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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03화 (894/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03화

세라 (3)

아니나 다를까 절망적인 표정이 얼굴에 드리워진다.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얼굴이라 저걸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눈물을 참아야겠다고 생각했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그럴 여유조차 없는 모양.

수도꼭지라도 튼 것처럼 녀석의 눈에서는 순식간에 눈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흐윽, 히끅,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경기라도 일으킬 것처럼 손발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 자기 존재를 부정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세라핌만 깜짝 놀란 것이 아니다. 외신 아이들의 경우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얼어붙어 있다. 아니, 얼어 붙었다기보다는 사고 자체가 멈춘 것만 같다.

어쩌면 본인들에게 대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런 말을 자신들이 들었다고 가정하고 있을지도 몰라.

아이들의 얼굴에 들어선 것은 공포다. 어쩌면 자신들의 존재가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도미니온스는 이지혜를, 케루빔은 차희라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저런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상황을 계속해서 가정하고 있겠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세라핌을 바라보고 있었던 케루빔마저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숨을 죽이고 있다.

한소라는 반사적으로 정하얀의 앞을 가로막는다. 순식간에 마력 차단 방벽을 올린 것을 보니 세라핌이 정하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배려 한 모양.

“정, 정하얀 님… 그건….”

“다른 아이를 데리고 왔어야 했다구….”

“말…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닌가요? 세라도 나름 열심히….”

“열, 열심히만 하는 건 의미 없다니까! 소, 소라도 알면서… 너무 답답해… 소라야. 너무 답답해… 히끅… 흐윽… 너무 짜증 나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너무 답답해서….”

“그래도!”

“내, 내가 답답하다고 했잖아!”

“정하얀 님!”

“내, 내… 내가 답답하다구!”

‘아, 이거 시바, 어디서부터 끼어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진짜.’

한소라가 끼어든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다. 원래부터 감정적이기는 했지만 아까보다 더 불이 화르륵 타오른 것 같은 느낌.

사실 정하얀은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를지도 몰라.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쏟아내고 있을 뿐인 상태가 된 거라고 판단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속은 답답해서 터질 것 같은데, 그 감정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모르니까. 몰아붙이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히끅… 진짜 꼴도 보기 싫어….”

“그만하세요… 더 이상은….”

“너, 너무 힘들어… 오, 오, 오빠… 히끅… 흐윽….”

“…….”

‘일단 추스르기는 해야지.’

“조금 이따가 다시 이야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하얀이는 들어가 있을래?”

“…….”

“아니면….”

“그, 그렇게 할래요. 쉴, 쉴래요….”

정하얀은 애써 세라핌을 시선에 두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린 채로 녀석을 지나친다.

잠깐 한소라가 정하얀의 손을 붙잡았지만, 정하얀은 깜짝 놀라며 그녀의 손을 떨쳐 버린다.

인형처럼 제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던 세라핌은 다시 한번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 내가 뭐라고 한마디 하는 게 좋을까 싶은 타이밍에 그대로 자리를 떠나 숲속으로 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출이라도 하려고?’

“케루빔. 쟤 좀 데려와.”

“네… 명에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케루빔이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세라핌의 뒤를 쫓는다. 어차피 떠날 수도 없을 것이다. 녀석에는 우리가 있는 곳이 집이니까.

한소라는 그런 세라핌을 잠깐 바라보다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그래. 얘랑도 한번 이야기를 해보기는 해야지.

“커피라도 한 잔….”

“냉정하시네요. 부길드마스터는….”

“…….”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비정상적이시고요.”

“제가 정 붙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데려오고 싶어서 데려온 게 아니라니까. 소라 씨도 잘 알고 계시는 거 아니었어요?”

“지,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잖아요.”

“애초에 쟤한테는 충분히 해줄 만큼 해준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회피하거나 변명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는 해줬으니까.

다시 돌려보내거나 폐기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도리는 했다고 봐야지.

원래대로였다면 위에서 손가락이나 빨면서 아래를 내려다봤어야 하는 녀석이었다.

조금 냉정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녀석은 자신의 죄를 심판받아야 했으니까.

“저는 원래 양보 안 해요.”

“그건 알고 있지만….”

“지금 여기 와서 일상을 즐길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내 수준에서는 충분히 양보한 거라니까. 기억은 잃었어도 영혼에는 씻을 수 없는 죄가 새겨져 있거든. 그게 쟤가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는 방식이었고, 나도 똑같이 돌려주는 것 뿐이에요. 실제로 우리 현성이도 뒈질 뻔했잖아. 감히 내 걸 건드렸는데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안 그래? 조금 치졸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복수 측에도 못 끼는 거 알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라….”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배려가 무관심이었다니까. 솔직히 하얀이한테 맡길 생각도 없었는데….”

“근데 맡기셨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실수인 것 같기는 하네요.”

‘애초에 맡기는 게 아니었어.’

본래 정하얀을 생각해 보면 잠깐 관심을 가지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런 줄 알았고… 이지혜나 차희라가 하나씩 선물을 받은 느낌으로 아이들을 가져가자 자기도 하나 받고 싶다고 생각한 거겠지.

남들은 다 선물 받는데 자기 혼자 못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한소라한테 슬쩍 떠넘긴 다음에는 별 신경도 안 쓰는 줄 알았어.

근데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게 한편으로는 좀 충격적이기도 해.

책임감과는 거리가 먼 줄 알았는데, 세라를 자기 안으로 들이기로 한 순간부터 그녀의 안에서 책임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냥 달라고 떼쓰던 게 아니었을지도 몰라.’

어쩌면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그녀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거치고 내게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정하얀은 자기 사람을 잘 만들지 않는 타입이었으니까.

만들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 본인이 벽을 친다는 느낌이 있다.

지구에서의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만들어 놓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의도가 어떻든 간에 세라핌을 들이는 것은 그녀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고민이었을 것이 분명, 그녀 나름대로는 제법 위험한 도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기영과 한소라만 들어올 수 있었던 공간에 새로운 사람을 초대한 것이니… 사실상 크게 마음을 먹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몇 날 며칠을 고민했을지도 모르고, 한소라한테도 여러 가지 물어봤을 수도 있겠지.

“일단 앉아서 커피나 마시면서 이야기 좀 합시다. 표정 좀 푸시고요. 개선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제가 괜히 대화하자고 했겠어요?”

“생각을… 조금 바꿔주시는 건가요?”

“그거야 이야기를 들어봐야죠.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인데 세라핌 때문은 아닙니다. 하얀이 때문에 한번 들어나 보겠다는 거지. 일단 이거부터 물어봅시다. 하얀이가… 세라핌을 데려가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

“그때 무슨 이야기 했어요?”

“그냥… 여러 가지 이야기요. 너무 많아서 전부 다 기억하기는 힘들지만 고민하셨던 것 같았어요. 기대된다는 말도 하시고… 무섭다는 말도 하시고… 결국에는 부길드마스터를 찾아가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많이 주저하셨던 거로 기억해요.”

‘시바.’

“안 말리셨네요?”

“그… 그게 정하얀 님께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

“조금 후회하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정하얀 님께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확실히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네.

세라핌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마 녀석이 조금 부족한 천사라는 걸 깨달았을 때였을 것이다.

내가 녀석에 대한 관심을 꺼버리거나 리액션을 보여주지 않자 지레짐작 손을 놓았을지도 모르고….

사실 그런 과정에 대해서는 지레짐작 추측하기가 힘들다. 나도 정확히 정하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정하얀 사용설명서라도 있으면 조금 읽어보겠지만 그런 건 없으니까.

그녀와는 거의 모든 이야기를 공유한다고 하지만, 정하얀 자신도 모르는 감정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힘들어하시니까요.”

“처음에는 조금 어땠는데요?”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한소라가 건네준 것은 여신의 손거울, 미리 준비를 해 놓은 모양인지 곧바로 영상이 흘러나온다.

지금보다 조금 더 작을 때.

-이, 이것 봐 소라야. 진, 진, 진짜로 조그맣다. 그치….

-네… 정말로 작네요.

-나, 나는 정하얀이라고 해… 앞, 앞으로 네 엄마가 될 거야.

-어, 엄마?

-말, 말했어. 소라야… 말했어!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말은 할 수 있었다고 해요. 다른 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조금 더 성장이 빠르대요.

-귀엽다.

-안녕하세요. 엄마.

-안, 안, 안녕….

-숨지 말고 나오세요. 정하얀 님. 제대로 인사하셔야죠. 안녕, 세라야! 여기 이모도 있어.

-안… 안녕하세요. 이모….

-가서 엄마 한번 안아드려야지. 정하얀 님도 어서 나오세요. 네. 정하얀 님… 그렇게요!

정말로 행복한 듯이 웃고 있는 세라핌의 얼굴은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정하얀의 얼굴은 정말로 좋아 보인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웃음이다.

즐겁게 웃으면서 지금보다 더 작은 세라핌을 꼭 껴안는 모습이 의외로 잘 어울리는 것은 덤.

쑥스러워하면서도 계속해서 머리를 쓰다듬거나 헤실헤실 웃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손거울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이, 이, 이것 봐!

마법으로 공연까지 보여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 세라핌 이 새끼 초반에는 생각보다 행복했었네.

-와….

-세, 세라도 금방 할 수 있을 거야.

아니, 걔는 못 할 것 같아….

너무 휘황찬란해.

“지금이랑은 많이 다르네요.”

“네. 많이 다르시죠. 원래부터 서투르기도 하신 데다가….”

“…….”

“정하얀 님은 사랑하는 법을 부길드마스터께 배우셨잖아요.”

“…….”

“그거 외에는 모르세요.”

나도 그렇게 배웠는데.

물론 그 방식이 일반적인 사회통념이랑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무튼 요지는 그건가 봐. 나는 차선책을 알고 있지만 정하얀한테는 차선책이 없었다는 거.

나는 연기할 수 있지만 얘는 그게 안 됐다는 거. 나는 다른 방법이 있었지만 얘한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거.

나도 모르게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게 된다. 웃고 있었던 정하얀의 얼굴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돈다.

“정하얀 님은 세라한테서 자기 모습을 보시나 봐요.”

“…….”

“그래서 답답하신 거고요.”

망원경으로 바라본 정하얀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엉엉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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