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897화
휴가 (15)
‘개 열 받아. 진짜.’
“짜증 나 죽겠네. 시바.”
“뭐가 그렇게 짜증 나요?”
“…….”
“뭐, 뻔하네요.”
‘진청, 그 새끼 진짜.’
신난 놈의 목소리를 떠올리니 다시 한번 심사가 뒤틀리는 기분, 애초에 이 새끼는 돈을 받은 것보다 뒤통수를 때렸다는 게 더 기분 좋을 거야. 분명히 조롱이었다고.
평소와 다른 텐션이었던 것도, 일부러 큰 소리로 웃었던 것도 분명히 이쪽을 도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굳이 그런 목적이 아니었더라도 200만 골드를 꽁으로 얻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이득이었으니 조금 더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계속해서 고맙다고 말했던 목소리를 떠올리자 다시 한번 이가 바득바득 갈리기 시작했다.
‘아냐, 그 새끼보다는 김현성 이 새끼가 더 문제지.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과거에 만난 인연 때문에 200만 골드를 쾌척해? 너, 돈은 어디에서 났어? 차용증이라도 쓴 거야? 블랙마켓 털어서 벌어들인 수익은 나한테 주려고 한 거 아니었어?’
이 블랙마켓에 골드가 얼마나 쌓여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200만 골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커다란 금액이다.
여기 있는 장물을 모두 팔아넘긴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김현성에게 그런 장물을 처리할 수단이 있을 리 만무, 결국 진청이 사전에 지불한 100만 골드를 제외한 나머지 100만 골드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애초에 대륙 보호관리 위원회에서 회수할 금액이었다. 두 배로 손해 본 것 같은 느낌, 속이 쓰린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진청이 문제가 아니야. 김현성, 이 새끼가 만악의 근원이라고.’
만약 진청이 조금 더 뜯어내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면 200만 골드 이상을 뜯을 수 있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내가 내려준 퀘스트는 어떻게 하려고 그런 생각 없는 짓을 저질렀는지 궁금할 지경.
암여우한테…… 물론 그 암여우가 나이기는 했지만, 청문회라도 열고 싶어졌다.
“근데 김현성도 남자기는 한 가봐. 이기연 바라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니까. 그래도 인성이 되기는 됐네요. 깔끔하게 응원하는 거 보면…….”
“…….”
“재미있었잖아요. 그렇죠? 기왕 이렇게 된 거 기분 좋게 마무리 하자구요.”
‘기분 좋게 마무리가 안 되니까. 그래.’
“얻은 게 없는 것도 아니었고요. 이야기 안에서 콜로라도 약물중독 사태도 해결했고…… 뒤처리가 많이 남기는 했지만 말이에요.”
“이후가 더 중요하지. 일주일도 안 돼서 중독증상 호소하는 얘들이 난리를 필 텐데. 콜로라도 특별관리구역으로 지정하고 물약 유통경로 한 번 추적해 봐야겠어. 마탑 쪽은 한소라한테 맡기면 되니까. 일단 린델은 건들지 않는 게 좋겠네. 공화국 쪽은 진청이 해결해 준다고 약속했으니까. 일단 연방을 원상태로 돌리는 걸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하자고.”
그래, 결과만 보면 좋지. 금전적으로는 손실만 봐서 문제지.
특별관리구역으로 지정하는 것도 전부 돈이야. 교국의 명예추기경으로서 고통받는 중독자들을 어떻게 내버려 둘 수 있겠냐고.
안 그래도 연방은 자금 딸리기로 유명한 곳인데, 관리 위원회에 기금 요청할 게 뻔하지.
약물중독 치료센터에 상담센터, 콜로라도를 비롯한 연방 모험가들의 생활원조까지 비용으로 환산하면 꽤나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갈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게 전부 다 내 지갑에서 빠져나가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관리위원회의 자금이 나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으니 씁쓸한 마음이 들기야 한다.
‘김현성, 이 나쁜 새끼.’
“마탑 쪽에 있는 건 확실한 거예요?”
“응, 워프게이트가 있으니까 말 다 한 거지 뭐. 아마 한 명 엮기 시작하면 줄줄이 소시지처럼 엮일 거야. 검은백조에서 신경 쓰고 움직이면 며칠 걸리지도 않을걸.”
그나마 적폐세력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환수할 수 있으니 그것 하나는 다행. 그래도 김현성이 나쁜 새끼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나저나 누나 얼굴 좋아졌네.”
“그럼요. 간만에 휴가다운 휴가를 즐겼다는 느낌이라니까요. 연수가 촬영해줘서 매일 매일 볼 수도 있으니까요.”
“뭘 촬영했는데?”
“전부 다요. 편집까지 거치면 꽤 볼만 해질 거예요.”
‘전부다?’
“…….”
“…….”
“아무튼 남은 휴일은 연수랑도 보내야겠어요. 이런 좋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스태프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열심히 일한 연수한테도 즐길 거리를 남겨 줘야죠. 아, 그러고 보니 오빠 김현성 만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이제 30분도 안 남았는데, 어쩌려구요?”
“어차피 만날 생각 없었어. 아 그러고 보니까. 슬슬 문자 보내야겠네.”
아니나 다를까 이미 메시지가 도착해 있는 상황. 좋은 말을 써주고 싶어도 써 줄 수가 없다.
-기영 씨, 지금 어디십니까?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사과도 안 한다 이거네.
-오늘 약속은 취소해야겠네요. 바쁘신 것 같은데…… 마저 업무 보세요. ^^ 괜히 열심히 일하시는데 ^^ 제가 방해한 것 같아서요. 중간에 연락도 없을 정도로 바쁘시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연락을 못 드린 건 사정이 있어서…… 안 그래도 기영 씨에게 연락 드리려고 했었습니다. 제법 중요한 일이…….
-근데 안 주셨네요. 바쁘신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답장하셔도 됩니다. 파란 길드 마스터. 이렇게 열심히 일하시는 만큼 제가 말씀드렸던 일은 확실하게 처리해 주실 거라고 믿고 있겠습니다. ^^;;
‘이래도 몰라? 이래도?’
-내일 안으로 성과 보고서라도 작성해서 보내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습니다. 파란 길드 마스터. 특히 예산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뤄주셨으면 하네요, 파란 길드 마스터.
‘화난 거 맞아. 화난 거 맞다고.’
한 번 기강 잡을 때 됐어. 그동안 너무 풀어준 것 같아, 진짜.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 정도면 알아들을 수 있겠지.
일단 호칭부터가 파란 길드 마스터였으니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있을 것이다.
바로 답장이 오지 않는다는 것부터가 그 반증, 처음에 보냈던 메시지에 있었던 이모티콘이 호의가 아니라는 것도 눈치채지 않았을까.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손거울이 울리기 시작했다.
메시지로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직접 통화하고 싶다는 거겠지.
당연하지만 전화는 받지 않는다. 두세 번 울리지만 그대로 통화를 끊어버린다.
-전화하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파란 길드 마스터. 지금 통화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요.
-기영 씨, 사실 오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다급하네.
-다음에 해주세요.
무슨 말을 해 올지 너무 뻔해서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상황설명을 할 게 뻔하지. 뭐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했다는 둥, 나름대로 변명거리가 될 만했으니까. 들으면 또 칭찬해 줘야 하니까. 안 듣는 게 이롭다.
-쓸데없는 잡담보다는 업무에 조금 집중하는 게 어떻습니까? ^^;; 제가 지금 조금 바빠서.
할 말은 뻔하다.
“뻔하지. 뭐. 죄송합니다. 제셩합뉘다아…… 붸붸붸 하겠지, 뭐.”
-제가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정말로 죄송합니다.
‘죄송은 개뿔.’
-사실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미카엘라리아의 목걸이입니다. 직접 만나서 전해드리고 싶은데…… 잠깐만 시간을 내주신다면…….
사진도 함께 전송되고 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이름.
‘이거 그거네.’
블랙마켓에서 마지막에 판매될 상품이었던 거. 제법 심플한 디자인,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경매장에서 판매될 만큼 괜찮은 아이템이기는 할 거야.
‘이거 진청한테 팔아먹을 수도 있겠는데.’
꽤 아쉬워 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 200만 골드에 팔 수 있지 않을까. 기능이 괜찮으면 내가 직접 착용해도 되고.
불행 중 다행이기는 했지만 구태여 만나서 주고 싶다는 말이 크게 와 닿지도 않는다.
또 구구절절 죄송하다고 이야기하겠지. 마음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이 새끼 기강을 한 번 잡아야 했으니까. 그래도 목걸이는 받아야지.
-목걸이는 택배로 보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보고 싶지 않네요.
-네……. 바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더 할 말 없으시면 이만 줄이겠습니다. 파란 길드 마스터.
-저, 기영 씨…….
-네.
-초대해 주신 곳에 늦을 수밖에 없었던 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저도 지금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생겨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
-죄송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문자에는 당연히 답장을 하지 않는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대신에 다른 놈에게 연락을 보내기 시작.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부 길드 마스터?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아니, 제가 나가겠습니다.”
“네.”
문을 열고 나서자 무척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평소와 다름없는 금발, 마력의 영향 때문인지 오랜만에 봤는데도 얼굴에 변화가 없다.
웃음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니 간만에 한 문자가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았다.
얼굴이 조금 상기된 것을 보면 연락을 받자마자 정신없이 뛰어온 것만 같다. 이래야지. 이랬어야지.
“제가 조금 늦었죠, 형? 죄송해요. 훈련을 하고 있는 도중이라…….”
“아니요. 괜찮습니다, 라파엘 님.”
“그, 그런데 무슨 일이신가요?”
“대단한 용건이 있는 건 아닙니다. 꼭 용건이 있어야 연락을 하나요?”
“그건 아니지만…….”
그래 내가 너한테 많이 무심하기는 했지. 이해해. 갑작스러운 거.
“식사라도 하면서 밀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최근에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고…… 또 부탁드릴 이야기도 있고요. 최근에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시간은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형.”
“잠깐…… 저기 레스토랑에 예약 좀 해주시겠습니까?”
“제, 제가 아는 곳이 있어요. 그곳으로 가요, 형.”
“네?”
“마침 저녁 먹을 시간이기도 하고…… 혹시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일단 사진이나 한 장 찍을까요?”
“네? 갑자기…….”
“같이 찍읍시다. 라파엘 님.”
“아…… 네.”
괜찮은 사진을 건진 것 같은 느낌. 애매하게 웃고 있는 라파엘을 뒤로하고 곧바로 베니고어넷에 접속한다.
업로드하는 건 드문 일이지만 곧바로 개인계정으로 들어가 사진을 업로드 하기 시작, 시간은 짧다. 어떤 글을 작성하는지가 문제지.
오랜만에 베니고어그램을 장식할 사진의 제목은 이게 좋을 것 같다.
[회색빛의 용사와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딱 괜찮잖아.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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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 새로운 우정]
기강 한 번 씨게 잡아야겠어. 진짜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