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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88화 (879/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88화

휴가 (6)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이지혜는 대륙인들의 상황이니 뭐니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자기 욕망 채우기에 급급할 뿐이지.

생각이 조금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항상 일 처리를 똑바로 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

이지후에 너무 스며들었기 때문인지, 이번 기회에 휴가다운 휴가를 즐겨야겠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쉴 수 있는 타이밍은 지금밖에 없다는 걸 느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꼬시기 위해 되는대로 내뱉었던 일들에 대한 것은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누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

‘시바. 연기력.’

“이기연… 넌 아무것도 아니라고….”

“…….”

조용히 혼자 중얼거리는 눈빛은 가관, 눈에는 이글거리는 증오와 분노로 얼룩진 애정이 들어서 있다.

‘이 누나는 왜 배우 안 한 거야? 이럴 거면 연예계 데뷔하시지 그러셨어요.’

지구에 있었을 때 진지하게 생각했었더라면 최소한 안기모보다는 유명한 배우가 되지 않았을까.

캐릭터와 혼연일체 한 모습을 소름이 돋을 정도, 뭐가 이 누나를 이렇게 변하게 했는지 궁금하다.

‘스토리텔링 한번 기가 막혀. 진짜.’

이지혜가 예고했던 대로 어제의 사건 이후로 이지후가 이기연을 대하는 게 조금 거칠어졌다.

마치 억지로 자신은 이기연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말해주는 것처럼….

본인의 설정에 의하면 남아 있던 약간의 동정심조차 사라지고 있었으니 과도기라면 과도기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진심을 부정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거겠지. 겨우 삼 일 만에 일어난 변화에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배경들이 깔려 있다.

이지혜 작가님의 말씀으로는 개연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

자신의 색으로 이기연을 물들이는 것으로 모자라 더럽히기까지 하는 이지후의 행동은….

“시바, 말해서 뭐해. 나라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

“저기 도련님.”

“입 다물어.”

“그게 아니라….”

“입 다물라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지후가 나를 벽에 밀친다.

“왜. 그새 또 내가 그리워졌어?”

‘아니, 시바. 누가 얘 좀 말려줘 진짜. 그게 아니라 우리 할 건 해야지.’

“도련님 그게 아니라….”

“너도 어쩔 수 없구나.”

비릿한 양아치가 미소를 띄며 더러운 손길을 내뻗는다.

“그, 그만하세요!”

소심한 반항, 하지만 녀석의 눈빛은 변하지 않는다.

아주 조금의 애정이 깃들어 있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더러운 이지후의 표정에는 증오와 탐욕밖에는 들어서 있는 것이 없다.

결국에는 포기한 것처럼 몸에 힘을 빼고 눈물을 일발 장전, 거침이 없었던 이지후는 조용히 이기연을 바라보다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선다.

연기 10년 차 이상 배우의 내공이 느껴지는 심오한 표정 연기.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듯한 눈빛과 거칠게 내쉬고 있는 숨.

떨리는 손을 붙잡은 이후에 뒤를 돌아서는 행동까지 완벽하기 그지없다.

“나가.”

“네?”

“나가세요, 누나. 제 눈 앞에서 사라져요. 지금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아주, 시바 갈 데까지 갔구나.’

“…….”

이지후의 마음처럼 꽝 닫힌 방문의 너머로 물건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도 메소드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진심으로 이 누나가 무서워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몰입하고 있으니까.

티키타가가 자연스럽게 되다 보니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몰입하고 있는 것 역시 주의해야 할 점 중에 하나가 아닐까.

다시 한번 마음을 다 잡는다.

나라도 정신 똑바로 쳐야 돼.

누군가 한 명은 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블랙마켓 문제도 있으니까.’

질풍의 질레인인지 뭔지가 누나가 고용한 배우가 아니라면 콜로라도에는 알게 모르게 블랙마켓이 운영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연방 내에서도 딱히 다른 반응이 없는 걸 보면 그 규모가 크지 않거나 자신들만 따로 사용하는 커뮤니티가 있겠지. 주 품목으로 뭐가 거래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 와중에 연방시민들의 상태가….

‘그리 나쁘진 않은 건 다행이야.’

계단을 내려오자 시선이 쏠린다. 아이템 빨로 무장했던 이지후의 소문이 돈 모양인지 어제처럼 시비를 걸거나 하는 놈은 없겠지. 우리 도련님께서 질레인을 한 방에 보내버렸으니까.

모험가들은 어제와 변함이 없다. 여전히 활기차고, 문제를 겪고 있는 걸로 보이지 않는다.

콜로라도라는 도시 자체가 그래. 어제도, 엊그저께도 그렇게 느끼기는 했지만 생각한 것 이상으로 분위기가 좋다.

많은 사건을 겪었던 연방이 아니었던 것처럼 꿈과 희망찬 미래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검은백조가 내놓은 통계가 다른 쪽으로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이 정도면 상담센터에 예산 괜히 쓴 거 아닌가 몰라.’

시끌벅적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낮부터 럼주를 들이켜는 놈들도 있고, 파티를 신청하기 위해서 발품을 파는 놈들, 쓸 만한 퀘스트가 있는지 기웃거리는 놈들.

“괜찮은 퀘스트 남은 것 좀 있소?”

“잠시만요.”

“같이 파티하실 사제님 구합니다. 관련 직업 가지고 계신 분들 차별 없이 환영합니다. 부담 없이 말씀해 주세요.”

‘연방 애들이 멘탈이 특히 좋은가.’

연합 쪽은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사실 교국만 하더라도 초창기 때는 꽤 고생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이야 많이 괜찮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해하기 힘드네.”

어쩌면 배경의 차이일 수도 있다. 콜로라도는 외부인들도 많았고 도시 자체의 분위기가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힘든 과거의 일들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성향이 모인 이들이 모인 도시라는 게 적절한 판단이겠지 뭐.

어디 자리 잡을 곳 없나 주변을 둘러보다 슬쩍 빈자리에 몸을 앉힌다.

‘아. 이지후 얘는 밥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다시 위로 올라가.

“도련님. 식사는….”

라고 말해봤지만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다시 밑으로 내려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딱히 눈에 띄는 건 없다.

‘바깥에 한번 나가볼까.’

근처 빵집에서 빵이나 사다 주면서. 도련님께서 좋아하는 어쩌고저쩌고하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겠지.

겸사겸사 동네 구경 좀 하고, 제대로 보질 못했으니까.

곧바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지사. 바깥도 안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차이점은 이제 막 원정 준비를 하는 모험가들로 붐비고 있다는 점.

삼삼오오, 혹은 몇십 명이나 되는 모험가들이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

원정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방에 쑤셔 넣거나 막차를 타기 위해 소리를 지르는 이들도 눈에 띈다. 사냥을 나가거나 자재들을 구하기 위함이리라.

조금 특이한 광경이 시야에 비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야. 저것들은.

마음의 눈으로 쓸 만한 놈이 없나 둘러보던 때 눈에 띄던 칭호가 하나.

[칭호 -포션 중독자]

한두 놈이었다면 웃으며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한두 명이 아니다. 한 파티의 절반, 많게는 파티 전체가 약물 중독자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인부들이나 평범한 상인들 역시 마찬가지,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게 된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정리가 끝나기 시작한다.

유난히 생기가 넘쳤던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콜로라도 관리자가 누구지? 이 정도라면 도시 관리자가 연관되지 않은 게 이상한 수준 아니야?

-지혜 누나. 누나?

-…….

-누나?

“시바 기대도 안했다.”

‘아무 문제도 없을 리가 없지.’

생각해 보면 너무나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게 이상한 시점이 아닐까.

신앙에 의지하고 희생과 부활의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교국인들조차 지난 날의 기억을 쉽게 잊을 수 없었을진대, 다소 소외된 곳에 있었던 이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게 잠복수사의 힘 아니겠어.

“어라. 다 떨어진 것 같은데… 아… 제기랄…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 구해와야지. 출발하기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빨리 다녀와.”

“좀 빌려주면 안 돼?”

“내 몫밖에는 없어. 말롱. 일주일 이상 걸리는 원정이라고 미리 말하지 않았어? 클랜 마스터한테 한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빨리 다녀오라고… 내가 대충 둘러대 줄 테니까.”

“알겠어. 하. 짜증 나 죽겠네.”

“…….”

“제기랄.”

욕설을 내뱉으며 파티원과 따로 떨어진 말롱이라는 녀석이 보인다. 정체불명의 포션을 챙기고 있는 놈들을 따로 마차에 옮기는 것을 보니 내 예상이 맞기는 한 모양.

슬그머니 사람들 품으로 섞이자 그 누구도 나를 알아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샘솟는다.

점점 더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놈. 당연하지만 블랙마켓은 아닐 것이다.

꼬리 밟기지, 뭐. 녀석들 나름대로 유통경로를 갖추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했다.

정말로 콜로라도의 지배층에 있는 놈이 연관된 것이 맞다면 무척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을 것이다.

품 안에 쥔 촉매 몇 가지. 영웅 등급 정도야 쉽다.

신체스탯은 부족하기는 하지만 가지고 있는 하위 직업 연금소환만 하더라도 고유영웅 등급.

사실 신체 능력도 일반 등급 이상의 전사들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김현성한테 몸 쓰는 법도 조금 배워뒀고.

많은 이들이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만큼 녀석이 멈춘 곳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이것 봐.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뒷골목에서 천인공노할 범죄행각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잡았다. 요놈들.’

“일주일… 아니, 한 달 분량으로 준비해 줘.”

“네. 알겠습니다. 아. 죄송합니다만 가격이 조금 올랐는데.”

“저번 달에도 오르지 않았어?”

“하하. 죄송합니다. 워낙에 수요가 많다 보니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

“뭐 해먹고 싶은 건 이해하지만 적당히 해둬. 다 먹고 살려고 이러는 건데, 원정 끝나고 남는 게 없으면 누가 사 가겠어?”

“저희도 충분히 고객님들의 입장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번에도 고맙다고.”

“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음번부터는 조금 조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뭐?”

“손님을 달고 오셨더군요.”

동시에 목에 서늘한 감촉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

“넌 뭐야?”

“어… 저, 저, 저기… 저는… 그러니까… 어쩌다가…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동시에 입을 막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강한 약품 냄새가 느껴진다. 다분히 기절시키려는 의도겠지만 희생과 부활의 신의 몸에는 하급 약물 따위는 듣지 않는다.

물론 날붙이는 들어. 그래서 무서워. 다리에 힘을 푸는 것은 순식간, 일단은 쓰러진 척하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에 옆쪽으로 몸을 던지자 턱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을 받아 드는, 우악스러운 손이 느껴졌다.

-누나… 누나?

-…….

어떻게 해.

나 납치당했나 봐.

“뭐야, 노예잖아? 이거?”

누가 들어도 쓰레기 같은 놈들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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