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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21화 (91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21화

세라 (21)

“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시선 좀 마주쳐봐.

“오, 오, 오빠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잘 모르겠는데. 마… 마력을….”

눈 좀 마주쳐보라니까.

“잃, 잃어버린 적 없는데… 헤…헤헤….”

당연히 잡아뗄 거라고 생각했었다.

“헤헤… 헤….”

라는 웃음소리를 내보이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게 눈에 보일 정도, 어떻게 들어도 어색함이 느껴지는 웃음소리였다.

내가 농담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웃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몸 전체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 그, 그런 적 없어요. 네… 설마요. 그… 그런데요. 오빠. 저… 저 조금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그놈의 몸은 수시로 안 좋아지자너.

“잃어버린 적 없어요. 네… 그런 적 없어요. 착… 착각하고 있으신 거 같은데… 아…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거 하루 종일 걸릴 거 같네.’

무작정 잡아떼기로 마음을 먹은 것처럼 보인다.

본인 역시 시선을 확실히 마주쳐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는지, 최대한 눈동자를 이쪽으로 굴리려고 노력하는 중.

마법에 대해서는 자신이 아는 것이 더 많으니 적당한 변명을 찾고 있는 거겠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도 계속해서 정하얀은 자신의 스탠드를 유지하기 시작한다.

자꾸만 말을 돌리려고 시도하거나, 아프다고 하거나, 배가 고프다고 하거나, 차를 한 잔 더 마시고 싶다고 하거나, 어울리지 않게 시답지 않는 농담을 던지는 것도 들린다.

솔직히 지금 얘는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거야.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을 거라고.

“그… 그런데… 그래서 말이에요. 그… 그때 소라가….”

다시 한번 이름을 불러보도록 하자.

“하얀아.”

자꾸 피하지 말라니까.

“나는 네가 걱정돼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설마 내가 그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네… 네?”

아마 정하얀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얘는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기영이 뭘 하는 사람인지 아주 잘 알고 있잖아. 진짜로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정말로 나를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 거야. 그렇지?

조금은 차가운 눈빛을 보내자, 아니나 다를까 몸을 움츠리는 정하얀의 모습이 보인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어떻게 해. 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녀 스스로도 갑자기 잊어버렸던 이기영의 모습을 새삼스레 깨달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까보다 얼굴이 더욱더 창백해졌다.

일이 커졌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리라. 지금 정하얀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치고 있을지 살짝 걱정되기는 했지만… 아니, 심지어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치 1회 차의 정하얀처럼 말이다.

본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는지 숨을 몰아쉬는 모습.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 흔들리는 눈. 심지어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이거 안 되겠다.’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해야지.

“우리 사이에는 숨기는 게 없어야 하잖아.”

“네? 아….”

“어떤 비밀이라도 공유하는 거 아니었어?”

“…….”

“하얀이를 나무라는 게 아니야. 어째서 하얀이가 내게 이걸 숨기려고 하는지. 왜 미리 말을 해주지 않았는지. 듣고 싶은 게 전부야. 그냥 평소처럼 이야기하고 싶은 건데…. 왜 그렇게 숨기려고 하는 거야?”

그래. 편한 분위기에서 대화하고 싶은 거라고.

“아… 그… 그러니까.”

“이런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나한테 알려줬으면 싶었는데… 나는 전부 알고 싶어. 하얀아.”

“…….”

“너에 대해서 전부 알고 싶어.”

“네… 네.”

예전이랑은 다르다니까. 직접적으로 말로 해주는 것보다 그런 느낌을 주는 게 효과가 더 좋을 것이다. 이미 반쯤 내 말에 긍정한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스스로 인정할지는 모르겠다.

확실히 이럴 때는 진심이 더 먹힐지도 몰라. 능력에 유무와 관계없이 내가 그녀를 아낀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무슨 회귀자 고백받는 것보다 더 힘든 것 같자너.’

“우리, 오래 알고 지냈잖아. 미래를 함께하기로 약속하기도 했고….”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너를 좋아해.

“우리 관계에서 신뢰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해.”

살짝 일방통행 느낌이 나기는 하지만 신뢰는 중요하지.

“네… 신, 신뢰… 맞아요. 그…그렇죠.”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게 서로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거야.”

“네… 거짓말은 하면 안 되는데….”

정말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한테 더 빠져 있다니까. 그깟 마력이 뭐라고 내가 너를 싫어할까 봐.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똑똑하고 매력적이야. 마법의 유무와는 상관없다니까.

뺨을 살살 어루만진다. 조금씩 조금씩 표정이 풀리는 게 보인다. 긴장했던 몸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은 느낌.

이번에는 살짝 뺨에 입술을 맞추자 몸을 부르르 떠는 게 전해져 왔다.

몸을 더 가까이 붙이고….

“알려줄 수 있을까?”

“네… 네… 그, 그렇게 할게요.”

정하얀은 뭔가에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물론 무척 떨려 보이기는 했다. 정하얀에게는 커다란 일이었을 테니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마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녀가 자기의 모든 걸 잃었다고 고백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응당 그녀뿐만이 아니다. 나 역시 정하얀과 같다. 어느날 갑자기 모든 걸 잃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김현성한테 회귀자 사용서를 잃었다고 말하거나 신도들에게 신성력을 잃어버렸다고 이야기 하거나.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정하얀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떨리고 무섭고, 두렵고, 하기 싫은 일이겠지. 특히 정하얀의 경우에는 더욱더 무서울 것이다. 얘한테는 그게 전부였을 테니까.

숨을 크게 한번 멈춘 이후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

“며… 며칠 전부터… 갑… 갑자기. 흐윽….”

“…….”

“이, 이, 이유는 모르겠는데… 갑자기… 전… 전부 안 되기 시작해서… 전, 전, 전부 사라져서… 히끅… 끄윽….”

말하면서 눈치보는 거 귀엽자너.

펑펑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계속 시도해 보려고 해도… 계, 계, 계속… 끄윽….”

“그래?”

“죄, 죄… 죄송해요… 히끅… 끄윽….”

죄송할 게 뭐가 있어. 하나도 없는데.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몸에는 다른 이상이 없는 거지?”

“네? 네….”

“건강은 괜찮아?”

정석이자너.

잃어버린 마법보다는 몸을 먼저 챙기는 거. 감동적이잖아.

“희영 씨나 엘레나 님한테… 진찰을 받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네?”

당연히 정하얀은 어안이 벙벙하다는 반응이다. 본인이 예상한 것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흘러가는 전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

차가운 반응이나 막장 드라마로 치닫는 전개를 생각했던 걸까. ‘그래? 너는 이제 쓸모가 없구나’라고 말이라도 들을까 봐 걱정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전형적인 쓰레기 주인공처럼 생각된다는 게 조금 슬프기도 했지만 모든 일이 끝난 이후 이기영은 가슴 따뜻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물론 내가 초반에 살짝 그러기는 했어. 근데 그건 옛날이기도 하고… 또 어쩔 수 없었던 거니까. 네가 착각했던 걸로 하는 거야. 그렇지?

“왜 지금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던 거야?”

“아… 그게… 그러니까.”

‘이럴 줄 몰랐으니까. 그렇지?’

손을 꼭 붙잡아 줘야지. 최대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하얀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것은 덤.

“혹시 나 때문은 아니야?”

너무나 많은 짐을 지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자기반성의 시간도 가져본다.

정하얀이니까 가능한 일이었지 사실 일반 마법사라면 탈진하고도 남을 임무들이 몇 가지 있었으니까.

전 대륙에 워프 게이트를 설치하는 것도 그렇고, 생각해 보면 마력 스팟을 메우는 일도 그래.

“오, 오, 오빠 때문은 아니에요.”

사실 나 때문이기는 해.

“이, 이유는 잘 모… 모르겠어서… 근, 근데 오빠 때문은 아니에요. 아, 아마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몸… 몸은 괜찮은 것 같아요. 소, 소라가 검사도 해줬구… 걱…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

“아, 아니… 조…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해요. 머, 머리랑… 가… 가슴이랑 답답해서….”

‘얘 이거 봐.’

“조, 조금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해요… 네… 그, 그런 것 같아요. 아무래도 아픈 것 같아요.”

“미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무척 간단하다.

‘얘 깨닫고 있나 봐.’

슬슬 눈치채고 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마력이나 능력의 유무는 전혀 상관없다고, 모든 게 자기 착각이었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고 말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미심쩍은 듯한 표정을 보내오기도 했지만 점점 표정이 펴지는 게 보인다. 눈에 띄게 안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웃네.’

얼굴에 살살 웃음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웃자너.’

“헤… 헤헤… 헤헤헤….”

진짜 기분 좋게 웃자너.

“헤헤… 흐윽… 히끅… 헤헤헤….”

왜 울어.

“흐윽… 흐그윽… 흐으윽….”

꼭 안아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푸… 히… 헤히힛….”

이건 좀 무서웠어.

“히… 헤히히힛….”

왜 그래. 너.

“푸푸… 흐헤히히힛.”

그만해….

한참 동안이나 이상한 웃음을 흘리는 과정은 아마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인지하는 과정일 것이다.

내가 옆에서 이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생각이 바뀌게 되니까 좋은 거지 뭐.’

이기영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마법이 없다고 버림받을 거라는 건 자기 착각 이었을 거라고, 굳이 성과가 있어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실성한 것 같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쌓인 게 많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과정이 긴 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얘 가치관이 형성된 건 대륙에 들어와서가 아니었으니까. 자신을 갉아먹었던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한결 더 보기 편하다.

“푸… 히히힛… 히끅… 히힛….”

“…….”

“히힛… 헤히히힛.”

그러다 불현듯 웃음을 멈춰 버린다.

“아….”

나는 정하얀이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추측이 맞다는 듯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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