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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96화 (88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96화

휴가 (14)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한 얼굴이기는 했다.

김현성의 첫사랑이 정말로 이기연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작은 호감을 가지고 있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같이 파란으로 향하자고 했던 걸 보면 은근슬쩍 핑크빛 미래를 그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림도 없지. 시바. 이기연한테는 이지후 도련님이 있자너.’

소중했던 하룻밤의 추억으로 시작했던 김현성의 감정, 아마 자신과 함께 가자는 것은 조심스러운 고백이 아니었을까.

김현성이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걸 꺼리는 성격이니 아마 저 정도 표현이 한계였을 거고….

애초에 저런 말을 잘 하지 않는 걸 보면 꽤 용기를 냈다고 봐도 무방하다.

등 뒤로 뭔가 짜릿한 게 훑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 이 새끼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한테는 김현성이 느끼고 있는 정체 모를 아쉬움이 느껴졌다.

시작하기도 전에 끝장난 소중한 감정. 다시 한번 확실하게 끝장내 주기 위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네. 저는 이지후 도련님을 사랑해요.”

비치기연은 이미 이지후 도련님만의 노예자너. 삼대 길드의 파란 길드마스터든지 노을빛의 검사든지 간에 상관없어. 세상에서 중요한 건 능력이랑 외모가 아니거든.

“그… 그렇군요.”

“파란 길드마스터 앞에서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네요.”

“아니요. 저는….”

뭘 아니야. 부정하지 말자. 딱 못을 박아 둬야겠어. 넌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차인 거라고. 조금 더 현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어.

“저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랍니다.”

“네?”

“파란 길드마스터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애당초 못 올라갈 나무였다는 거야. 누나 말 이해하지? 그리고 확실하게 인식하게 해야지. 애매하면 정신승리 할 수도 있으니까 확실히 자신이 차였다는 걸 알고 있어야 돼.

이를테면 부정하기 전에 선수를 치는 거나 마찬가지다. 애초에 김현성은 고백할 생각도 없었고, 그 정도로 큰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았지만 받아들이는 쪽에서 선수 친다면 조금 더 확실히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현성 씨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죄송해요.”

‘빌드업 오지긴 했다. 진짜.’

마치 마법 같은 빌드업. 이 새끼는 진짜로 지가 일생일대의 고백을 지른 다음에 차인 줄 알 거야.

‘철벽 오졌다. 진짜.’

근데 여지는 또 줘야지. 원래 관리라는 건 그렇게 하는 거니까.

“만약 현성 씨와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이런 대사. 전형적이지만 깔끔하고 심금을 울리잖아.

“저도… 저도 조금은 더 건강한 사랑을 할 수 있었을까요?”

김현성의 눈에는 아쉬움이 깃들고 있다. 인간은 본래 분위기에 취하는 생물이니까.

어두운 공간에서 밀착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면 마, 없던 감정도 스멀스멀 올라올 것이다.

물론 물오른 이기연의 연기력이 이 상황을 끌고 가는 것 중에 하나.

처연한 얼굴로, 눈물 젖은 눈동자로, 유혹하는 것만 같은 입술로, 약간 붉어진 뺨으로, 연약한 손짓과 발짓으로 보호 본능을 자극시킨다.

마치 자신이 멜로드라마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로 분위기가 잡혀 있다.

‘스님도 두근두근거릴 거라고.’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도 분위기에 취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 김현성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이기연은 다시 한번 옥구슬 같은 한줄기 눈물을 떨어뜨린다.

어째서 김현성을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 어째서 자신은 이런 사랑을 해야 하는 걸까. 어째서 나는 이렇게 멍청하고 어리석을까.

좋은 사랑을 할 수 있으면서도 왜 결국에는 마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는 것일까. 왜 파란 길드마스터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걸까. 나는….

‘위로해 주세요.’

“기연 씨….”

‘저는 지금 당신의 위로가 필요하답니다. 안아줘요. 꼭 안아주세요. 몸이 으스러지도록 안아주세요. 제발요. 제발 안아주세요.’

그것은 최면이나 다름이 없는 기술이라 할 만했다.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여자를 바라보는 듯한 김현성의 얼굴엔 어떻게든 이기연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는 표정이 깃들어 있다.

온몸으로 안아달라고, 위로해 달라고 말하고 있는 여인을 어찌 가만히 둘 수 있을까.

결국 김현성은 살짝 손을 뻗어 상처 입은 여인을 보듬으려 했지만.

“이러지 마세요. 파란 길드마스터.”

어림도 없지. 시바.

“더 이상… 더 이상 제게 이러지 말아주세요. 저를… 더 이상… 제 마음을 흔들지 말아주세요.”

시바 새끼.

“죄… 죄송합니다. 저는 단지….”

“…….”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2번이나 차였자너.

너는 근데 진짜 여자 잘 만나야겠다. 현성아. 그렇게 어리버리해서 이 거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진짜로.

이렇게 멍청해서…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 같이 행동하면 있던 매력도 없어져요.

이러다가 여우 같은 애 만나면 아주 길드까지 팔아넘기겠어. 빨리 혜진이랑 연결시켜 주든가 해야지, 진짜.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저. 그저 위로해 달라는 것처럼 느껴져서….”

“좋은 사람이군요. 현성 씨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좋은 사람이라니….”

“현성 씨에게 사랑받는 분은 분명히 행복할 거예요.”

이런 대사도 어장관리 하는 데 타율이 꽤 좋더라. 쓸데없는 희망을 심어주는 거 누나가 진짜 잘하는 거거든.

“그건….”

“그 따뜻함은 현성 씨를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서 남겨주세요.”

다시 한번 몸을 밀어내면서 말을 내뱉는다.

‘기왕이면 혜진이를 위해서 남겨둬. 나 아직 주식 안 버렸으니까.’

김현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얼굴로 말이다. 물론, 표정에는 씁쓸함이 담겨져 있었지만 조금은 시원섭섭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 것 같습니다. 기연 씨.”

“…….”

“그럼 이제 어떻게….”

“도련님에게 돌아가야겠죠?”

“…….”

“만나서 반가웠어요. 현성 씨.”

천천히 몸을 일으켰던 바로 그때였다.

“저… 기, 기연 씨.”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내 손을 붙잡은 것. 잠시 후 깜짝 놀란 얼굴로 황급히 손을 놓아주기는 했지만 약간 의외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녀석이 미련을 보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기연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는 걸… 녀석이 모를 리 만무했으니까.

아마 녀석 나름대로 매듭을 지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게 매듭일지, 아니면 새로운 인연의 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 보였다.

“쓸데없는 참견일 수도 있습니다.”

“네?”

“어쩌면 기연 씨가 원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

“어떻게든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네? 그건….”

“무엇을 요구하기 위해서라거나…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저 이래야 될 것 같아서….”

“상냥하시네요. 저… 조금은 못되게 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솔직히 저는 기연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연 씨에게 품은 이 감정이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기연 씨가 행복하셨으면 합니다. 이 마음은 거짓이 아니에요.”

‘와. 시바. 진짜 이 새끼. 찐이야?’

그러니까. 그거야?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이지만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이거야? 멀리서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해주고 싶다. 이거냐구.

너 이 새끼. 지혜 누나한테 대본 받고 여기 왔어? 네가 무슨 멜로물 서브 주인공이야?

정말로 이 새끼도 고용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하지만 김현성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다.

타인에 관심이 없어도 아예 없는 새끼가 갑작스레 이기연에게 이리 신경을 써주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이기연에게 음습한 마음을 품고 있기는 한 모양.

형제를 배신하기까지 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 배신에 후회가 없었는지 김현성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좀처럼 타이밍이 나오지 않고 있다.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연적에게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을 데려다주기 위한 과정, 아마 김현성이 조금 더 약했더라면 더욱더 숭고해 보였을 것이다.

온갖 위험으로부터 공주님은 지켜주는 기사의 포지션.

기사는 희생적이다. 공주님이 왕자님과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슬픈 현실에도 불구하고 파란왕국의 노을빛의 기사는 순결한 공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운다.

조금 필터를 끼우고 보면 이렇게 볼 수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손 한 번 휘두르면 몬스터가 단박에 쪼개지는 건 너무 쉬워 보이니까.

이지후 역시 필터를 끼고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노을빛의 기사의 투쟁. 그 투쟁의 끝에 이별이 있다는 걸 깨닫고 있으면서도 히로인을 위해 희생하는 거지.

‘이 캐릭터는 어떤 매체에 나왔어도 인기 많았을 거야.’

일단 얼굴이 되니까. 인기투표 했으면 항상 상위권이었을걸.

마침내 기사는 왕자의 앞에 당도한다.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말이다.

‘소설 한 편 나왔다. 시바.’

“누나?”

“도련님….”

“누나… 누나….”

“네. 도련님. 저예요. 이기연… 도련님의 이기연이에요.”

이기연은 눈물을 왈칵 터뜨린다. 아까의 재회는 감동적이지 않았지만 이번 재회는 다르다. 이기연은 자신이 이지후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혹시나 자신이 도련님에게 미움받는다고 하더라도, 고난을 헤쳐 나가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그 마음을 가르쳐 준 것이 바로 노을빛의 기사라는 설정이 적절하지 않을까.

나와 김현성의 모험은 짧았지만 한 5개월 정도 걸리는 여정이었다고 봐야지. 이번에도 시간 관계상 압축 진행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아무튼 간에 이기연은 머뭇거린다. 개만도 못한 발정 난 쓰레기 진청에게 수 없이 능욕당한 이후에 이지후 도련님을 어떻게 봐야 할지 두려웠으니까.

하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디딘다.

“도련님. 저….”

“아무 말도 하지 마요. 누나.”

‘이지혜 진짜 감정선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하지만….”

“누나와 헤어지고 깨달았어요.”

“…….”

“누나가 얼마나 제게 소중한 사람인지… 그 간단한 걸… 이제야 깨달았어요. 누나가 어떤 모습인지는 상관없어요. 저는 누나를… 이기연을 사랑하니까.”

주저했던 발걸음이 빨라진다.

“도… 도련님.”

눈에서는 다시 한번 왈칵 눈물이 흘러나온다.

이기연은 어느새 뛰기 시작한다. 숨을 헐떡이며. 이지후 도련님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듯이 말이다. 넘어질 듯 휘청거리지만 결국에는 몸을 일으켜 전력으로 뛰어간다.

이지후 역시 마찬가지. 반대편에서 뛰어오던 이지후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 된 지 오래.

평소의 장난스러웠던 모습은 없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급급했던 그 얼굴은, 어느새 엉망이 되어 한 여자만을 갈구하고 있다.

그 절박함이 그가 이기연을 찾기 위해 얼마나 뛰어왔는지 말해주는 것만 같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품에 안는다. 누구보다도 소중한 서로를 으스러지도록 꽉 껴안으며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한다.

‘내가 시바 별짓을 다 한다. 진짜.’

근데 조금 재미있기는 했어.

조금은 씁쓸한 얼굴로 진청과 대화 하고 있는 김현성의 마지막 말만 아니었으면 조금 더 재미있었을 것이다.

“제가 저분의 자유를 지불하겠습니다. 공화국의 군사.”

“…….”

“100만….”

‘뭐?’

“아니, 200만 골드입니다. 이 정도라면 괜찮겠습니까?”

‘너 이 새끼. 진짜….’

“기연 씨… 부디 행복하시길….”

‘김현성 너 이 나쁜 새끼야… 암여우한테 홀라당 홀려가지고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새끼야. 너 때문에 희생한 형제한테 줄 돈은 남겨 놓는 거지? 그렇지? 내 돈은 있는 거지?’

나한테 줄 돈 없으면 우리 진짜 끝이야. 알지?

-하하하하핫! 선물은 잘 가져가마! 이기영!

지나치게 활기찬 진청의 목소리가 속을 긁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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