고 합니다.”
‘나쁘지는 않아.’
전체적으로 호감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별명은 조금 유치하기는 했지만 높은 민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성격도 시원시원한 것 같은 이미지였다.
“실례지만 교국의 캐슬락에서 오셨다는 이야기를 먼발치에서 엿들었습니다. 저도 과거에 잠깐 캐슬락에서 신세 진 경험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어차피 콜로라도의 모험가들과는 어느 정도 교류의 장을 열어 놓으려고 했었으니까. 나쁘지 않은 타이밍일지도 모르지.
슬그머니 이지후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꾸벅 인사를 올리고 살짝 뒤로 물러서자 그게 허락의 표현이라는 걸 알았는지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자리에 앉은 이후에는 조용히 이지후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나 방금 조금 메이드 같기는 했어.’
뿌듯해하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이상하게 뿌듯하자너. 아리스 시녀의 움직임이었다구.
“네. 앉으셔도 됩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기념이니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
“먼 길을 찾아오셨군요.”
“요즘에는 그렇게 먼 길도 아닙니다. 워프게이트가 있으니까요.”
“하하… 그것도 그렇군요. 캐슬락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많이 발전했습니다.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모험가들에게는 좋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보다 좋지는 않겠죠.”
“…….”
“콜로라도가 기회의 땅이라고 불리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 손님들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러한 것의 영향이겠죠. 확실히….”
“그러니까… 질레인 님이라고… 용건 좀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조금 성질이 급해서.”
“하하. 별것 아닙니다. 그냥 외지에서 오신 분과 친목을 다지고 싶어서라고 한다면….”
“…….”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농담입니다. 하하… 그저 제가 이지후 님께서 원하시는 걸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분명히 이곳까지 오신 이유가 있을 겁니다. 굳이 모험가 길드를 찾으신 것으로 미루어 보면 쓸 만한 용병을 찾고 계실 수도 있고… 떠도는 소문 같은 것들을 찾아오셨을 수도 있겠죠. 던전이나….”
“흥미롭군요.”
“어찌 됐든 간에 험한 일을 하시려고 뛰어든 것은 확실하다고 봅니다만… 콜로라도는 외지인들에게 친절한 도시는 아닙니다. 도시 안쪽은 몰라도 바깥쪽으로 나서면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고 있는 건지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정보를 구하거나 오래 활동하시려면 아무래도 파티원의 숫자를 조금 늘리는 게 좋으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마침 용병을 구하고 계시는 것 같으니….”
“흐음… 던전 탐사에 흥미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쓸 만한 정보가 있습니까?”
“몇 가지 흥미를 느끼실 만한 게 있습니다. 공개된 던전이 아니라….”
‘어디서 사 자 냄새가 나기는 해.’
호감상의 외모에 호감을 느낀 것도 잠시, 귀를 기울이기에는 너무 구린 게 느껴진다.
“만약 당신의 말이 맞다면 그 대가로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뭡니까?”
“저는 그렇게 값싼 자원은 아닙니다.”
조금 띠껍기는 했지만 놈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스탯은 영웅 등급을 넘어 전설 등급을 바라볼 정도였고 직업이나 가지고 있는 특성 또한 나쁘지 않다.
촌스러운 별명이 있다는 것도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요인 중에 하나.
콜로라도에서 제법 오랫동안 활동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질풍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라면 괜찮은 퀘스트나 던전을 클리어한 경력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스탯도 빼어나고 얼굴도 제법 반반하고, 모험가 길드의 의뢰를 받는 용병이 이 정도라면 충분히 비쌀 만하지.
문제는 녀석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
마치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가련하고 처량한 이기연을 한 번 훑는 것이 보인다. 답은 정해져 있다는 듯이 말이다.
“…….”
“골드보다는 더 편한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재미있군.”
뭐가 재미있어. 시바.
‘너 이 개새끼 빌런 이었구나.’
녀석이 이쪽을 확 잡아끄는 것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하체에 힘을 꽉 줬지만 몸은 속절없이 끌려간다. 파드득 소리와 함께 앞섶이 뜯겨 나간다.
쇄골이 드러나 황급하게 손으로 가려봤지만 이미 녀석은 그것을 보고 난 이후였다.
‘노예의 인장.’
시바.
이지혜 디테일 시바.
내가 이건 하지 말자고 했잖아.
이거 누가 눈치 깔 수도 있다고 말 했잖아.
언뜻 보면 단순한 문신처럼 보이지만 마법적인 힘이 깃들어져 있는 문장. 이전에 블랙마켓에서나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제가 저런 종류의 계약을 파악하는 것은 제법 밝은 편이라….”
‘이 개새끼. 블랙마켓 이용자였었나 보네. 캐슬락에 갔다는 것도 이상하기는 했어.’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알 필요는 없겠죠.”
“흐음….”
발정 난 개새끼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린다. 노예의 인장을 직접 확인한 이후에는 마치 물건을 보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다.
‘와. 나오길 잘했다. 진짜. 아직도 이런 개새끼들이 있었네.’
당연히 교국에서는 불법이 된 지 오래, 모든 것들이 그렇듯 완벽하게 뿌리를 뽑을 수는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노예에 대한 거래는 불법이 된 지 오래였다.
아마 놈은 이지후가 몰락한 마켓의 관계자거나 불법적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쓰레기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교국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연방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내려왔다고 말이다.
어떻게 착각하는지는 이 새끼 마음이었지만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다.
“연방 내에서는 아직 합법적인 곳이 존재합니다. 물론 위대하고 대단하신 성자 덕분에 대부분의 대도시들이 불법이라는 스탠드를 취하고 있습니다만… 그걸 보완할 법적인 제도가 만들어지기까지는 한참이 걸릴 겁니다. 어찌 그분의 눈이 세상 모든 곳에 닿을 수 있겠습니까?”
“…….”
“몇몇의 대도시들은 암묵적으로 쉬쉬하는 분위기이기도 하죠. 연방은 다른 곳들에 비해 상황이 그리 좋지 않으니 파고들 틈도 많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곳에 블랙마켓이 있다는 건가?”
“모르는 척하시는 건지, 전부 다 알고 오신 거 아닙니까? 외부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 가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니 주변의 눈과 귀는 전부 가려 놓았습니다. 저를 고용하신다면 더 자세히 알려드릴 용의가 있습니다만…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군요.”
이지후는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시바.’
설정상 알맞은 행동이기는 하다.
이지후는 아직 자신이 이기연을 사랑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설정이었으니까.
이지후의 사랑은 뒤틀려 있었고 녀석은 기본적으로 악 성향의 인물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나 자신이 즐겁기 위해서라면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았고 기본적으로 애 같은 성향이 강했다.
그에게 이기연은 아끼는 장난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물론 실제로 이기연이 자신을 떠난 이후에는 죽도록 후회한다는 세부 설정이 붙어 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이기연이 떠난 적이 없으니 자신의 진심을 모르고 있는 상태.
나를 바라보는 이지후의 눈이 조금 더 냉정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몰입 좀 그만해. 시바.’
“흐음…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요?”
장난기가 들어 있는 얼굴.
“…….”
“누나한테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이지후는 또 이기연을 괴롭히는 것을 즐긴다. 어릴 적부터 사랑을 받은 적이 없는 녀석의 애정표현은 완벽하게 잘못된 방향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아니, 몰입을 시바… 디테일 설정, 시바.’
“도, 도련님.”
“싫어요?”
‘정답을 생각해. 기연아. 넌 당차고 똑똑하잖아.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지혜롭잖아.’
물론 정말로 이지혜가 나를 넘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건 테스트나 다름없게 느껴진다.
“저, 저, 저는….”
일단 두렵다는 눈을 일발 장전, 손을 가슴에 꼭 가져다 댄 이후에 구원자를 바라본다.
처량하고 가련하고 여리게,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처럼 촉촉한 한 떨기 눈망울을 눈에 담아보자.
이지후의 표정은 여전히 비릿하다. 겨우 네 답이 동정에 구걸하는 것이라면 틀렸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 이게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이지후는 이기연이 자신의 말에 복종하는 것을 좋아하니까.
결국 나는 조용히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결심했다는 듯이, 입술을 꽉 깨물면서 말이다.
“저, 저… 저는 도련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이지후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긍정의 뜻이라 받아들인 질레인이 내 손을 꽉 잡았을 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이 벽 쪽으로 튕겨 나갔다. 쇄골이 잠깐 드러난 것일 뿐인데도 이지후는 조용히 나를 망토로 감싸 안는다.
무심한 듯 시크한 행동, 어째서 자신이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은 자기 자신의 대한 실망감과 이기연에게 자신이 진심으로 끌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얼룩진 눈빛.
찰나였다.
아마 오늘의 이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찰나의 감정은 사라지겠지만 분명히 이지후의 가슴 속에 꺼질 수 없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했다.
‘아니, 시바. 지후야! 스토리 전개 실화냐. 시발.’
“마음에 들지 않는 제안이군.”
‘지후야 반하겠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 * *
-그날 밤부터, 이지후는 자신의 속 안에서 타오르는 활화산 같은 감정을 분노로 착각하게 되는 거예요. 오빠. 더욱더 집요하고 거칠고 무자비하게 이기연을 괴롭히기 시작하는 거죠. 내가 흔들리는 건 이기연 때문이라고, 모두 이기연이 잘못한 거라고, 말이에요.
-너무 몰입했어. 누나.
-오빠도 괜찮았어요.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네. 왜 그렇게 섹시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