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07화
세라 (7)
-모두 공유하시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렇게 약속하셨잖아요.
-…….
얼굴에는 갈등의 빛이 떠오른다. 지금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한소라에게 말해도 될까 하는 마음과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마음이 싸우고 있는 것만 같다.
계속해서 숨을 가쁘게 쉰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정하얀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지구에 있었을 때, 당시에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자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봐.’
현재의 정하얀을 만든 가치관이 꼭 내 책임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저렇게 귀여운 하얀이를 버리고 튄 가족들이 만든 거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들이야. 아주. 시바.’
내가 그녀의 상태를 악화시켰을지는 몰라도, 유능하지 않으면 버림받는다는 사고방식은 그녀의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묘사에 따르면 지구에 있었을 때 항상 외톨이였다고 했으니까. 커뮤니케이션에 문제도 겪고 있었을 거고, 딱히 다른 분야에서도 특출나지 않았으니 가족의 짐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둘째 언니는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했으니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학창시절에도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알고 있다.
따돌림 비슷한 걸 당하기도 했다고 들었고….
‘이런 부분은 나나 율하랑은 다르네.’
말하자면 정하얀은 대륙에 떨어진 직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은 셈이다.
잘하는 일이 생겼고, 그것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마탑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모두 자신을 예뻐하고, 언제나 주목받는다.
타인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마법은 현재의 정하얀을 만든 선물이며 축복일 것이다.
어쩌면 대륙에 떨어진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어.
“지구에 있을 때 이야기도 조금 더 자세히 물어볼 걸 그랬나.”
본인이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조금 압박해서라도 들어보는 게 좋았을 거라는 판단이 선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정하얀을 입을 열지 않는다. 조용히 한소라가 있는 문 앞에 서서 계속해서 서성인다. 기다림의 시간이 점점 길어져 지쳐 갈 때 즈음에는 자신의 손으로 문을 붙잡는다.
하지만 이내 용기를 잃었는지 다시 손을 놓아버린다.
-흐윽… 히끅….
하는 울음소리밖에는 들리는 것이 없다.
-저는 절대로 정하얀 님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
-정하얀 님도 계속 함께 있자고 하셨잖아요.
-으응….
-문… 열어주세요.
얘네 지금 무슨 청춘 드라마 같은 거 찍고 있는 것 같기는 해….
상처 입은 주인공이 위로받는 그런 거 있잖아. 아니, 동물농장 같은 거 보면 상처 입은 강아지들이 인간들한테 마음을 여는 과정 같아.
자신의 손으로 천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문을 열어달란다.
조금은 상징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정하얀이 자신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인다.
그런 한소라의 진심이 통했던 것일까. 결국에는 조용히 정하얀도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간이 천막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웅장한 천막의 문을 열고 눈앞에 있는 한소라를 맞이한다.
은근슬쩍 눈치를 보여 조용히 한소라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한소라 본인은 그게 정하얀 나름대로의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
근심 가득했던 그녀의 얼굴에도 작게 미소가 피어난다.
-소, 소라야… 나.
-네. 정하얀 님.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 한번 꼭 안아 줘야지.’
일단 안아주는 게 먼저다. 엉망이 된 정하얀의 모습을 본 한소라의 얼굴에도 눈물이 차오르고 있다.
솔직히 맨 처음에 도망 다녔던 한소라한테 지금 이 모습을 보여주면 못 믿었을 거야.
당신 나중에는 정하얀이랑 단짝 친구 된다니까. 말하면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했겠지.
-왜, 왜 또 손톱을 물어뜯으셨어요.
-아… 그….
-모처럼 만진 머리도 엉망이 됐잖아요. 자꾸 쥐어뜯으시면 안 돼요. 그런 거 이제 안 하겠다고 하셨잖아요.
-으… 응.
-왜 이렇게 많이 우셨어요. 눈이 부었잖아요. 흐윽… 뭐가 그렇게 슬프셨어요?
‘야. 이거 시바. 너무 잘하고 있는데.’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치고는 연기를 꽤 잘하기는 해. 사실 너도 가담했잖아. 뭘 모르는 척하고 있어. 너도 공범이야.
분위기를 깨는 것 같아 미안하기는 했지만 한소라 쟤도 참….
-왜 이렇게 바보 같으세요. 정하얀 님은… 정말….
텐션 좋네.
-왜 매일 혼자 속으로….
-미, 미안해… 소라야.
-저한테 미안한 게 아니에요. 정하얀 님 스스로한테 미안해하셔야죠.
현장은 드라마틱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나쁜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정하얀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고 있는 것 같아 좋다고 여겨질 정도.
과호흡이 왔었던 아까와는 반대로 호흡이 차분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초조함이 사라진 것 같다. 다시 한번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신 건가요?
마침 한소라가 질문을 던진 타이밍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정하얀에게는 두려움이 남아 있는 모양.
잠깐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던 것도 잠시, 이윽고 입을 열기 시작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눈물 콧물 흘리며 상담을 이어나갈 것이라 예상한 것과는 반대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게 시야에 비친다.
-큰, 큰일은 아닌데….
-그래도 말씀해 주세요.
-마, 마, 마력이… 갑, 갑자기 사라져서….
한마디를 내뱉은 이후에는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한소라가 어떤 식으로 반응해 올지 궁금하겠지.
-일… 일시적인 현상인 것, 같, 같, 같아….
불안했는지 보험도 들어 놓는다.
괜찮은 거라고.
금방 돌아올 거라고….
그러니까. 떠나지 말라고….
-지, 지금 이유를 찾고 있는 중이니까. 그리고 일시적인 현상이니까. 그러니까. 괜찮지?
-왜 저한테 괜찮은지 물어보시는 거예요?
-몰, 몰, 몰라….
-정하얀 님은 괜찮으신가요?
-으… 응… 잠, 잠깐만 그러는 거니까. 소, 소라도 마법의 천사 계속할 수 있어. 그러니까….
-마법의 천사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정하얀 님. 저는 정하얀 님이 마력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없어요. 제게 중요한 건 정하얀 님이 가지고 계신 마력이 아니라. 정하얀 님 그 자체예요. 분명히 부길드마스터도….
-오, 오, 오빠한테는 말하지 마… 말하면 안 돼.
-괜찮다고 해주실 거예요.
-말, 말하지 마! 말하지 마!
-그런 것 없이도 정하얀 님은 장점이 많은 사람이에요.
-…….
-마음씨도 착하시고… 이렇게 예쁘고 귀여우시잖아요. 마법이 정하얀 님을 존재하게 하는 게 아니에요. 부길드마스터도 정하얀 님의 그런 면들을 봐 주신 거고요. 이것 보세요. 어떻게 사랑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엉망이 돼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주는 동안 대화가 진행된다. 평소처럼 한소라에게 자신을 맡긴 정하얀은 조용히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소, 소라가 더 예뻐.
-정말요? 어디가요?
-눈. 오드아이.
그거 네가 그런 거잖아. 네가 쟤를 오드아이로 만들었어. 하얀아.
-나, 나는….
-아니에요. 정하얀 님이 얼마나 예쁘신데요. 그리고 외모 같은 건 상관없어요. 부길드마스터는 정하얀이라는 사람이 좋은 거라고 말씀하셨거든요. 부길드마스터와 정하얀 님은 대륙에 떨어진 첫날부터 함께 하셨잖아요. 여러 가지 일을 함께 겪고 함께 성장하고, 미래를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서로를 위해 헌신하면서 만들어진 관계예요.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셔도 된다고요.
-그, 그래도… 그, 그래도 싫은데… 히끅… 정말로 말, 말, 말하기 싫단 말이야. 진짜루… 진짜 싫어… 제발….
-그러면 조금 시간을 두는 건 어떨까요?
-…….
-…….
-그… 그렇게 할래….
정말로 정하얀 다루는 게 수준급이다. 거의 한 몸처럼 생활하다 보니 본인도 익숙해진 모양, 어쩌면 세라와 함께 한 시간이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차분히 이야기를 해주면서 본인이 원하는 것을 밝히고 수용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함께 합의점을 찾는다.
쉬운 것 같지만 상대가 정하얀이라면 결코 쉽지 않은 행위, 물 흐르듯이 이어간 진행에 이미 반쯤 넘어온 것 같은 느낌도 있다.
-어차피 금방 돌아오신다면서요? 일단 경과를 지켜보고 차분히 생각해 봐요. 너무 급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어떻게… 기분은 조금 나아지셨어요?
-으… 응. 고마워 소라야. 그, 그러면 오빠한테는 뭐, 뭐라고 하지?
-제가 잘 말씀드려 볼게요. 혹시나 마법을 쓸 일이 있으면 제가 대신 나설 수도 있고… 당장은 크게 할 일이 없을 테니까요.
-나, 그… 그것도 해야 하는데… 오빠랑 같이하는 일….
-대륙 관리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것도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정하얀 님.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하얀 님은 마법의 신이잖아요. 최근에 힘들고, 피곤한 일이 많으셔서… 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셔서 그런 것 같아요. 제가 편하게 지내라고 말씀드린다고 한들, 편하게 지낼 수 없겠지만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휴식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니. 그렇게 해야 해요.
-소, 소라 말이 맞아… 최… 최근에는 조금 머리 아프고 답… 답답했으니까. 세… 세라 때문에… 세… 세라는 괜찮겠지?
-네. 세라도 괜찮을 거예요. 제가 잘 보고 있으니까. 정하얀 님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세요. 그래야 해요…. 제가 평소처럼 행동할 수 있게. 잘 도와드릴게요.
-정말로… 괜찮아?
-네. 물론이죠.
-흐윽… 히끅… 정말로?
-네.
-안 떠날 거지?
-제가 왜 떠나겠어요? 결혼하셔도 같이 있을게요.
-정말로, 정말 안 떠날 거지?
-네. 안 떠나요.
얘가 트라우마가 있기는 있었어.
-금, 금방 돌아오니까.
-네. 금방 돌아오시겠죠?
-그래도 떠, 떠날 수도 있으니까.
-안 떠난다니까요. 정하얀 님도 참….
-그, 그래도 기왕 약속하는 거니까. 확… 확실하게 하자. 계, 계약하는 거야.
-네?
-마력의 계약. 만약, 소라가 날 떠나면… 뻥… 뻥! 하고 터지는 거로.
‘시바. 먼저 안 들어가길 잘했다.’
고맙다. 한소라.
-네? 굳… 굳이 그렇게….
-계약 마법으로 묶는 거야. 그, 그러면 안심이니까. 나는 못 하니까. 소… 소라가 해줄 수 있지?
-아….
-그… 그렇게 해줄 거지? 그렇게… 해줄 수 있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한소라가 눈에 들어온다. 그와 동시에.
“부길드마스터.”
“어… 혜지니… 여기는 웬일이야?”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수도 내에서 이상 몬스터가 출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