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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12화 (903/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12화

세라 (12)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하고 말입니다.”

녀석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저 조용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공감해 주는 것 같은 얼굴. 자신도 내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표정이 신경 쓰인다.

내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들 지경, 내가 너무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렇지도 않다.

나는 확실히 내 뜻을 전했다.

‘베니고어 시신. 너네 집 지하에 있는 거 다 아는데. 어쩔래? 지금 네가 얻은 힘, 그거 베니고어의 피를 마시고 그렇게 된 거 아니야?’

라고 말이다.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들은 그 악마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정상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이 몬스터들 역시 베니고어의 혈액을 마시고 변질된 놈들이었으니까.

내가 묘사한 악마들이 몬스터들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본인들이 하는 짓은 성스러운 종교적 행위라고 느끼고 있을 수도 있어.

만약 내 가정이 맞다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이 새끼들 미친놈들이라는 것.

두 번째는….

녀석들 역시 이 현상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는 것.

이 몬스터들이 이렇게 된 이유를 녀석들 역시 인지하고 있다.

이 젠이라는 템플러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 중에 하나는 아마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몬스터의 소유권을 양보해 달라고 청한 것도 녀석의 임무 중 하나였을 거고….

‘오랜만에 머리 쓸 일이 많네.’

궁금한 게 많으니 여러 가지로 유추하게 된다.

템플러들의 본거지가 두더지 성녀의 안식처가 맞다면 이 새끼들은 지금 어디에서 생활하고 있는 걸까.

던전 내에서 생활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을 거고, 어쩌면 녀석들도 던전의 일부가 됐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흔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

이 경우에는 과거의 인물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현재를 살고 있는 이들이라 해서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게 아니라면 녀석들 역시 제단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일 수도 있다. 던전화가 된 두더지 성녀의 안식처를 비밀리에 공략하려고 할 수도 있겠네.

녀석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나는 놈의 얼굴을 더 면밀히 살펴보게 된다. 인간의 얼굴은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니까.

물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말이다.

스탠드를 조금 바꿔 볼까. 명예추기경이 경계해야 될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만들고 싶다.

조금 더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을까. 가련하게. 조금만 더 약하게. 처연하게.

너무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대놓고 도발했던 내 뜻을 왜곡해 해석했으니 아직 여지는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반응이 온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모습, 신앙심 깊은 성자의 눈물을 외면할 수 있는 신자가 몇이나 될까.

처음부터 이렇게 가는 게 맞았을 지도 모른다. 어딘가 뒤틀려 있기는 했지만 놈이 베니고어 교단의 신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괜찮으십니까? 명예추기경님.”

괜찮냐고요? 정말로 그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네. 괜찮… 괜찮습니다.”

“저 역시 명에추기경님께서 느끼고 계시는 비통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느낄 고통은 명예추기경님께서 감내해야 할 고통의 반도 되지 않겠지만….”

너 나 지금 위로해 주는 거야?

정말로… 그런 거야?

“죄송합니다. 정말로…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이게 돼서….”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예추기경님. 솔직하고 진솔한 모습이 아닙니까. 명예추기경님께서 그분을 위해 흘리는 눈물입니다. 부끄러워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조금 더 편하게 생각해 주셔도 됩니다.”

“그 말씀은….”

“물론 제가 이런 말을 올린다고 한들, 명예추기경님의 심란한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마음의 짐이 무거우시다면…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하시다면….”

그래, 너도 그런 생각이었어?

“제가 조금이라도 명예추기경님을 위로할 수 있게 되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 더 편하게 생각해 주십시오.”

“정말로 이상합니다.”

“네?”

“처음 뵙는 분 앞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

“사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였습니다만….”

그래. 꽁꽁 숨기고 있는 이야기였어. 솔직히 어떻게 이런 불경한 말 들을 입에 담을 수 있겠냐구.

악마들이 베니고어 님의 신성한 피를 받아 마시고 있는 끔찍한 광경이라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은 광경이라니. 떠올릴 수 있겠어? 내가 어디서 누구한테 이런 걸 말하겠어.

물론 너랑은 처음 만난 사이야.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것도 알아.

근데 지금 명예추기경은 심적으로 굉장히 약해져 있는 상태거든. 누군가에게는 털어놔야 했어.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이 아니라 부담 없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빛의 성자의 마음을 헤아려줄 수 있는 사람. 새로운 사람 말이야.

“많이 힘드셨겠군요.”

“제가 힘든 것보다는… 혹시나 베니고어 님께서 고초를 겪지는 않으실까 걱정이 될 뿐입니다.”

“베니고어 님께서는….”

“사실 그분의 목소리가 최근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제가 무언가 잘못한 게 있다면….”

“명예추기경님께서는 잘못하신 게 없습니다. 만약 잘못이 있다면….”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젠 님께서는… 뭔가 알고 계신 게 있으신 겁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저희가, 교단이, 아니면 대륙 전체가 그분의 노여움을 살 만한 일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젠 님께서는 현재의 교단에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확대해석 한번 해보자.

“그렇지 않습니다.”

이 새끼 한 발 내빼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거야? 템플러들끼리 이야기가 나왔어? 현재 교황청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성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고 있는 거 맞지? 그런 거지? 아니면 대륙?

뭐가 어찌 됐건 간에 다시 생각할 여지는 있다는 거잖아.

“…….”

결국에는 지네 잘못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야 이해할 수는 있다. 녀석들이 베니고어에게 힘을 얻는 과정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종교적 의식이었으니까.

지금까지는 문제가 없었다면, 최근에 일어난 일 중에 무언가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할 여지가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현재 교황청의 부패가 있을 수도 있겠지. 종교집단이라고 해도 썩은 놈 몇 놈은 있게 마련이었으니까.

바젤 할아버지가 그런 부분에 민감하기는 하지만 손바닥 하나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이기연 이지후 때 갔었던 블랙마켓에서도 교황청의 인사들이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젠 님께서는 현재의 교단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엄밀히 말씀드리면 저희는 교단의 방향성에 대한 발언권이 없습니다. 저희는 추기경들을 지키기 위한 무력집단이며….”

“지금까지는 그랬었지요.”

이제는 아니잖아.

“그건….”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순진하고, 유약하고, 가련한 성자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가 아니다.

세상에나, 똑똑하기까지 해.

물론 정치에 능통한 이들이 느끼기에는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명예추기경은 현명했으며 자신만의 방법을 통해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대담함과 굳건함을 갖추고 있었다.

“어째서 젠 님께서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신 건지, 어째서 지금까지 감춰져 있었던 템플러들이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인지, 자세한 내막은 모릅니다만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베니고어 님께서 힘을 내리신 이유 역시 있으시겠지요. 젠 님 같은 분들이 그분의 뜻을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교단과는 이야기가 되어 있는 겁니까?”

“…….”

“혹시 제가 이런 말을 여쭙는 게 불편하시다면….”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도 마음을 안 열었어?

“아직 말씀드릴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뿐입니다.”

“그렇군요.”

섭섭함을 표현해 보자.

“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단의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명예추기경일 뿐이고, 교단의 외지인이었으니까.

물론 녀석에게 그런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느끼는 게 중요하지.

“잠깐 걷고 싶습니다만….”

“함께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아직 하얀이와 세라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타이밍에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케루빔한테도 페널티를 먹이기는 해야 하는데. 얘 가고 하는 게 나으려나.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자 라파엘이 나를 따라붙어 왔지만 필요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형.”

“괜찮습니다. 믿을 수 있는 분이에요.”

“하지만….”

“정말로 괜찮습니다. 라파엘 님.”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설마 여기서 나를 납치하기라도 하겠어?

“그럼….”

“젠 님과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라파엘 님. 물론 라파엘 님은 외부인이 아니지만….”

“후우….”

그럼 네가 뭐 어쩌겠어. 져 줘야지.

물론 라파엘은 경계를 풀지 않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내 안전에 집중하겠지만 이 새끼가 있는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꺼낸 게 의미가 있다.

신뢰한다는 스탠드를 살짝 취해주고 우리는 같이 간다는 걸 느끼게 하면 더 좋겠지.

딱히 산책로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숲이 험하기도 했고 길도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와 녀석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날개를 살짝 펼치자. 녀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나마 울창한 숲이 환해진 듯한 느낌. 저 멀리 있는 쓰로누스와 도미니온스도 나를 바라본다.

성스러운 것으로도 모자라 아름답기까지 한 빛의 날개. 인간이 아니라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만 같은 상징, 녀석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질이 다르다.

날개를 살짝 펄럭일 때마다 빛무리가 떨어지고,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모든 사악한 것들이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부끄럽지만 이거 보고 안 넘어온 신도들이 없어요.

“그럼 갈까요?”

녀석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는 것이 서툰 나는 느릿느릿하게 공중으로 떠올랐지만 녀석이 내 페이스에 맞추게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같은 결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런 식으로 알려주는 거지.

“조금 기쁘군요.”

“네?”

“진심으로 베니고어 님을 생각하는 분을 만나게 된 것이 기쁩니다.”

“…….”

“아마 베니고어 님께서도 기뻐하시겠죠. 이 대륙을 위해, 새로운 성인을 내려주신 것이 기쁘실 겁니다.”

“그런….”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빛의 아들, 희생과 부활의 신 같은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약하고, 멍청하고,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저를 도와주시고 지지해 주신 많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 함께 믿음과 신앙을 지켜나가는 이들 말입니다.”

“…….”

“어쩌면 대륙에 새로운 위기가 찾아온 걸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정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이기영 님….”

“하지만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베니고어 님께서는 결코 저희들이 이겨내지 못할 시련을 내려주시지 않으니까요. 항상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내려주십니다.”

이번에는 그게 네 날개인 거고.

“대륙은 항상 그래 왔습니다. 매번 위험을 겪기는 했지만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강해졌습니다. 그 시련은 우리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지만, 지금 이 아름다운 대륙이, 이 푸른 하늘이 바라볼 수 있었던 것 역시, 이전의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밤하늘의 별빛은 쓰로누스한테 써먹었고, 노을빛은 현성이한테 써먹었으니까.

“멋진 풍경이로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네.”

푸른 하늘,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 눈이 멀 것만 같은 아름다운 광경.

“우리는 모든 일이 끝난 이후에, 다시 한번 이 풍경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 새끼가 저 하늘을 다시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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