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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06화 (89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06화

세라 (6)

정하얀이 자신의 상태를 숨긴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상담을 해올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지만 아직까지 정하얀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모양, 이전의 방식이 너무 틀어박혀 있기 때문일까.

아직까지 유능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스탠드를 취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잘못이 크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남을 탓할 수도 없다.

정하얀을 비정상적으로 성장시킨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한결 편하지.’

슬그머니 차를 마시며 옆쪽을 바라보자 불안한 표정으로 눈치를 보고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조금 위축된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띈다. 애써 평소와 같이 행동하는 것 같은 느낌, 왠지 모르게 작위적인 것 같은 느낌이 강하다.

힐끔힐끔 천막 쪽을 바라보는 것을 보니 어서 빨리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만 같다.

아마 본인 나름대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차를 마시고 있는 도중에도 마력이 증발하고 있다는 걸 느꼈을 테니까.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상 현상에 아무런 리액션을 취하지 않은 것도 정하얀답다. 자신의 몸에 문제가 있다는 걸 들키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리라.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머릿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 하지만 가장 첫 번째로 든 생각은 티를 내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거 큰일 날 뻔하기는 했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가정을 해보면 조금 꺼림칙하기도 했다.

만약 지금이 실제 원정 도중이었다면, 정말로 예기치 않게 정하얀이 마법을 봉인 당한 채로 던전에 들어갔다면.

나야 마음의 눈이 있으니 정하얀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매번 눈 아픈 텍스트를 읽고 싶은 것은 아니다.

혹시나 내가 원정 멤버가 아니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파티가 전멸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은 물론 이거니와 최악의 상황을 직면했을 수도 있다.

외신전이나 전쟁 중이었다면 아마 지금처럼 될 수도 없었겠지.

제법 일 처리를 나쁘지 않게 해오고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네.

불안요소는 있었고, 그 불안요소는 지금도 현재 진형 중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정하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하얀아. 괜찮아?”

“네? 네? 제, 제, 제가… 왜요. 저는 아, 아무렇지도 않은데….”

‘바로 변명부터 하자너.’

“아니. 그냥 표정이 안 좋아 보이길래… 혹시나 세라핌 때문에….”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네… 아! 그, 그러고 보니까. 세라는… 잘… 잘 지내고 있나요?”

‘챙기기는 하네.’

“여기 파티원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중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네… 그, 그러면 다행이네요.”

“혹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도 돼.”

“네… 지금은 딱히… 딱, 딱히 없어요.”

“정말로?”

“네. 정, 정말로요. 네… 평소랑 그대로예요. 오, 오, 오빠 저… 지금… 좀 피, 피곤한데….”

“그래? 아. 잠깐 교국에 다녀오고 싶은데. 혹시 워프게이트….”

“아, 아니요… 죄, 죄송해요. 정말로… 지,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먼, 먼저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아요.”

“그럼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정하얀 님. 벌써 들어가시게요?”

“으… 응.”

“제가 챙겨드릴 게 있을까요?”

“안, 안 돼… 소, 소라도 들어오지 마. 잠, 잠깐 혼자 있… 있고 싶어.”

시선 처리가 불안해 보인다.

“네?”

“소… 소라도 들어오지 말라구….”

“아….”

한소라의 시선 처리도 불안해 보여. 얘는 다른 의미로 충격받은 것 같았다.

‘상상 못 해봤나 봐.’

정하얀이 자신에게까지 숨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아 보인다. 힘들 때도, 최악의 상황일 때도 정하얀이 자신을 의지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았네.’

쟤는 그렇게 나가고 싶어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섭섭해하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웃겨요.

“정, 정말로 죄송해요… 잠, 잠깐만 쉬고 올게요. 오빠. 미안해… 소라야.”

“미안해할 필요 없어. 교국까지는 그리폰을 타고 다녀오면 되니까. 언제나 몸이 최우선이니까. 몸조리 잘해. 하얀아.”

“정… 하얀 님….”

그렇게 정하얀은 천천히 천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언제는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면서요.”

“제… 제가 언제요….”

“하얀이가 소라 씨한테까지 숨길 줄은 몰랐습니까?”

“저는….”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 것 같네요. 애초에 본인이 언제 버림받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게 정상적인 사람의 사고방식이겠어요?”

물론 나도 김현성을 처음 만났을 때는 비슷한 생각을 하기야 했다. 은근히 하얀이랑 나랑 닮은 점이 많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저한테까지는 숨기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거야 소라 씨 희망 사항이고요. 하얀이 생각은 다를 겁니다. 소라 씨가 하얀이한테 이것저것 배웠던 만큼 저보다 더 신경 쓰고 있을 수도 있고요. 아, 잠깐만 메시지 좀 보낼게요.”

[확인 부탁한다.]

[일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습니까?]

[쓸데없는 트집 잡을 생각하지 마라. 이기영.]

[진 군사가 업무 처리한 건 제가 먼저 확인했어요, 오빠. 나쁘지 않던데요?]

[한 번 더 꼼꼼히 살펴봐. 누나.]

[개자식. 트집 잡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미 네놈이 그럴 상황을 가정해 뒀으니까.]

[그나저나 도미니온스한테 연락 왔었는데. 거기서 또 무슨 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세라핌 관련해서 자질구레한 거. 하얀이 문제도 조금 있고. 아. 두더지 성녀도 건져 올리고 있는 중이야. 생각보다 뭐가 많네. 아무튼 당분간 거기 집중하기 힘들 것 같으니까. 잘 좀 봐줘. 거기 군사님도 일 좀 똑바로 하세요.]

[무슨 일이 한꺼번에 겹쳤데요… 그래도 우리 진 군사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오빠. 그렇지 않아요? 그나마 군사님이 있으니까. 이렇게 다른 곳에 눈도 돌릴 수 있는 거잖아. 언제 한번 진 군사한테 상 좀 줘야겠는걸.]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지. 뭐 대단한 거 할 거 있다고 상을 줘? 기껏해야 잡무 처리 가지고 뭘. 이제 일 배우기 시작한 초짜 너무 띄워주는 것도 안 좋아.]

[확인하고 이야기해라.]

[그 정도 수준을 갖추고 이야기하세요. 군사님. 쪼렙이 만렙한테 훈수 두려고 하시네.]

[제기랄 이기영 좀생이 같은 개자식. 혹시 내가…]

[이기영 님이 채팅방을 퇴장하셨습니다.]

[이지혜 님이 이기영 님을 초대하셨습니다.]

[우리 도미 잘 부탁해요. 내 사랑.]

[걱정하지 마. 내 단짝.]

[제기랄. 구역질 나오는 군.]

[진청 님이 채팅방을 퇴장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희라 누나한테도….

[누나아♥]

[무슨 일이야. 우리 자기.]

[설명하기 복잡한데. 혹시 케루빔이 누나한테 연락해도 무시했으면 해서.]

[그렇게 하지 뭐.]

[그렇게 쉽게?]

[한 번쯤은 이런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어. 혼자 살아가는 법도 배워 둬야지. 지금은 뭐 하고 있는데?]

[울고 있네.]

[그래? 좀 더 울려. 그리고 자기는 길드에 좀 들르고. 할 이야기도 좀 있으니까.]

‘애 한번 강하게 키우네.’

세라핌이랑 동굴에 들어가 서로를 위로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금방 시선을 거둬 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쟤네가 아니었으니까.

때마침 한소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가 중요한지 알고 계신 거죠? 부길드마스터. 한가롭게 메시지 보내고 있을 때가 아닌데….”

“네네.”

“정하얀 님은 뭐하고 계세요? 괜찮으신 거 맞나요?”

“잠깐만요. 하얀이는 저도 걱정하고 있어요. 해결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정리할 시간이 좀 필요했습니다. 라파엘이랑, 쓰로도미 얘네는 이따가 봐야겠네. 그리고 천막 안에 눈 달아 놨잖아요. 그거 켜보세요. 어차피 하얀이는 지금 마력 녹아서 느끼지도 못할 텐데.”

“아! 맞다….”

그제야 거울을 집어 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 역시 시선을 돌린 것은 당연지사.

사실 보지 않아도 정하얀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무척 불안정한 모습일 테고, 아마 튜토리얼 때와 비슷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게 보였다.

-어, 어떻게 하지? 어, 어떻게… 왜, 왜 이러는 거야. 왜… 왜 이러는 거냐구.

혼잣말을 하며 자꾸만 자신의 상태를 점검한다.

손을 움직이기도 하고, 작게 주문을 외워보기도 하고, 마력을 움직여보려고 기를 쓰고 있지만 움직일 수 있을리 만무.

시스템에게 판정을 받은 물약에 적혀 있는 효과는 웬만해서는 저항할 수 없다. 아이템의 효과니까.

-어… 어떻게… 히끅… 나… 나 어떻게 해….

바들바들 떨고 있다. 눈이 깜빡깜빡거릴 때마다 계속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거의 다 고쳤다고 생각한 그녀의 안 좋은 버릇도 다시금 생겨나기 시작한다. 손톱을 물어뜯거나 머리를 벅벅 긁거나.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안 돼… 제발… 제발요. 흐윽… 제발… 히끅…

‘솔직히 계속 보고 싶은 장면은 아니야.’

한소라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아… 정하얀 님… 어… 어떻게 해요. 불쌍해서… 우리 정하얀 님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그거 고쳐 주려고 지금 이러고 있는 거잖아요.”

“…….”

“그래도… 생각보다 심각해 보이기는 하네요.”

-흐윽… 다, 다 끝났어. 전부다… 전부 끝났나 봐. 어떻게 해… 흐윽… 움직여…

“…….”

-이… 이 멍청아! 움직이라구! 왜! 왜 말을 안 들어!

결국에는 한소라가 자리를 뛰쳐나간다.

-정하얀 님….

-어? 어… 잠, 잠깐만… 잠깐….

-정하얀 님 저….

-오지 마… 들, 들어오지 마!

-울음소리가 들려서….

-아,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로 괜찮으신 건가요?

-아무것도… 아, 아니라니까.

-정말로… 정말로… 괜찮으신 거 맞나요?

-…….

-…….

-으… 으응….

-저한테는 숨기지 않으셔도 돼요.

-……

-전부 이야기하신다고 하셨잖아요. 그… 그렇죠?

조금 성급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선다. 정하얀이 너무 궁지에 몰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으니까.

잠깐이라도 마음을 기댈 곳이 있어야지 조금 더 이야기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지 않을까.

‘문제는….’

얘가 오픈하려나 몰라.

-힘든 일이 있을 때도 기쁜 일이 있을 때도 무조건 공유하신다고 하셨죠. 그렇잖아요. 약속… 했었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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