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18화
세라 (18)
“여기는 대충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질긴 새끼들… 진짜.”
“여기도 정리 완료.”
“사제단은 부상자들을 수습하라.”
“형님. 괜찮은 거요? 형님… 거 눈 좀 떠보쇼. 어디 크게 다친 거요?”
여기저기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와중에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사제단은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있었고 성기사단은 이후의 습격을 대비하고 있는 중, 아마 내 주변에 성기사단으로 이루어진 벽이 세워 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박덕구는 내 옆에 붙어 있는 것 같았지만 파란 길드 역시 경계를 늦추고 있지 않을 것이다. 교황청 안에서 일어난 사고였으니까.
‘충격이 클 거야.’
당연히 교황청 관계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적들의 정체에 대해서, 적들의 목적에 대해서 아마 결론은 명예추기경의 신변을 위협하기 위해서라고 귀결되겠지만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은 기쁘다.
광장에 몬스터가 나타났다거나 숲속에서 특이한 몬스터가 발견됐다는 것과는 질이 다른 사고였으니까.
무려 교황청 안에서 일어난 사고가 아니었던가.
더군다나 놈들의 목표가 무려 대륙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빛의 성자란다.
대륙의 고위관료들이나 중요인사들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국가를 뒤흔들 수도 있었던 재난.
“성기사 놈들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게야!”
‘우리 교황님 호통 한번 잘 치시자너.’
“성기사라는 놈들이 몬스터가 교황청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이 못난 놈들! 이 못난 놈들!!”
“죄송합니다.”
“사과로 끝날 일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지… 지금 당장 네 머리를 메이스로 으깨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 미련한 것아!”
“죄송합니다.”
‘아직 안 죽기는 했어.’
“하지만 교황 성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네 변명은 듣고 싶지도 않다.”
‘성기사단장님 많이 고생하시네.’
“변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만 외부에서 적들이 찾아온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어서….”
여기서 슬슬 일어나는 게 괜찮겠네. 계속해서 나를 흔들고 있는 박덕구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조혜진의 시선이 슬슬 신경 쓰이기도 했고, 아무 죄 없는 기사단장을 구해줘야 했으니 말이다.
“으음….”
“명예추기경!”
“아… 으음….”
“명예추기경! 괜찮은가! 여봐라! 사제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게야! 명예추기경이….”
‘이 할아버지 숨넘어가겠네.’
“부길드마스터. 괜찮으신 겁니까?”
“형님… 거 형님 정신 차린 거요? 거, 성검용사 양반 혹시….”
“피를 뒤집어쓰기는 했지만 상처가 깊지는 않아요. 다행히….”
“거 뭐라고 감사의 말을 드려야 될지 모르겠소.”
“아니요. 형을 구한 건 제가 아니에요. 다행히 몬스터가 습격하기 전에 저기 계신 분께서 공격을 대신 막아주셨어요.”
적들의 습격으로 정신을 잃었던 연약한 빛의 성자, 즉 이기영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감사합니다. 젠 님.”
“명예추기경!”
“저는 괜찮습니다. 바젤 교황님. 잠깐 정신을 잃었을 뿐 몸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몬스터가 제가 다가오기 전에 저기 계신 분께서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일세….”
“그렇게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바젤 교황님.”
“내가 어떻게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바젤 할아버지의 표정이 재미있기는 하다. 기도회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악마 새끼들이라고 생각했던 템플러 중 하나가 내 목숨을 구해줬으니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물론 일단 고마워하는 것 같은 표정이 많이 담겨 있는 것 같기는 하다.
한편으로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걸 떠올리면서도 본능적으로 소중한 것을 구해줬다는 것에 대해 고마움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모두가 템플러 젠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 바젤 교황이 뭔가 코멘트를 남기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젠 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명예추기경님.”
“몸에 상처는 없으십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저보다는….”
물론 놈에게 상처는 없다. 욱씬거리는 곳이야 있겠지만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으니 금방 자가 회복했겠지 뭐.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추후에 한번 인사를 드리러 찾아가겠습니다.”
“그러실 필요는….”
“아니요. 꼭 찾아가겠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계속 여기서 감사 인사 가지고 실랑이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 큰 사건이 터졌으니 이후에 뒷수습이 먼저다.
녀석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조용히 고개를 숙인 이후 인파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 바젤 추기경이 가장 먼저 내 몸을 일으켜 세웠고 뒤이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파란 길드원들이 보인다.
정하얀은 아마 다른 곳에 있을 테고… 엘레나와 선희영이 내 몸을 한차례 살펴본 이후에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입 길드원들은 애매한 위치에서 눈치를 보는 중이고… 조혜진은 교황청 관계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부길드마스터는 파란 길드에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더 이곳에서 상태를 지켜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내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파란 길드에서는 어서 빨리 나를… 시바 그 창 없는 방으로 옮기고 싶을 테고, 교황청에서도 아마 나를 그냥 보내주기 싫을 것이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는 체면의 문제겠지. 교황청 한복판에서 일어난 정체불명의 사건, 곧바로 명예추기경이 교황청을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체면이 말이 아닐 테니까.
교황청은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 선포하는 꼴이고, 더 나아가서는 교황청 내부의 파벌 문제로 인한 테러 사건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그렇고 말이다.
‘사실 창 없는 방으로 가는 게 싫은 건 아니구….’
교황님 체면도 조금 생각해 줘야지. 자기가 저지른 것도 아닌데 말이야.
“저는 괜찮습니다. 혜진 씨.”
“부길드마스터. 혹시나….”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 다시 한번 습격당할 위험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교황청 안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기도회 도중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니… 제 책임도 어느 정도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걱정하는 일에 관해서는 교황청에서 어느 정도 배려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바젤 교황님. 괜찮으시다면….”
“그렇게 하지. 여기. 파란 길드원들이 지낼 곳을 마련해 주게.”
이게 합의점이라는 거겠지. 바젤 할아버지 말이 잘 통해서 좋아.
파란 길드원들이 나를 경호할 수 있도록 교황청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탄력적인 임무 수행을 위해 여러 가지를 권한을 준다는 거겠지.
아마 지금부터 내가 교황청에서 나갈 때까지 파란 길드원은 일반적인 성기사단의 직위에 해당하는 권한을 얻게 될 것이다.
교황청 곳곳을 제집 드나들 듯 샅샅이 살펴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장소를 사전 조사하는 것 정도는 가능해지지 않을까.
김예리나 김창렬이라면 그 와중에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고… 어쩌면 호탕한 바젤 교황의 성격상 더 큰 권한을 내려 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이를테면 눈앞에 있는 요한 추기경이라든가….
“교황 성하. 그건….”
“무엇이 그리 불만인가. 요한 추기경.”
“제가 어떻게 불만을 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 이들은 외부인입니다. 자칫 잘못해 불미스러운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지 걱정이 될 뿐입니다.”
“그럼! 지금 명예추기경을 이대로 파란 길드에 보내기라도 하자는 것인가! 교황청 한가운데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세. 요한 추기경! 또 명예추기경의 신변이 위협받고 있는데… 고작 그따위 것에 신경을 써? 저 아둔한 놈들에게만 어찌 명예추기경의 안전을 맡길 수 있느냐 이 말일세!”
“…….”
“만약 다시 한번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자네가 책임지기라도 할 텐가? 요한 추기경? 베니고어 님께 직접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눈앞에 있는 허상에 완전히 눈이 멀었어! 자네뿐만이 아니야. 우리들은 베니고어 님을 모시는 사제들이라 이 말일세! 그분을 모시고 그분의 뜻을 존중해야 하는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이 할아버지 말 잘해. 좀 뜬금없고 지나치게 흥분하기도 했는데. 박력 있자너. 역시 박력이 있어야지.’
정치 수완도 나쁜 편은 아니니 지금이 적기라는 것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정녕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지금 명예추기경이 얼마나 큰 양보를 하고 있는 건지. 정녕 몰라서 묻는 소린가!”
“…….”
“우리가 명예추기경에게 부탁을 해도 시원치 않은 판에. 뭐? 뭐? 불미스러운 사고? 불미스러운 사고라고 말했나! 지금 일어난 일이 불미스러운 사고일세. 요한 추기경!!”
눈에 핏발이 선 것이 보인다. 얼굴은 붉어지고 손들에 핏줄이 도드라진다.
당장 몸을 일으켜 메이스를 들고 설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피어날 정도, 오랜만에 큰소리를 치는 바젤 교황의 모습을 보니 내 속이 다 시원해진다.
사실 요한 추기경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네 잘못이잖아.’
안전에 대해 책임지지 못하는 것은 당연히 교황청 전체의 잘못이다. 애초부터 기도회가 진행되는 도중에 빛의 성자의 안전은 교황청에서 책임지겠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니 얘네들이 신도들과 함께 자리해 있었던 거지.
‘그러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너희들이 못 미더워서 파란 길드 좀 쓸게’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것도 아니고, ‘앞으로 교황청 좀 싸돌아다닐게’라고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잠깐 언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길드원들 좀 쓰겠다는 게 그렇게 불편해?
물론 불편할 것이다.
지금은 숨겨야 할 게 있으니까.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
“흑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가 파란 길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황 성하.”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우리 명예추기경을 습격한 몬스터 무리들은 신성력을 사용하고 있었네. 요한 추기경! 그 낡아빠진 사고방식은 도대체 언제 갈아 치울 텐가!”
“하지만 흑마법입니다. 바젤 교황님. 악마들이 사용하는 그!”
“신도들과 사제들을 살린 것이 바로 그 흑마법이야! 자네들의 목숨을 구한 것이 바로 그 흑마법이란 말일세!”
아주 진보적이야. 진짜. 난 진보적인 사람이 좋더라구.
“그녀가 악마와 계약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젤 교황님.”
악마가 아니라 정하얀이랑 계약했지.
자리에 없는 한소라를 대신해 나를 바라보는 요한 추기경의 모습, 나 역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도 그녀가 흑마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만… 분명히 악마와 계약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습니다.”
“명예추기경이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녀가 악마와 계약하지 않았다고!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건….”
“자네는 명예추기경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소린가? 베니고어의 아들, 빛의 성자인 명예추기경의 말을?!”
그렇지. 내가 말했다잖아. 그럼 맞아.
“무능한 성기사단이 손가락만 빨고 있는 동안 신도들을 지킨 이를 의심하고 핍박해? 그래. 요한 추기경 말해보게나. 성기사단의 단장은 외부에서 저 빌어먹을 괴물들을 볼 수 없었다고 말했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가 가나?”
“…….”
“저 괴물들이 교황청 안에 있었다. 이 말일세.”
“…….”
“저 괴물 놈들을 부른 것이 악마가 아니라! 같은 교황청의 식구라 이 말이야!”
창백해지는 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지네가 부른 거 아니니까 더 황당하겠지.
“…….”
“…….”
당연히 놈의 황당함도 이해할 수 있다.
그거 내가 만들었거든.
‘베니고어의 피눈물이 이럴 때 도움이 되네.’
베니고어 파산 사건 때 그녀에게 얻은 아이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