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25화
젠 (4)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명예추기경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제르니한 대주교께서 금방 도착하실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꿋꿋하게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내 역할이었으니까.
자신을 숨기고 정말로 원하는 것을 뒤로하는 것은 빛의 선택을 받은 성자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다.
명예추기경은 시바 괴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숭고한 역할을 기쁘고 영광스럽게 받아들인다.
항상 같은 시간에 일어나 기도를 드리고 개인적인 업무를 마친다.
매번 같은, 지루할 만큼 반복된 일정을 수행하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꿋꿋해야 하자너.’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보고 싶은 것이 있지만 명예추기경은 오늘도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밖에 없다.
그게 세상이 명예추기경에게 원하는 모습이었으니까. 그게… 베니고어 님께서 내게 원하는 모습이었으니까.
늘 단정하고, 웃음 지으며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게 바로 나의 숙명이었으니까.
‘여행을 떠나고 싶어.’
모험을 떠나고 싶어. 신기하고 신비로운 것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진짜 나다운 게 무엇인지 느끼고 싶어.
푸른 하늘은 끝이 없이 펼쳐져 있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빛의 성자에게는 드넓은 창공을 날아다닐 수 있는 날개가 있지만 나는 내 날개를 펼칠 수 없다.
그런 건 허락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자신을 죽이고 살아가는 것은 익숙하다.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며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어째서 빛의 성자는 간혹 공허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일까.
“여행을….”
-지랄하지 마요. 오빠 여행 싫어하잖아요.
‘아. 왜 분위기 깨고 그래.’
-모험도 원정도 질색하던 양반이 갑자기 그러니까 설득력 없는 거 알아요? 야전 취침은 등이 불편해서 싫고 행군은 다리랑 어깨가 아파서 싫다는 사람이… 자기 배낭이나 제대로 들어본 적 있어요? 전부 다 그 돼지한테 다 맡겼으면서… 할 줄 아는 건 모닥불 뒤집는 것밖에 없잖아. 캠프나 설치할 줄 아나 몰라.
-꼭 그렇지만도 않은데?
-오빠가 좋아하는 여행 있기는 있네요. 안전하고 럭셔리한 거. 매일매일 깨끗이 씻어야 되고 더러운 건 불결해서 싫고. 조금이라도 힘들면 업혀 이동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저보다 더 깔끔 떠는 사람이 무슨 땀내 나는 모험이에요. 심지어 정하얀이 워프마법 배운 이후에는 몇 킬로미터도 걸어본 적 없잖아요.
-나 몰입 좀 하게 내버려 두면 안 돼?
-너무 꼴불견이니까. 하는 소리죠. 참나. 저걸 믿는 병신도 있네요.
“…….”
-말도 안 되는 걸 작업 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집중해야지. 그리고 이게 설득력 없는 것도 아니라니까. 그리고 생각해 봐, 누나. 내가 아등바등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굴러다녔었는데. 옛날에는 던전도 다니고 그랬었잖아. 이거 믿을 만해. 되는 코인이라니까?
말하자면 빛의 성자의 안에 있는 작은 아이가 세상을 둘러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교황청에 들어가서 베니고어의 선택을 받기 전에는 모험가로 활동했다는 이력이 확실하게 있으니까.’
실감 나는 연기력만 뒷받침되면, 누가 봐도 그럴듯한 스토리가 완성된다.
-먼 산 한번 바라봐주고, 공허한 눈빛 한번 쏴주고… 특히 요즘은 매일 만나고 있으니까.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더라.
-그래요. 반응 괜찮겠죠.
-처음에는 어색하게 대화하는 것 같은데. 어제는 지가 더 신난 것 같더라니까. 자료 같은 것도 보여주면서 열변을 토하면서 묘사하는데. 나 거기 실제로 가 본 줄.
-…….
-얘가 쫌 얼빵해서 그렇지. 열의가 있어.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게 괜찮아 보인다니까.
-딱 거기까지일 수도 있잖아요. 템플러 젠이 오빠를 데리고 바깥에 나가준다는 보장 있어요? 걔 입장에서는 그건 베니고어를 거역하는 거로 비칠 수가 있다구요.
-처음에만 힘든 거야. 그리고 베니고어를 거역하는 거라는 건 확대해석이라니까. 처음에는 동네 마실 나가는 정도로 시작하면 돼. 점점 범위를 늘려가는 것도 중요하고… 마지막에는 짜잔.
-확실해요?
-계획대로면 오늘 안에 교황청을 나가는 거로.
-뭐, 계획대로 되길 빌게요. 아! 저는 다시 이빨 털러 가 볼게요. 그쪽 분위기는 좀 괜찮죠?
-흉흉해.
-괜찮네요.
라는 말을 끝으로 통신이 뚝 하고 끊겨 버린다. 누나도 누나 일을 제대로 해주고 있으니 나도 슬슬 내 할 일을 할 시간.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기가 무섭게 익숙한 인형이 시야에 들어온다.
“명예추기경님.”
“오랜만입니다. 제니르한 대주교님.”
바젤 쪽의 인사도, 요한 추기경 쪽의 인사도 아닌 녀석, 완고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명예추기경을 진심으로 모시고 있는 사제 중 하나였다.
“잠깐… 외출을 요청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제니르한 대주교님.”
“혹시… 어떤 용건인지 들어도 되겠습니까?”
긴장할 필요 없다. 차분차분 필요한 걸 이야기하면 되니까.
“알고 계시겠지만… 역병이 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우연히, 그러니까, 아주 우연히 갑작스레 일어난 역병 사태. 언제나 그렇듯 내 입장에서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현재 사제단이 파견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니르한 대주교.”
“…….”
“…….”
“죄송합니다. 명예추기경님. 현재 교황청에서 총력을 다해 사태를 진정시키고 있습니다. 명예추기경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규모가 크지 않으니… 거기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은 명예추기경님 자신의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해 주시는 게….”
“제니르한 대주교님. 하지만….”
“명예추기경님의 마음을 어찌 제가 모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암살미수 사건이 일어난지 아직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현재 교황청 내부에서도 최선을 다해 사건을 조사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정황이 드러나지 않은 상황입니다. 명예추기경님. 이런 시기에 밖으로 나가시는 건….”
“하지만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지 않습니까. 제니르한 대주교님.”
“교황청에서 지원 사제들을 보냈습니다. 명예추기경님.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역병을 진정시키고 있으니… 명예추기경님께서는….”
“제니르한 대주교님. 제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쉽게 진정시킬 수 있는 역병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직접… 아니, 교황청에서 불허한다면 파란 길드와 함께 가겠습니다. 바젤 교황님께 안내해 주세요. 직접 인사를 드리고 나가겠습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완고의 아이콘. 제니르한 대주교가 아니다. 기대에 부응하듯 수염을 파르르 떨며 입을 여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파란 길드에서도 이미 합의되어 있는 사안입니다. 파란 길드원들도, 또 저희 베니고어 교단도 명예추기경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말로 떠나시길 원하신다면 추진해 드리겠지만 감당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명예추기경님.”
그래. 말 잘하네. 내가 원하는 대답이 바로 그거였어.
“명예추기경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저희들의 입장에서는 호위 병력들을 함께 파견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성기사단과 이단심문관, 또 보호사제들이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당연히 동행하게 해준다는 것은 아니다. 내 귀에는 현실적으로 생각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수많은 성기사단과 사제들을 움직이는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준비에도 오랜 시간을 쏟을 수밖에 없다.
교황청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만큼 안전에 신경을 써야 할 테고… 어느 정도 제약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은 당연하다.
어쩌면 역병에 걸린 환자들을 대상으로 수색하거나, 주변인들을 경계해야 할지도 모른다.
의지만으로는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평소라면 모르겠지만 암살미수 사건으로 이목이 집중된 지금은 더욱더 불가능한 일.
호위 병력이 밀집된 만큼 인파도 몰릴 테고, 인파가 몰린 만큼 더욱더 의외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극단적으로 찾아가는 것 자체가 민폐일지도 모른다.
제니르한 대주교는 나를 생각해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의도가 어떤지 깨닫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방해가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슬프다.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명예추기경님. 어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다만 현실적인 문제를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슬플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아. 어쩜 이렇게 슬픈 상황이 일어날 수 있을까.
“최대한 빠르게 방법을 마련해 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나….”
“네. 제니르한 대주교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제가… 제가 못난 부탁을 드렸군요.”
생활연기라는 게 원래 평소에도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지. 명예추기경은 다시 한번 억지 미소를 짓는다.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듯이 일부러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제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제니르한 대주교.”
“명… 명예추기경님.”
‘아냐. 네가 낚이면 안 되지. 빨리 가.’
“후우….”
‘아냐. 낚이지 말고 그냥 가.’
다행스럽게도 입술을 꾹 닫고 허리를 숙이는 녀석이 시야에 들어온다.
더 이상 협상의 여지는 없다는 듯, 완고한 스탠드를 유지하는 놈을 보니 사람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연하지만 빛의 성자는 한숨을 크게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성자. 모두가 빛의 아들이라고 치켜세우고 있었지만 사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나약하디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모든 게 자신 탓이라고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모든 게 내 탓이야.’
우울한 감정이 전신을 뒤덮는다.
이윽고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명예추기경님.”
“…….”
“명예추기경님?”
“오늘은 만나고 싶지 않다고 전해주세요.”
“…….”
“아니… 조금 피곤하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흐윽….”
울음소리 한 번 흘려주고.
“템플러 젠에게는 죄송하다고….”
“네.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명예추기경은 울지 않지만… 가끔 혼자 있을 때는 눈물을 흘리지.
아. 상처를 치료해 줄 사람 어디 없나.
가만히 놔두면 끊임없이 덧날 텐데.
‘이대로 그냥 놔둔다고?’
이미 소문 다 돌았을 거 아니야. 그 새끼 어쩌면 훔쳐보고 있었을 수도 있는데. 이걸 거른다고?
너도 시바 나한테 원하는 거 있잖아.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인데 한번 던져볼 만하지 않나.
굳이 네 본의가 아니더라도 시켜서 올 만도 하잖아. 지금 같은 기회가 또 어디 있다고.
공허한 눈빛으로 하늘 바라보기.
또르르 눈물 흘리기.
커다랗게 한숨 쉬기.
손등으로 눈물 닦아내기.
슬픈 표정 일발 장전.
다시 한번 텅 빈 눈빛 보내기.
그리고
똑똑 소리가 창문에서 들려왔다.
“무례하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젠….”
한 박자 쉬어주고.
“님?”
의외라는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보내주는 것도 중요하지.
“잠깐 산책이라도 나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녀석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뻔할 뻔 자.
‘너 이 범죄자 예정자 새끼.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
항상 그렇듯 처음은 쉬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