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889화
휴가 (7)
냉정하게 판단해 보면 내 몸에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풀어진 것 역시 그런 연유 때문이지 않을까. 당장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확실한 선택지도 있다.
‘하얀이 소환하면 끝이자너.’
문제는 그게 버스터콜급의 재앙이 될 거라는 것, 내가 어째서 이런 모습인지 설명하는 것도 문제거니와 콜로라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김현성도 마찬가지야. 퀘스트를 내린다면 한 시간도 안 돼서 날아오겠지만 김현성한테 내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
‘사실은 이기연이 이기영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면 이 새끼가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냐구. 현성이의 소중한 추억을 더럽힐 수는 없자너.
오히려 나쁜 상황이 아닌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어차피 블랙마켓을 찾아야 했으니까. 내가 납치당한 걸 알면 누나 쪽에서도 다른 방법을 찾아 주겠지. 놀이도 놀이지만 중요한 건 안전이었으니까.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누나. 나 납치당한 것 같아. (0/1)]
[이지혜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이지혜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시바, 끝까지. 말 안 한다 이거네. 퀘스트로 보냈는데도 말 안 한다 이거야?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질풍의 뭐시기가 콜로라도에 블랙마켓 있다고 한 거 기억해? 걔네 뒤를 좀 밟다가 지금 감금당한 채로 어디로 끌려가는 중이야. 하얀이랑 현성이는 부르면 조금 그러니까. 알아서 방법 좀 생각해. 슬슬 무서워지려고 그래. (0/1)]
[이지혜에게 전설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이지혜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진짜 이 누나 너무한다. 지금 몇 시간 지났지? 한 다섯 시간 지났나? 슬그머니 이지혜 쪽으로 망원경을 돌린 것은 당연했다.
-진짜 이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화났나? 내가 다 망친 거야?
-사람 마음을 잘 알아? 진짜 미치겠다. 이기영. 너 때문에 내가 미쳐. 진짜 미치겠다….
침대로 뛰어들어 베개를 껴안으며 바둥거리는 모습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누나는 진짜….’
심지어 벌떡 일어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꼴은 가관, 이기연을 찾고 있는 이지후의 얼굴, 메소드 연기에 들어선 것이다.
녀석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지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허겁지겁 뛰어다니던 녀석은 이내 모험가 길드를 나서고 길거리를 정처 없이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대사를 치고 있지는 않았지만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마음으로 전해져 온다.
-누나….
허억허억거리는 목소리로 애타게 누나를 찾고 있는 모습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 같았던 비정한 눈동자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고인다.
-누나! 누나! 이기연… 이기연!
‘야, 이 정도면 진짜 싸이코패스 아니냐.’
방금 전까지 침대에 누워서 바둥거렸었잖아.
‘정신이상자야.’
왜 지금 와서 애타게 누나를 찾고 있는 건데….
어처구니없게도 비가 내린다.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지기 시작했고, 굵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이지후의 눈물을 감춘다. 주먹을 꽉 쥔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다.
어디까지 하나 한번 지켜보자는 심정으로 이지후를 지켜봤지만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나… 어디 있어요? 제기랄… 이기연… 어디 있냐고!
후회,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얼룩진 얼굴, 계속해서 뛰어다니다 철푸덕 넘어지기까지 한다.
문득 휴가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시간이 조금 더 많았더라면… 어떤 장대한 서사를 가져왔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봐왔단 온갖 빌런들의 광기는 광기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저게 바로 진짜 광기야.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 사실 딱 적절한 타이밍이기는 했다.
마침 나를 가두고 있는 마차가 멈춘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뭔가 화물이나 짐을 옮기는 소리가 들려온 이후에는 어딘가로 이동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이 흔들리고 쾅 하는 소리와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으윽….”
하는 소리와 함께 보인 것은 칙칙한 감옥.
“흐으으윽… 흐윽….”
흐느끼는 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들려오는 소리에 주변을 둘러보자 누가 봐도 팔려온 것처럼 생긴 이들이 눈에 띄었다.
남자가 둘, 검투사로 보이는 녀석 하나와 곱상하게 보이는 녀석. 그리고 여자는 셋, 이종족이 둘이었고 그중 하나는 엘프로 보인다.
대륙법으로 규정된 이종족 거래금지법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 아마 공급이 적은 만큼 더 비싸게 팔려나가겠지. 거래품목은 이것뿐만이 아닐 게 분명하다.
‘제대로 찾아오기는 제대로 찾아온 거네.’
일단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야지. 엉거주춤 외곽에 자리를 잡고 있는 와중에도 뭔가 피드백이 없다.
여기서 얼마나 더 이러고 있어야 되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철문이 열리며 한 명이 더 들어선다.
“후에어어어엉….”
“…….”
“후에에에에에에엥….”
하는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뱉는 꼬맹이가 하나.
“닥치고 들어가.”
하는 어두운 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잔뜩 얼어붙은 몸으로 안으로 들어선다. 뭔가 어딘가에서 많이 본 듯한 얼굴.
‘쟤 하연수 아니야?’
항상 이지혜와 함께 다니던 부관. 요정의 마법이라도 맞았는지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지만 틀림없이 하연수의 모습이 남아 있다.
마음의 눈 역시 그녀를 하연수라고 말하고 있으니 반가운 마음이 샘솟는다.
그럼 그럼. 나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지. 그러고 보니까 쟤 왠지 콜로라도에서도 본 것 같아.
호위가 붙기는 붙었었네. 솔직히 말해서 조금 쫄았었다. 여기 분위기가 워낙 어두웠어야지. 이제야 좀 심적으로 안정되는 것 같아.
“저기… 연수 씨? 저희 여기….”
“흐으으에에엥….”
“연수 씨, 여기 지금….”
“언… 언니는 누구예요?”
시바, 가지가지 한다. 너도 진짜.
“저….”
“여기는 어디예요? 흐윽… 구해주세요.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너도 이지혜랑 같이 데뷔할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실제 상황….”
매미마냥 달라붙어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애초에 도움을 기대하는 것부터가 어리석었다. 그러니까. 하연수는….
‘그냥 방관자라는 거지?’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오지 않으면 안 움직인다는 거지? 최소한의 방어막이 하나 생겼다는 건 기쁘지만 솔직히 반갑지만은 않다.
“우… 우리 전부 다 죽는 거 아니죠? 그렇죠?”
이지혜께서 키운 배우가 이상한 소리로 장내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었으니까.
덜컹거리며 철문이 다시 열려온 것은 그때.
산적처럼 생긴 남자 셋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보자 내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어떻습니까?”
“…….”
“상품에 손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지랄하지 마. 진짜. 니네 나한테 손대는 순간 꼬맹이 하연수한테 목과 몸이 분리되는 거야.’
“데려와.”
“꺄악!”
‘연수야. 언니 큰일 났다. 이것 봐. 이 새끼가 팔목 잡았어.’
“어디로 데려갈까요?”
‘연수야. 시바, 그냥 보고만 있는 거 아니지? 시바. 연수 님. 하연수 님. 너 왜 그래. 야. 그냥 바라보고만 있으면 안 되지.’
“연, 연수야!”
“언… 언니이!!”
시바, 그냥 부르지만 말고 좀 도와주라고… 언제 봤다고 언니야.
“언니 데려가지 마!!”
“누가 저 꼬맹이 좀 치워. 벌써 친해진 모양이네. 참… 인간적이야. 그래.”
야. 하연수 너 진짜 너무한다. 너. 진짜 버스터콜이라도 불러야 돼? 그래야 되는 거야?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각하게 정하얀이라는 선택지를 고민했을 때 철문의 밖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형님.”
“뭐야?”
“저 여자 데려오랍니다.”
“누가?”
“오늘 경매에 내놓을 거랍니다. 뭐시기 그 목걸인가 뭔가 하는 메인 상품이 하나가 하자가 생겨서 대체품이 필요하답니다. 지금 바로 준비시켜야 한다는데….”
“이 여자 인장도 아직 박혀 있는데… 노예 인장 있는 거 알아?”
“거래 끝난 후에 마법사 불러서 처리하겠답니다. 저도 명령받은 거라 데려가겠습니다. 일단 무대 위에 세울 준비는 해야 하니 말입니다. 조금 있으면 메인이벤트라 정말로 시간이….”
“데려가.”
내가 빠져나간 이후에 철문에서 화를 참지 못한 남자의 괴성이 들려온다.
혀를 쯧쯧 차는 부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그 괴성이 화가 나서 지르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아.
걔네, 꼬맹이 하연수한테 뒈진 것 같어. 아니나 다를까 녹슨 철문 사이로 붉은색이 새어 나온다.
숨이 막히는 꺼억 꺼억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둔한 녀석은 그게 자기 형님이 뒈지는 소리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저 급하게 나를 어딘가로 빠르게 데려갈 뿐이지 뭐.
아까보다 조금은 더 상황이 좋아 보이는 방에 들어선 이후에는 갑작스레 여러 명이 우르르 들어온다.
“예쁘네요.”
물로 몸을 씻기고.
“비싸게 팔리겠네.”
머리를 감기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의자에 앉혀져 이것저것 관리를 받기 시작,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관리해 주는 것 같아.
이거 아마 지혜 누나가 좋아할 거야. 손톱 발톱도 칠하고 얼굴에는 뭐도 많이 발라 주자너.
머리도 드라이해 주고, 눈앞에 있는 거울에도 내 모습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게 보인다. 내가 보기에도 꽤 봐줄 만한 모습이다. 솔직히 예뻐 보이기는 해.
“뭘 입혀서 내보낼까요? 마담.”
“노출은 심하지 않은 게 좋을 것 같네. 일어나.”
“네? 저, 저요?”
“그럼 네가 아니라 누구겠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이후에는 이것저것 옷을 입히고 있다.
“당신들은… 어, 어쩌다가 이런 곳에서 일하시게 된… 건가요?”
“우리라고 일하고 싶어서 일하고 있겠니? 아무래도 이 옷은 아닌 것 같은데… 따뜻한 차라도 마시고 있어. 립은 마지막에 바르자.”
“마담. 지금 데리고 나오라는대요?”
“잠깐 장신구만 좀 하고.”
“급하대요.”
뭔가 이것저것 한 것 같기는 한데 내 모습을 확인할 수가 없다. 어정쩡한 포즈로 대기실 같은 곳에 앉아 있자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순식간에 일이 진행된 것만 같은 느낌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여러분 오늘 예정되어 있었던 마지막 상품인 미카엘라리아의 목걸이는 사정이 생겨 여러분들에게 선보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주최 측의 미숙함으로 사전에 예고 드리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분위기는 별로 좋지 않다. 당연하지. 저 목걸인가 뭔가 하는 거 때문에 여기 찾은 사람도 있을 텐데.
갑자기 파투났다 그러면 얼마나 기분이 더럽겠어. 아마 단단히 뿔났을 거야. 저거 봐 야유하는 소리 좀 들어보라고.
블랙마켓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각 잡고 하는 놈들은 아닌가 보네.
-실망하신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한 상품이 있습니다.
단상 위로 몸이 떠밀린 그 순간.
“…….”
장내가 순식간에 침묵으로 물들었다.
“…….”
“…….”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직후.
“10만 골드… 10만 골드!!”
“20만 골드다!”
그 어처구니없었던 현장의 사이로….
‘네가 왜 여기 있어?’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