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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15화 (906/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15화

세라 (15)

‘그러고 보니 이 할아버지 성질 더럽기로 유명하기는 했잖아.’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이야 조금 온순해지기는 했지만 한참 때의 바젤 교황은 성정이 불같기로 유명했다.

추기경 때도 직접 메이스를 들고 다니며 언데드들의 뚝배기를 후려치기도 했고, 교황이 된 직후에도 많은 이들이 바젤 교황의 눈치를 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할아버지 하면 생각나는 장면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메이스를 가져오라며 호통치는 장면, 그 광기 어린 눈동자와 침을 튀기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중노 상태에 들어간 정하얀 못지않다.

“그 말이 정녕 사실인가!”

이 할아버지 지금까지 늙은 척한 거 아니야? 손등에 핏줄 선 거 봐. 아직 정정하시네. 이 양반. 괜히 걱정했자너.

“지금 당장 내 메이스를….”

다짜고짜 시바. 메이스부터 찾지 마.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바젤 교황님. 그저 제 추측일 뿐입니다.”

“베니고어 님은! 베니고어 님께서는 뭐라고 말하시던가.”

“사실…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사태가 조금 심각해졌다 이거야. 이해할 수 있지?

“이… 이런 일이… 어찌 이런 일이….”

푸들푸들 떨리는 턱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괜히 눈치를 보게 된다.

“물론 베니고어 님이 곁에 계시다는 것은 느껴지지만… 최근 이상한 꿈을 꾸게 되어… 물론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터라….”

“명예추기경. 혹시… 그게… 어떤 꿈인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뭐 뻔하지. 일단은 주저하는 모습부터 보이는 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이윽고 입을 열기 시작, 템플러 젠에게 말했던 것을 그대로 입에 담는다. 물론 조금 더 실감 나게 말이다.

지하실에 갇혀 있는 베니고어에 대한 묘사 조금 얹어주고… 배경 설명도 확실하게 해야지.

얼마나 끔찍한 장면이었는지, 얼마나 불경한 장면이었는지, 직접적인 묘사를 피하면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게 중요하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악마들이 게걸스럽게 성스러운 여신의 피를 받아먹는 모습을 설명할 때는 성자의 눈물을 흘린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이야기를 조금 실감 나게 하기는 했어. 바젤 교황뿐만이 아니라 환복을 도와주던 신도들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심지어 몇몇은 공포에 떨고 있는 모습, 본인들이 모시고 있는 신이 그런 꼴을 당하고 있다는데 침착하게 있을 수 있는 신자들이 얼마나 될까.

“마치 지옥 같은 장소였습니다. 제가 본 것이 차라리 거짓이었으면 좋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베니고어 님께서 고통받으실 거라고 생각하면….”

“베니고어시여… 아아… 베니고어 님….”

“흐윽… 흐으윽….”

“아흐윽… 베니고어 님….”

당연하지만 바젤 교황과 신도들은 내 이야기를 왜곡해서 듣지 않았다. 템플러들이 그 악마들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거겠지.

“당장… 당장! 그 템플러 잡놈들을 잡아 이단심문관에게 넘겨야 하네. 지금 이 순간에도 베니고어 님께서 도와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계시고 있지 않은가. 이 천하의 죽일 놈들이… 감히… 감히!”

‘그게 마음대로 되면 그렇게 했겠지.’

그래도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은 바젤 교황이 저쪽 라인이 아니었다는 것.

이미 요한 추기경과 만났을 때부터 대충 예상은 했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니 조금 더 이쪽 사람이라는 확신이 선다.

“저는 제 꿈이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이상 현상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몬스터 말입니다. 교황님.”

“그… 그래. 그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네.”

“성검에 선택을 받은 라파엘 님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더군요. 하지만 아직 단언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섣부르게 움직이다 혹시나 베니고어 님께서 변을 당하기라도 하신다면….”

“그런….”

“아마 저는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겁니다.”

“그… 그래. 명예추기경의 말이 옳아. 분노의 몸을 맡기는 것은 모든 일이 해결된 이후에도 늦지 않지.”

여기에서 확인해야 할 게 하나 더.

“혹시 바젤 교황님께서는 템플러가 어떻게 임명되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바젤 교황은 고개를 젓는다.

“그들은 교황청과는 다른 독립적인 기관이라네 명예추기경. 나 역시 기관을 통합하려고 해봤지만….”

‘쉽지 않았겠지.’

예상했던 그대로기는 하네.

템플러들이 교단 내 최고의 무력집단이라는 사실이 그들의 정통성에 힘을 실어줬을 가능성이 높다.

이곳은 평범한 사회가 아니잖아. 왕이고 귀족이고 정치인이든 간에 머리에 마법 맞으면 죽는 건 똑같으니까.

대놓고 채찍으로 후려갈기기보다는 어느 정도 당근을 주며 무력집단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처음 들어본 이야기지만 아마 템플러들의 문제 역시 바젤 교황이 개혁하고 싶어 했던 것 중 하나였던 모양.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바젤 교황님의 탓이 아닙니다.”

“…….”

“템플러들은 지금껏 교황청을 지키고 추기경들을 수호해온 존재들이 아닙니까. 그들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교단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겁니다. 그리고….”

“…….”

“그들 역시 아주 오랫동안 베니고어 님의 곁을 지키던 이들이 아닙니까. 무엇이 그들을 변하게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명예추기경의 선한 마음도 이해하네만 원인은 중요하지 않네. 그래. 그들이 악마에 쓰인 것일 수도 있겠지. 한순간에 유혹에 빠졌을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어찌 내가 그놈들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죄를 지었다면 응당 벌을 받아야 마땅하네. 이번만큼은 용서할 수 없어… 지옥의 유황불에 놈들을 처넣고 싶은 심정이라네.”

아무리 그래도 다짜고짜 뚝배기 깨자는 건 조금 그렇잖아. 아직 알아야 할 것도 많고… 들어야 할 것도 많은데.

무엇보다 이쪽에서 적대적으로 나왔을 때의 반응이 신경 쓰인다.

녀석들이 단순한 무력집단으로 남아 있다면 한번 헤집어 놓을 수 있었겠지만 요한 추기경의 손을 잡은 것을 보면 정치적 입지도 상당할 거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바젤 교황이 외통수에 걸릴 수도 있다는 거지.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어야 합니다. 교인들이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그들을 심판할 수 있을 겁니다.”

가장 첫 번째 과제는 녀석들을 깎아내리는 것.

“그래… 그렇지….”

“커다란 싸움이 끝난 직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 아닙니까. 신도들이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하다.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다소 억지스러울 수 있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있게끔 바젤 교황의 힘도 키워야겠지.

“명예추기경….”

“…….”

슬픈 얼굴 일발 장전. 슬쩍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린다.

“명예추기경님….”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마치 수도꼭지라도 틀어 놓은 것처럼 계속해서. 계속해서 성수와 다름없는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그래, 시바. 내가 흘리는 게 성수지 다른 게 성수겠어.

지금껏 참아왔던 감정이 터진 것일까. 자신만 알고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일까.

지금껏 애써 강한 척했었던 빛의 성자의 연약한 면모를 마주한 신도들이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바젤 교황 역시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중, 기도회가 얼마 남지 않은 현시점에서 감정의 둑이 터져 망가진 그 모습을 바라보는 눈에는 커다란 짐을 얹고 있는 이에 대한 동정이 들어서 있었다.

평소라면 받지 않았을 시선….

“명예추기경님… 역시 오늘 열리는 기도회는….”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분의 안전을 기도하는 것뿐이니까요.”

갑작스러운 명예추기경의 기도회 개연성도 확보하자너.

“주제넘은 말입니다만… 조금 시간을 늦추시는 것도….”

왜. 지금 내가 감정을 컨트롤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서? 아니면… 너무 울어서 얼굴이 엉망이야?

어쩌면 이 새끼들 이거 자기들한테 책임이 갈까 봐 말리는 거일 수도 있어.

장신구도 없고, 너무 처연한 모습으로 등장한 명예추기경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자신들한테 가는 걸 걱정하는 거 아니냐고.

물론 종교인들인 만큼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얘네들이 아직 뭘 모르네.’

원래 이런 게 더 먹히는 법이에요. 이 사람들아. 진정하고 나가면 안 되지.

약하고, 처연하고,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 모습이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오는 빛이야말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거 아니겠냐고.

위기를 맞은 대륙도 그랬잖아. 나는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으로 보여야 된다니까.

물론 그 안에 깃든 빛은 인간적이면 안 되지만 그 갭이 먹히는 거야. 그게 아이덴티티라고.

“괜찮습니다.”

이윽고 녀석들은 나를 말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듯 바젤 교황을 불러보지만….

“교황님….”

“명예추기경의 뜻대로 하게나. 누가 명예추기경을 말릴 수 있겠는가. 함께 베니고어 님을 위해 기도하게나.”

말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바젤 교황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내가 괜찮다는데. 얘네들은 왜 이래. 진짜. 그리고 이미 늦출 수도 없어요.’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교황청 전체가 울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정식으로 드리는 기도회인 만큼 규모가 확실히 다르기는 하네. 이윽고 성가대가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지금쯤 기도회를 드리러 온 이들이 입장하고 있는 것이리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빛의 성자의 몸을 부여잡은 신도들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이기는 했지만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굳이 닦으려고 하지 않는다.

‘김현성 이 새끼, 와 있지는 않겠지? 오지 말라고 했으니까.’

양심이 있으면 공화국에 처박혀 있겠지. 진청한테 붙잡아 놓으라고 했으니 둘이 함께 머쓱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

희라 누나는 온다고 했었고, 파란 길드원들도 전원 참석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계속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빛이 쏟아지는 대성당, 의도적으로 뚫어놓은 천장의 한편에서도 성스러운 빛이 쏟아져 내린다.

“명예추기경님….”

“아아… 빛의 아들이시여….”

기도회를 진행하기 위해 통로에 서 있던 신도들은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듯이 말을 아꼈지만 조용히 펼쳐진 날개를 보고서는 할 말을 잃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베니고어 님의 축복이 당신과 함께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빛의 아들이시여….”

의식을 함께 하기로 한 라파엘 역시 눈에 띈다.

“형… 괜찮으세요?”

위로해 주겠다는 듯이 머뭇거리며 손을 뻗어보지만…

탁!

‘너 이 새끼. 어딜 시바.’

“형?”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라파엘 님.”

사고 친 벌은 받아야 돼.

마침내 내가 자리에 오른 직후.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신도들이었다.

‘내가 이거 먹힐 줄 알았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 날개를 활짝 펴자 탄성을 내지르거나 고개를 돌린다.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바라보는 것조차 불경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날개가 잘빠지기는 했어. 빛무리 계속 떨어지는 거 봐. 진짜.’

내가 봐도 예쁘자너.

‘한 번 더 펄럭일까.’

환장한다. 진짜.

나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 눈물은 진실 되고 아름다웠으며 세상의 모든 아픔을, 세상의 모든 순수함을 담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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