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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27화 (918/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27화

젠 (6)

“그럼… 오늘도 돌아갈까요?”

“…….”

‘표정은 여전해.’

며칠이 더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놈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작은 일탈을 저질렀던 첫 번째 날처럼 여전히 동정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나름대로 숨기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명예추기경의 삶에 대한 동정을 멈출 수 없는 모양.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다든가, 유난히 말수가 줄어든다든가 하는 정황들을 보여주고 있으니 나로서도 애써 힘찬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본래 애매하게 슬퍼하는 것보다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이다. 가혹한 운명을 타고난 성자가 매번 밝은 척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꿋꿋하게, 밝게, 이런 건 별것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넘기는 내 모습은 내가 봐도 감동적이다.

‘몰입했더니 눈물 나올 것 같자너.’

울지 마. 이기영. 더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거야. 너는 강하잖아.

‘울지 말자.’

템플러 젠에게 민폐야. 웃자. 웃는 거야. 넌 지금 행복하잖아.

“항상 감사합니다. 젠 님.”

“네?”

“저를 이렇게 데리고 나와 주시는 것 말입니다.”

“그건….”

“대륙은 참 넓군요.”

“네?”

“아니, 넓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제가 보지 못한 곳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야시장에서 울려 퍼지는 활기찬 목소리나, 작은 극단의 연극, 이 장소도 그래요.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강가에 이런 건축물들이 숨어 있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요?”

“…….”

“심지어 모험가들의 쉼터로 쓰인다니… 뭔가 낭만적인 곳입니다. 음유시인들이 부르는 노래나 즉석에서 파티를 만들기도 하고, 캠프도 공유하고 말이에요. 뭔가… 정겹습니다.”

확실히 특이하기는 해. 슬며시 주변을 둘러보자 삼삼오오 모여 있는 모험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고대양식처럼 느껴지는 폐건축물, 어떤 용도로 쓰일까 추측이 되지 않은 건물이 지금은 모험가들을 지켜주는 캠프가 되어 있다.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하급 모험가들은 함께 사냥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가볍게 럼주를 기울인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낭만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실상은 거지꼴을 하고 있는 노숙자들이 술에 취해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폐건물은 지저분한 것은 물론 여기저기에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고, 누군가 버리고 간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이 개새끼들 바닥에 침 좀 뱉지 마 진짜. 시바. 연초도 시바 버리지 말라고.

“저도 한때는 모험가여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일단 도시 밖으로 나오면 다른 파티 분들과 협력하기 쉽지 않거든요. 모두가 모두를 적으로 생각한답니다. 저도 당연히 그랬었어요.”

사실 모험가로 구른 시간은 짧다는 걸 녀석 역시 알고 있을 터, 내가 아는 척하는 게 우스운 모양인지 조용히 미소 짓는 게 보인다.

“하하….”

“정말입니다. 젠 님. 저도 잔뼈가 굵은 모험가 였….”

“네. 그렇겠지요.”

“…….”

“하하….”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어이. 거기는 같이 안 마실 겁니까?”

“아….”

“차려놓은 것 없지만 함께 드시죠. 피차 사냥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같이 정보도 공유하고 말입니다.”

“저, 저희는….”

당연히 템플러 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 저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지만 이제는 집에 가야 할 시간이 아니었던가.

당연하지만 빛의 성자의 탈을 벗은 이기영은 이들과 더 호흡하고 어울리고 싶다.

빤히 녀석을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있다가 가시죠.”

“그래도 되나요?”

“네.”

수줍은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모험가들에게 합류한다.

누군가가 금방 사용한 것 같은 잔이 건네지고 맛없는 럼주가 따라진다.

위생상태는 개 오바인 것 같지만 인상을 찌푸릴 수는 없는 노릇, 젠 역시 다르지 않다. 혹시나 일어날 불상사를 막기 위해 내 옆에서 조용히 잔을 건네받고 있다. 거기 독 안 들어 있어.

“둘은 어디서 왔수?”

“캐슬락에서 왔습니다.”

“거, 멀리서도 왔구먼… 하긴 뭐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거니까. 장비 꼴을 보아하니 쫓겨난 모양이오?”

다른 모험가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이곳은 처음인 겁니까?”

“네. 안전한 사냥터가 있다고 해서 먼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대답한 것은 역시나 예비 범죄자. 딱히 말을 맞추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녀석이 떠들어 대는 걸 들어줄 수밖에 없다.

“상당히 친해 보이던데… 파티를 짠 지 꽤 오래됐나 보구만….”

이런 질문에는 당연히 내가 대답해야지.

“네.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

“믿을 만한 파티원이 있다는 건 좋지.”

“그, 그는 단순한 파티원이 아니라 제 친우입니다.”

당연히 이런 대사도 한번 날려주고 말이야.

감동했어? 그래. 우리 친구잖아. 그렇지. 친구 맞잖아.

만난 시간은 짧아도 그게 우리 우정을 대변해 주지는 않잖아. 무척 짧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의미 있는 관계라니까.

혹시나 내 말이 무례하게 들리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녀석을 눈으로 확인한 이후에는 작게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

“팀워크 하나는 좋겠네. 큰 의미 있는 질문은 아닌데. 혹시 괜찮으면 내일 사냥이나….”

“죄송합니다. 아침이 오기 전까지는 돌아가야 해서.”

“생각보다 일찍 떠나는군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럼주나 한 잔 더 듭시다. 이 럼주에는 햄비어가 딱이지!”

아 시바 그거 주지 마.

맛없어.

장담하건대 역대 최악의 럼주라고 할 만했다.

“그럼 오늘도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젠 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나쁘지 않은 이벤트였어. 결정적인 한 방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 만족할 만한 이벤트였다구.

특히나 친우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라고 지껄인 게 최고의 성과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시간이 너무 짧아.’

없는 우정을 만들어내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한정적인 게 흠. 몇 달이나 걸쳐서 작업을 치는 게 일반적이었던 만큼 지금 이 순간이 무척 짧게 느껴졌다.

“명예추기경님. 접니다.”

“오셨나요?”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오늘은 어디로 가나요?”

“교국의 밖으로 벗어나 보려고 합니다.”

“정, 정말인가요?”

교국의 밖으로 나가거나.

“젠 님! 위험합니다! 제가 지금! 앗! 위험해!”

“괜찮습니다. 명예추기경님. 충분히 혼자서 상대할 수 있습니다.”

“젠 님! 왼쪽입니다!”

“핫!”

우연히 만난 몬스터를 함께 무찌른다거나.

“흐윽… 흐윽….”

“명예추기경님….”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이미 숨을 거둔 것 같습니다. 명예추기경님의 탓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희가 조금 더 빨리 도착했더라면… 그랬다면… 이분들이 희생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

세상의 악의에 희생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서사가 쌓일수록 둘의 우정이 점점 커지는 것은 당연지사. 시간이 짧은 만큼 하나하나의 이벤트에 공을 기울여야 했다.

“젠 님!”

“명예추기경님.”

평범한 사건 따위는 없다. 이게 바로 주인공의 삶이 아니겠어. 명탐정들이 방문한 곳에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것마냥 명예추기경과 젠이 방문하는 곳에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일어난다.

“이쪽으로 타 교단의 신도들입니다.”

“어, 어떻게!”

“괜찮습니다. 아마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내일부터는 조금 더 변장에 공을 들여야겠군요.”

다른 교단의 사제들과 마주치기도 하고….

“젠 님, 오늘도 가는 건가요?”

“네.”

“오늘은 어디로….”

“배를 준비했습니다.”

“네?”

바다로 나가기도 한다.

“해적이에요! 해적입니다! 젠 님!”

“내가 바로 해적왕 골P 로저다! 하하하하핫!”

“크윽!”

“조심하세요, 젠 님!”

가끔은 위협적인 적들도 만나줘야지.

흐릿하게만 보였던 우정이 점차 형태를 갖추고 가짜 유대가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하루 업무를 마친 뒤에 만나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어느새 너무나도 당연한 일과가 되어버렸다.

가끔은 밤새 다음 모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밤이 아닌 낮에 만나기도 한다.

물론 여전히 교황청의 분위기는 뒤숭숭했지만, 바젤 교황의 눈치를 보면서 녀석과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젠과 빛의 성자는 특별한 추억을 가지고 있거든. 함께 하늘을 바라보는 거 말이야.

“멋진 풍경이로군요.”

이 풍경은 안 먹히는 데가 없어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네요. 베니고어 님의 선물입니다. 감사의 기도를….”

“네… 베니고어 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명예추기경님.”

녀석은 떠올리고 있다. 놈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은 아니지만 녀석은 틀림없이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교황청이 아니라, 갑갑한, 갇혀 있는 이곳이 아니라, 더 많은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이 아니라, 밝게 빛나는 대륙의 모든 하늘을 거닐게 해주고 싶다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놈이 자신과 나를 동일시하고 있는 게 맞다면, 충분히 손을 내밀 여지는 있다.

물론 계기가 있어야겠지.

원래 이야기가 전환되는 시점은 갈등이 일어났을 때고. 타이밍상으로는 슬슬 지금쯤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 맞다.

마냥 행복한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이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자너. 시바. 세상이 우리 우정을 갈라놓으려고 하고 있잖아.

녀석도 사실 원하는 게 있잖아. 명예추기경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순수한 마음을 이용한 거라고 봐도 되지 않나.

녀석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게 교황청의 파벌에 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거고 말이야.

녀석이 말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말하면 돼.

여느 때와 같은 시각, 창문을 두드린 이후에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온 예비 범죄자.

나는 공허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뭉쳐 있는 서류를 조용히 건네며.

순수한 빛의 성자의 마음을 이용한 악당에게 이 거짓된 관계에 대한 진실에 대해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 이것 때문이었습니까?”

이 새끼 범죄자 되기 1시간 25분 전.

“이것 때문에… 겨우 이런 것 때문에! 제 환심을 사려고 하셨던 겁니까! 지금까지 제게 해주셨던 모든 게… 이것… 때문이었습니까?”

이 새끼 범죄자 되기 1시간 24분 전.

“말씀하세요! 말씀해 보세요! 템플러 젠!”

친우에게 배신당한 절망,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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