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24화
젠 (3)
‘네. 그렇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임무 때문인가요?’
‘자세하게 말씀드리기는 힘들지만 대개 그렇습니다.’
‘흥미롭네요. 비밀 임무 같은 것이로군요.’
‘예.’
‘왕국연합에 있는 수많은 왕국에도 전부….’
‘거의 대부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짧은 시간이었지만… 각국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라마리아 산맥은 어떻던가요? 문화의 왕국이라고 불리는 겔리라 왕국은 다녀오셨습니까? 신비로운 비밀을 담은 유적지 포호아는요? 그곳의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던가요?’
‘겔리라 왕국에서는 꽤 오랫동안 지낸 적이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명예추기경님. 그러니까… 그곳에는 저명한 예술가….’
‘그렇군요. 저도 그분의 작품을 멀리서나마 본 적이 있습니다. 표현기법들이 굉장히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무구한 역사를 담은 건축 양식들도 그렇고… 아! 그러고 보니 그곳에는 왕국연합을 통일시킨 영웅 자르바한 님의 유산이 잠들어 있는 장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던전은 공략이 완료되었지만 아직 유산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은 상태일 겁니다. 어쩌면 주인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그 밖에도….’
‘아! 리마리아 산맥에는 그런 비밀이 숨겨져 있었군요.’
‘네. 요정족들이 사는 마을이 있습니다. 저도 제대로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요정이라… 정말로 동화 같은 이야기 같습니다. 듣기로는 요정들이 장난치는 걸 좋아한다고… 혹시 젠 님께서도… 그런 요정들에게 당한 적이 있으신지요.’
어제 나누었던 대화들이 생생히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너무 달라.”
너무 달랐으니까. 어제 자신이 명예추기경과 대화를 나누었는지 스스로에게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고, 평소에 품고 있었던 생각이 180도 뒤바뀔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희생과 부활의 신, 베니고어의 아들, 빛의 성자. 그를 나타내는 수식어는 많지만 그를 바라보기 전까지는 그게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명예추기경이 기적을 일으킨 것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일말의 의구심이 남아 있었다고 하는 것이 어울리리라.
정말로 듣던 대로의 성인이 실재할까. 정말로 세간에서 불리는 것처럼 그가 베니고어 님의 축복을 받은 성자일까. 정말로 그가 신의 선택을 받은 사자인가.
머릿속으로는 베니고어 님의 뜻을 의심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뭔가 이질적인 감각을 느낄 때가 많았다.
생각이 바뀐 것은 그를 직접 만난 직후.
매체나 영상을 통해서가 아닌,
그의 기도회를 직접 바라본 이후였다.
‘어쩌면 대륙에 새로운 위기가 찾아온 걸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정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명예추기경….”
‘하지만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베니고어 님께서는 결코 저희들이 이겨내지 못할 시련을 내려주시지 않으니까요. 항상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내려주십니다.’
“이기영….”
‘대륙은 항상 그래왔습니다. 매번 위험을 겪기는 했지만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강해졌습니다. 그 시련은 우리들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지만, 지금 이 아름다운 대륙이, 이 푸른 하늘이 바라볼 수 있었던 것 역시, 이전의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되어버린 계기였다.
그는 세간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던 그대로였다. 항상 자신을 낮추고, 항상 빛과 인간을 사랑하며, 언제나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성인.
베니고어의 아들.
빛의 현신.
인간을 초월한 성인.
스스로를 희생한 성자.
아니,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성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질적인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감각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어쩌면… 그 이질적인 감각은 인간으로서의 명예추기경의 모습이 아닐까.
신의 아들로서의 탈을 벗은, 책임과 직무를 벗어 던진 명예추기경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어제 목도한 것은 그런 명예추기경의 인간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렇군요. 요정족이라니… 혹시 실제로 볼 수 있을까요?’
‘요정은 정해진 장소를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정들을 개인이 소지하거나 억류하는 것은 대륙법으로도 금지하고 있어서… 아마 요정들의 서식지로 직접 가셔야 볼 수 있을 겁니다.’
‘아… 역시나… 아쉽게 됐네요. 언젠가는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짧았지만 무척 긴 것처럼 느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명예추기경의 흐트러진 모습이었으니까.
포도주 한 잔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도, 모험 이야기에 얼굴을 환하게 밝히는 모습도, 마치 어린아이처럼 흥분해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했던 모든 모습도 모두가 인간 이기영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베니고어 님에게 선택을 받은 것은 분명 축복일지도 모르지만… 아니, 분명 영광스러운 일이겠지만, 명예추기경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정말로 그런 삶이었을까.
신앙을 위해, 대륙을 위해, 대륙민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희생하는 삶이 정말로 그가 원하는 인생이었을까.
그 어떤 사람보다도 아름다운 풍경을 사랑하는 그가 원하는 게 정말로 갇혀 있는 삶일까.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해서는 안 될 생각이라는 것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진심 같았던 그 얼굴이 굉장히 기억에 남는다.
‘부럽군요. 세상 곳곳을 모두 둘러본다는 것 말입니다.’
‘명예추기경님께서도….’
‘아. 네. 저도 대륙 곳곳을 둘러보고는 있습니다… 그랬죠. 예전에는… 잠깐 모험가로 활동하기도… 했고요.’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는 아니겠지, 신전의 사제들에게 둘러싸여, 길드의 호위들에게 둘러싸여, 정해진 장소, 안전한 장소로 방문해 스케줄을 처리할 뿐이다.
아마 이게 명예추기경의 여행이고, 모험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마치 탑 위에 갇혀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 실례지만 내일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젠 님의 모험 이야기가 더 듣고 싶군요.’
바로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사색에 잠겨 있을 때였다.
“템플러 젠….”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익숙한 인형이 시야에 들어왔다.
“네. 템플러 시몬.”
“명예추기경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직까지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
“…….”
“그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템플러 젠. 조금 더 가까워진 이후에 그를 끌어들이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겠군요. 바젤 교황과 친분이 있으니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현재 명예추기경이 교황청의 중심에 있으니….”
“네.”
“어쨌든 그가 당신에게 우호적인 게 다행이로군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하… 어떻습니까. 무언가 알아차린 것 같은 낌새는….”
“그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설마요. 그 명예추기경이 아닙니까. 그가 관심 있는 건 고작해야 대륙민들의 안전과 신앙, 베니고어 님 뿐일 겁니다. 교황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도들이 부패하고 있는지 그가 알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빛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아주신다면 명예추기경님께서도 당연히 우리 손을 들어줄 것입니다.”
“템플러 시몬.”
“네. 템플러 젠.”
“혹시 계획을 철회할 생각은….”
“명예추기경을 끌어들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까?”
“…….”
“템플러 젠. 당신은 예전부터 그랬습니다. 착하고, 따뜻하고 쓸데없는 인정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나약한 감정들이 아닙니다. 대륙을 둘러보세요. 현재 대륙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눈을 뜨고 똑바로 바라보십시오. 베니고어 님께서 우리를 진정으로 저버리시기 전에 우리가 모든 걸 되돌려놔야 합니다.”
“…….”
“부패한 교황청을 처음으로 되돌리고, 타락한 신도들을 잡아 그분에게 바쳐야 합니다. 예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볼 수 없다는 건 템플러 젠이 더욱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행동하기 위해 힘을 받은 겁니다. 템플러 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바뀌는 건 없습니다. 지금까지 대륙은 항상 그래왔어요. 뜻이 있는 자들에 의해 변하고, 신앙과 빛에 의해 진화해왔습니다. 저희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템플러 시몬.”
“명예추기경님께서도 우리들을 이해하실 겁니다. 저 역시 그분을 더럽고 타락한 자들이 판치는 곳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지만 그것이 그분의 역할이 아닙니까.”
“희생하는 건 그분의 역할이 아닙니다. 템플러 시몬.”
“희생이 아니에요. 진화입니다. 명예추기경만 얻는다면 많은 신도들이 우리들을 지지할 거예요. 템플러 젠. 당연하지만….”
“네.”
“저는 그분이 우리들을 지지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베니고어 님의 뜻이니 말입니다. 그분이 진정으로 베니고어의 아들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우리들을 위해 힘을 써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
“…….”
“께름칙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템플러 젠. 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셔야지요.”
“…….”
“요한 추기경 쪽에게 들으니 벌써부터 바젤 교황이 움직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의원들과 힘 있는 자들을 모아 이번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요한 추기경에게 물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중에는 악의적으로 선동되고 날조된 이야기들이 섞여 있다고 하더군요.”
“…….”
“일주일입니다.”
“일주일이라고 하시면….”
“일주일 안에 그분을 우리 쪽으로 끌어와야 해요. 당신에게 모든 게 달려 있습니다. 저는 피를 흘리지 않고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습니다. 템플러 젠. 명예추기경 역시 교황청 내에서 피바람이 부는 걸 원치 않으실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상상하기조차 힘들어하실 것이 분명하다.
이게 정말로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을 지경.
아니, 정의는 이쪽에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어째서 베니고어 님께서 힘을 내리신 건지, 어째서 이 모든 사태가 일어난 건지는 너무나 명백했으니까.
그분에게 받은 힘을, 그분을 위해서 사용한다.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명예추기경님은.”
갑작스럽게 날아온 질문에는 괜스레 먼 곳을 바라보게 된다.
신도들에게 둘러싸여 조각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 것만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품에 안고 위로하며, 포용하는 모습.
하지만 저 웃음은 그의 진짜 웃음이 아닐 것이다.
가벼운 일정이 끝난 이후 공허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목도한 이후에는 더욱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여운… 불쌍한 분이십니다.”
빛으로 가득 찬 드넓은 하늘을 누구보다 사랑하면서도 날아오를 수 없는 성인. 그 누구보다도 대륙을 사랑하면서도, 신전에 갇혀 있어야 하는 성자.
“정말로… 가슴 아픈 분이십니다.”
그는 여전히 대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었다.
진정한 자신을… 화려한 빛 속에 숨기는 형태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