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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26화 (91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26화

젠 (5)

“네? 어디를….”

“함께 가시죠.”

녀석의 눈빛 속에 들어 있는 것은 틀림없이 동정이었다. 가혹한 운명을 부여받은 빛의 성자를 향한 동정,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눈에 보이기로는 명예추기경을 가엾게 여기는 것만 같았다.

물론 확실하지는 않다. 템플러 젠의 입장상 내 호감을 얻어야 했으니까.

지금 이 상황은 녀석과 시몬, 요한 추기경이 만들어준 기회일 수도 있다는 거지.

사실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은 없지만 놈이 내게 연민을 느낀다는 건 꽤 흥미롭다.

‘너무 쉽게 낚인 거 아니야?’

그야 누가 나를 가엾게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범죄자 새끼가 흥미롭기는 하다. 보통의 사람들은 동정을 할지언정 행동하지 않으니까.

상처에 공감하는 것과 직접 손길을 내미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녀석의 경우에는….

‘성격이 원래 저런 성격인가.’

의식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지만 어쩌면 내 모습에 자신을 비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신전에서 거둬진 삶, 철이 들기 전에 템플러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았던 유년 시절,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느꼈겠지.

가지고 있는 신앙 때문에 자신의 삶이 축복받은 삶이라 여기고 있겠지만 정말로 녀석의 무의식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빛의 성자에 비해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자신이 정말로 자유롭다고 느낄까.

내가 베니고어의 선택을 받은 것에 대해 축복이 아닌 동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조금 의뭉스럽기는 하지.’

나를 통해 자기 자신을 보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전부 연기일 수도 있고….’

현재 중요한 건 이 범죄자가 나를 밖으로 데려나가는 것 하나다.

“지,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다른 분들을 깨우고 싶지 않아요. 죄송합니다만….”

“그런 말이 아닙니다.”

한가하게 교황청 산책이나 하자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거지?

“젠 님. 죄송하지만….”

“같이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바보라도 이 정도로 말한다면 알아들어야 한다.

밤중에 명예추기경의 창문을 두드린 무례한 행동,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음에도 찾아온 녀석이 기껏 와서 한다는 말이 산책이란다.

내가 아무리 순진한 빛의 성자라고 해도 녀석의 말에 숨어 있는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안 된다.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은 것은 당연지사.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 답답한 장소를 벗어나고 싶다는 듯, 아주 잠깐이라도 마음의 위로를 받고 싶다는 듯 멍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다. 당연히 녀석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밤공기가 차갑습니다.”

‘그래. 준비해 왔구나.’

“조금 지저분하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커다란 모포가 순식간에 몸에 감긴다.

아마 신분을 감추기 위한 용도로 가져왔음이 분명하리라.

‘확실히 더럽기는 하네. 시바.’

그야 이 정도는 돼야 정체를 숨길 수 있겠지.

“무례를 용서하시길.”

그다음 녀석은 한 손으로 나를 안은 이후에 하늘로 향하기 시작했다. 날개를 나보다 늦게 단 게 분명함에도 하늘을 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김현성보다 빠르지는 않았지만 너무나도 휙휙 지나가는 풍경과 바람 소리가 이질적으로 들려온다.

‘이거 안 걸리려나.’

너무 쉽게 빠져나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창렬이랑 리안이한테는 이야기해 놓으면 되고….’

성기사단이나 경비들은 녀석이 처리했겠지. 자신이 있었으니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윽고 공중에 살짝 멈칫한 녀석, 지저분한 모포를 살짝 들추자 교국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밤하늘에 빛나고 있는 별만큼이나 많은 불빛들이 도시를 비추고 있다.

너무나 뻔한 광경이지만 눈을 커다랗게 뜰 수밖에 없다.

“와아….”

하는 작위적인 목소리도 한번 내질러 줘야지.

“아름답군요.”

별로 아름답지는 않아.

“네. 저도 그런 생각을 하기는 합니다.”

“그, 그런데… 젠 님… 이건 괜찮은 겁니…까?”

“아마 괜찮지 않을 겁니다. 성기사단이나, 사제단에서 알게 된다면 문책 정도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그냥… 이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할까. 피식 웃으며 뻔한 대사 한번 날려줘야지.

“그럼… 공범이로군요.”

“네?”

“함께 빠져나왔으니 공범이 아닙니까. 몇 시간 정도 있다가 돌아가면 되나요?”

“약 세 시간 정도… 밖에는….”

“충분한 시간이네요.”

단 세 시간이지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답답한 새장 속을 뛰쳐나갈 수 있다. 지긋지긋한 족쇄를 잠깐이나마 풀어버릴 수 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갇혀 살았던 것 같은 스탠드를 취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오랜만에 진심을 담은 미소를 머금는다.

몸을 뒤덮고 있는 모포가 조금 더러운 게 짜증 나기는 했지만 오히려 반갑다는 웃음을 보낸다.

이런 게 필요했어. 명예추기경에게는 이런 시간이 필요했다고. 라고 말하는 것처럼 활기찬 행동도 보여주는 것이 옳다.

너무 신난 거 아니야? 라는 기분이 느껴지게끔 말이다. 잠깐이나마 명예추기경의 탈을 벗어 던지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넘치는 이기영으로 되돌아가자.

“어디로 가는 겁니까?”

“명예추기경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저는… 저는 잘….”

“그럼 야시장부터 구경하는 것이 좋겠군요.”

“야시장인가요?”

“네.”

선택지가 적절하기는 하네.

지나치게 안전한 장소보다는 교국민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장소를 우선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실제로 수도에 있는 야시장은 가 본 적이 없으니까.

아무래도 중심지에서 멀어진 장소이다 보니 찾을 일이 없기도 했고, 또 시간 특성상 명예추기경의 신분으로도 방문하기도 힘든 장소였다.

“여기서부터는 걸으셔야 합니다.”

“네!”

빛의 성자는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여러 가지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익숙하지 않은 광경들이다. 명예추기경으로서, 파란 부길드마스터로서가 아닌 이기영으로서 걷는 거리는 익숙하지 않다.

인사를 해오지도 않고 기도를 드리지도 않는다. 모두가 자신에게만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모습, 사실…

‘관심 좀 가져줬으면 좋겠자너.’

관심을 가져주는 게 더 익숙하고 기분 좋기는 하지만 티를 낼 수 있을 리 만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금 주춤거렸던 발걸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당당해진다.

여러 가지 신기한 광경들을 계속해서 눈에 담는다. 걸음걸이는 점차 빨라지고 상점에 진열되어 있는 것에도 손을 대본다.

“젠 님! 이것 좀 보세요.”

“네.”

“저게 뭔가요?”

뭐긴 뭐야. 시바. 걍 서민 음식이겠지.

“하급몬스터의 햄비어의 부산물처럼 보입니다. 식용으로도 사용 가능한 소재라고 들었는데… 맛이 독특하다고 들었습니다.”

“네? 몬스터를….”

내가 귀하게 크기는 했어. 파란 길드에서 너무 낭낭하게 지냈잖아.

“한번 드셔보겠습니까?”

‘뭐? 너 이 시발 새끼 미쳤어?’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네! 물론입니다.”

라고 활기찬 이기영이 대신 대답한다. 처음 느껴보는 경험에 기대된다는 듯이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표정으로 템플러 젠이 저 정체불명의 음식을 사 오는 것을 기다린다.

“받으시죠.”

“네….”

조금은 겁먹은 표정으로 녀석을 베어 물고 우물우물 씹자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지기 시작.

생각보다 먹을 만하지만 비쥬얼이 조금 거슬리다 보니 목으로 넘기기가 쉽지 않다.

시바. 무너지면 안 돼. 이기영. 무너지면….

“맛, 맛있군요!”

“하하.”

“고소하네요. 이건….”

“하나 더 드시겠습니까?”

‘뭐?’

“네! 부탁드려요, 젠 님.”

이 범죄자 새끼. 넌 진짜 나중에 뒤졌어. 이 새끼. 진짜.

“아! 저것 보세요. 젠 님. 지금 길거리 공연을 하는 중이네요.”

“그럼 그곳으로 가시죠.”

“네!”

“일어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지니!”

“아.”

“일어나라! 나의 영웅이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지니!”

“…….”

저 길거리 공연의 내용이 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항상 이렇게 시끌벅적한 건가요?”

“네. 저도 자주 나오지는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거기. 이것 하나 먹어보고 가!”

“여기 와서 물건 좀 보고 가세요! 하급 포션들 팔아요!”

“여러 가지 식기들 판매하고 있습니다.”

“직접 조각한 베니고어 님의 목각상입니다.”

“아!”

“명예추기경님의 목각상도 있습니다. 하나 드릴까요?”

“베니고어 님의 목각상으로….”

“네. 여기 있습니다.”

“계, 계산은….”

시세를 모르고 돈도 없으니 어벙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

너무 설정 과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조용히 다가온 녀석이 계산을 마치고 베니고어의 목각상을 건넨다.

“감사합니다. 젠님.”

소중하게 그것을 품에 안은 이후에는 다시 다른 곳으로 뛰어가고, 여러 가지 상점들과 사람들을 구경하는 사람들 속으로 섞이기 시작한다.

술에 취한 행인들 마주치고, 여러 가지 노점상 같은 곳에 들락거리고, 일부러 오버스럽게 리액션을 취하며 박수를 쳐댄다. 심지어 손목에 헤나도 받고.

“이것 보세요. 젠 님.”

“잘 어울리시는군요.”

“내일은 소매가 긴 옷을 입어야겠습니다.”

행복한 척하기도 쉽지 않아. 사실 아까부터 다리 아프자너. 빨리 집에 들어가서 쉬고 싶은데. 시바, 세 시간이 이렇게 길어? 실화야?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되는데.

그래도 행복한 척하자. 정말로 기분 좋은 척해야지. 그래야 다음번에도 또 데리고 나와주지.

‘영원히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자너.’

너무 행복하다.

날아갈 것처럼 행복해. 이게 자유로움인가 봐.

당연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아까부터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녀석이 눈에 띈다.

내 연기가 죽이기는 했는지, 무척 걱정스러워하는 눈빛.

하지만 명예추기경은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는다. 내가 정말로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아주 잠깐 동안 얻은 자유. 그것을 선물해 준 젠 에게는 감사한 마음뿐이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 정도가 전부. 나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만… 돌아갈까요?”

죄책감이 뒤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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